[pkmn] 글

그들 사이의 미지수 1

underneath by 시그
1
0
0

봄기운이 만연한 어느날의 아침, 호연 고등학교의 체육 교사 순무는 학생들의 복장 단속을 위해 교문 입구에 서 있었다. 가장 학생들이 많이 들어오는 정문 앞에 선 그는 담당 학생과 함께 둘이서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복장이 단정치 못한 학생이 있는지를 살폈다. 아직 학기가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모두들 교복을 제대로 갖춰 입고 있다.

왼손에 찬 손목 시계를 슬쩍 보면 시간은 곧 여덟 시에 가까웠다. 늘 이 시간에 맞춰서 오는 자가 있다. 순무는 오늘도 학생들 사이에 섞인 채 느릿하게 걸어오는 그 자를 발견하고는 빠른 발걸음으로 앞길을 막아섰다. 햇빛에 반짝이는 검회색의 짧은 머리칼,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맹한 표정, 피곤해 보이기도 하는 붉은빛의 눈동자, 약간 굽은 등, 제대로 채우지 않은 셔츠 단추. 순무는 그런 나누를 보며 외친다.

"단추! 끝까지 잠그세요. 허리! 구부정한 자세 금지!"

선척적으로 목소리가 큰 순무가 단숨에 외치면 등교하던 학생들도 그 광경을 보고는 저들끼리 깔깔대며 지나간다. 제자리에 멈춰 선 채 뒤통수를 벅벅 긁은 나누도 같이 장단을 맞춘다고, 알겠다는 대답을 하며 벌점 명단에 자신의 이름을 대충 쓴 뒤 다시 털레털레 걸어간다. 매일 지각에 가까운 출근을 하는 나누 선생님을 혼내는 순무 선생님의 모습은 아침마다 보지 않으면 섭섭할 정도다.

학생부 업무를 끝마치고 교무실로 돌아오면 옆자리의 나누는 어딜 갔는지 자리에 없었다. 몇 없는 벌점 명단을 보며 교사용 프로그램에 벌점을 입력하던 순무는 제일 마지막에 대충 휘갈긴 이름을 보고는 남몰래 미소를 지었다.

교직에 몸 담은 지 겨우 이 년째인 순무는 이곳 호연 지방 출신이었다. 작은 시골 마을에서 나고 자라 산과 들을 누비고 다닌 그는 고향을 좋아했기에 고향 지방에 발령받은 것에 무척 애착이 있는 사람이었다. 또한 어릴 때부터 타고난 운동 신경과 체력을 자랑하던 그는 순수한 열정을 품고서 교육의 꿈에 도전하게 되었다.

실습 때에는 생각만큼 잘 하지 못했다. 겨우 몇살 차이나는 학생들을 대하는 것도 서툴렀다. 특히 여학생들에게는 자주 휘둘리곤 했다. 그렇게 어리숙하게 정식으로 교사가 된 작년은 너무나 힘들었다. 그러나 올해는 많은 것이 달라졌다. 짧은 경험을 발전시켜 학생부의 지도 교사가 되기도 했고, 새로 부임한 교사도 있었기 때문이다.

순무의 옆자리를 배정받은 나누는 성도 지방 출신이었다. 나누는 호연 지방으로 첫발령을 받은 수학 교사였다. 개학 전 부임식에서 자기 소개를 하던 첫인상은 또랑또랑했다. 낮지만 부드럽게 흐르는 목소리로 부끄러워하면서도 막힘없이 말하는 모습에 순무는 약간 동경하는 마음을 품었다. 자신의 또래로 보이는 나누는 분명 어른스럽다는 말이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옆에서 지켜보면서 곧바로 풀어진 나누의 행태에 실망했다. 분명 초임일 텐데도 나누는 열정 가득한 순무와 비슷한 구석이라곤 없었다. 그는 애연가였고 얼굴은 항상 기운 없어 보였고 아침잠이 많아 아슬아슬하게 출근하곤 했다. 어딘지 모르게 의뭉스러운 면도 있었다. 언제나 기운 넘치고 밝게 웃는 순무와는 정반대였다. 그게 나누의 본모습이었다.

열심히 하려 하지 않는 나누가 탐탁지 않았지만, 그의 본래 성격이 원래 그렇다는 것을 빠르게 인정하고 받아들인 순무때문에 둘의 사이가 가까워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자리도 바로 옆인데다 평소에는 차분하고 가끔 재밌는 말도 할 줄 아는 나누와 나이가 같은 것을 알게 되자 더욱 친해지게 되었다. 젊은 편에 속하는 교사들도 있지만 나이가 같은 사람은 둘밖에 없었던 것이다.

첫인상의 환상에서 깨어나, 나누에게 다가가는 것이 편해진 순무는 자신도 겨우 이 년차이면서 아무것도 모르는 나누를 도와주고 싶어졌다. 언젠가부터 나누의 곁을 따라다니며 서로 좋은 직장 동료가 되길, 되어주길 바랐다. 전공 과목은 달라도 새내기들끼리 업무에 대해 열심히 머리를 굴리면 그것마저 즐거웠다.

언뜻 보면 껄렁해 보여도 나누는 제대로 인성을 갖춘 사람이었다. 교무실 뒷편의 교정에 설치된 흡연 부스에서만 담배를 피웠고, 냄새를 최대한 없애기 위해 손도 꼬박꼬박 씻고 가글로 입 속까지 청결히 하고 돌아왔다. 농땡이를 부리긴 해도 어디까지나 할 일을 다 끝낸 뒤에 빈둥거렸다. 순무는 나누의 그런 점들이 좋았다. 할 땐 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친해진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나누가 일을 하는 모습들은 부임식에서 느꼈던 첫인상과 비슷하게 다가왔다.

아직 확신할 순 없지만, 가끔 나누와 대화할 때 그를 한 꺼풀 벗겨내기 어렵다는 느낌이 들곤 했다. 나누는 스스로에 대해 잘 드러내지 않으면서 대화를 이어가곤 했다. 순무는 이제 막 친해졌으니 그런 거라 여겼다. 좀 더 친해지면 알게 되는 것이 늘어날 것이라고 생각했다. 성도 지방에서 어떻게 살았으며 왜 선생님이 되려고 결심했는지, 어떻게 준비했는지 등등.

순무는 낯선 타지방의 삶에 적응해가며 업무를 익히는 나누를 학생처럼 신경쓰면서, 능청맞고 대범하기도 하며 세심하고 사려깊은 그를 다시금 동경하게 되었다. 처음 맡은 업무도 척척 해내며 교사들에게서 좋은 소리만을 들었다. 단지 잦은 지각과 멍한 얼굴이 흠이라면 흠이었다.

어느날 아이들에게 문제를 풀어보라고 시킨 뒤 운동장에서 수업 지도 중인 순무나 멍하니 바라보던 나누는 문득, 순무가 자신의 일상에서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침에 출근하면 제일 먼저 만나는 직장 동료였고 배정받은 자리도 옆자리였다. 친한 교사가 별로 없기에 점심도 함께 먹었고 운동장에서 들리는 우렁찬 목소리에 창 밖을 보면 언제나 순무가 있었다.

학기가 막 시작되었을 무렵에는 서로 말도 잘 하지 않고 어색했는데, 업무 처리에 애를 먹고 헤매고 있으면 먼저 다가와서 손을 내밀어준 것은 순무였다. 아침마다 장난과도 같은 지적을 하며 나누와 친해지려 한 것도 그가 넓은 아량과 살가운 성격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모두가 좋아하는 사람. 정말로 자신과 반대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순무가 나누를 어떻게 생각하는진 모르겠지만 닮은 점이 없어도 그가 편하게 느껴졌다. 순무는 머릿속에서 생각하면 마음 속에 켜켜이 열이 오르는 사람이었다. 참으로 신기한 일이었다.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그가 짓는 함박웃음과 함께 따스한 햇빛을 품은 온기에 가슴 속이 들떴다. 아직 이 감정을 제대로 정의할 수 없는 나누의 건조하고 메마른 마음은 순수하고 다정다감한 순무의 매력에 서서히 젖어들어갔다.

요란한 자신과 다르게 차분한 나누를 동경하는 순무와 순무와 있을 때면 더 많이 웃게 되는 나누가 조금 더 친해지는 것은 삼월의 끝무렵, 첫회식날이었다. 개학 직후엔 굉장히 바빴으나 이제 한숨 좀 돌릴 때가 되자 교무 부장인 권수가 자리를 마련한 것이다. 교사들과 좌식 주점에 가서도 둘은 당연한 것처럼 함께 착석했다. 그러자 나누의 눈에 저 멀리 앉은 권수가 못마땅한 표정을 짓는 것이 보였다.

"순무, 너 항상 나누 선생님이랑만 있지 말고, 좀! 다른 선생님들이랑도 친해져야지."

나누는 갑작스러운 권수의 호통에 놀라 눈을 크게 떴다. 느닷없는 반말에 지적까지? 재빨리 고개를 돌리고 순무를 보면 순무는 곤란한 것처럼 눈썹을 찡그리고 있었다.

"저, 저는 이제 아는 분들이 많아서 괜찮은데 나누 선생님은 아직 친한 분이 안 계시잖아요."

"원래 이런 자리에서 친해지는 거야! 아, 여기 주문 할게요."

왁자지껄한 분위기 속에서 권수가 직원에게 갖가지 안주와 주류를 주문하는 사이, 나누는 목소리를 낮추고 조용히 묻는다.

"교무 부장님 원래 저런 분이셨어요? 교내에선 반말 안 하시는 분이잖아요."

걱정 가득한 나누와 달리 순무는 싱긋 웃으며 대답한다.

"교무 부장님이랑 옛날부터 아는 사이거든요. 학교에선 직장이라 그런지 직장 동료로 대하시는데 밖에선 안 그러세요."

"아, 그러셨구나. 다짜고짜 선생님을 혼내시길래 엄청 놀랐어요."

순무와 같이 체육을 맡고 있는 권수도 호연 지방 출신인 것은 알고 있었지만 순무가 어릴 때부터 친했던 것은 몰랐다. 그제서야 나누는 권수가 은근히 순무를 편애하던 것이 왜 그랬던 것인지 깨달았다. 교과목 혹은 학생 지도에 대해 이야기가 있다며 몰래 교무실 밖으로 불러내서는 몸에 좋다는 약품을 쥐어준다든지, 유난히 순무를 칭찬한다든지, 많지는 않아도 그런 적이 몇 번 있었다. 한 번은 순무가 혹시 낙하산은 아닌지 의심한 적도 있었다.

또, 권수가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 것을 알고 있기도 했다. 늘 지각에 가까운 시간에 출근하는 점, 생기라곤 없는 표정과 말투, 제대로 채우지 않는 셔츠 단추. 매일 권수에게 지적받는 것들이었다. 그런 나누가 누구나 모범 교사로 여기는 순무와 친한 것에 못마땅한 것이 당연했다. 나누는 피식 웃으며 앞으로 재밌는 관계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술을 몇 입 마시고 음식을 먹으며 맞은편의 동료들과 이야기를 하던 나누는 순무의 얼굴이 벌써 빨개진 것을 보았다. 그렇게 많이 마시지도 않았는데…… 라고 생각하며 괜찮냐고 묻자 괜찮다고 대답한다.

"바람 좀 쐴까요?"

그렇게 물으면 고개를 끄덕인다. 나누는 동료 교사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순무와 잠깐 가게 밖으로 나왔다.

"사실 저 술에 약하거든요. 근데 빨리 취했다가 빨리 깨는 편이에요. 그래서 젊었을 땐 항상 친구들 뒷처리를 하곤 했어요."

밤이 되어버린 하늘을 올려다보는 순무는 질린다는 듯한 말투로 과장해서 인상을 찌푸렸다. 나누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전 술자리를 별로 좋아하진 않지만 그래도 마시면 잘 취하지 않아요. 그래서 저도 남들 뒤치다꺼리를 했었어요."

나누와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 생기자 기쁘게 미소를 지은 순무는 거기에 동의했다. 말했던 대로 나누는 안색 하나 변함이 없는 채로 순무를 보며 웃었다. 미소를 따라 절로 눈웃음이 지어지는 붉은색 눈동자로 시선이 향하게 된다.

순무가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고 있자 나누는 그것을 피하는 것처럼 눈을 내리깔았다. 말이 없어지자 어색하다. 뭔가 말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았기에 오른손에 주먹을 살짝 쥐고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재밌었던 일 중 하나는, 저에게 경찰관인 친구가 있는데요. 그 친구가 취하면 되게 재밌거든요. 워낙 튼튼해서 숙취도 없는 신기한 녀석이에요. 몇 년 전 일인데… 같이 술을 마시고 취한 친구를 겨우 끌고 자취방에 돌아왔어요. 저는 그 때 실습 중이었고 친구는 이미 경찰이었어요. 제가 다음날에 늦잠을 자버린 거에요. 몰래 친구네 경찰차를 얻어타서 지각은 피했죠."

나누는 재밌을지 모르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멋쩍은 것처럼 살짝 쥐고만 있던 주먹을 풀고 콧등을 긁었다. 순무는 그거 경범죄 아니냐 물었고 나누는 풉 웃었다.

"그 땐 젊었으니까 무모했죠. 지금은 그렇지 않아요."

서로 다른 지방에 있기도 하고요, 라며 이야기를 끝맺은 나누는 다시 눈을 올려 순무를 보았다. 순무는 나누의 이야기가 재미있었는지 입을 살짝 벌리고 웃고 있었다. 이런 재밌는 얘기, 선생님에게만 들려주는 거에요. 어쩐지 그런 말을 덧붙이고 싶었지만 하지 않았다. 약간 취한 순무에게 말해봤자 기억하지 못할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나누의 추측대로 순무는 취해가는 중이었다. 순무는 취하면 솔직하게 할 말을 하는 술버릇이 있었다. 나누는 아직 그것을 몰랐다. 그래서 순무가 꺼내는 말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저도 선생님이랑 그렇게 좋은 추억을 만들고 싶네요."

순진하게 입이 찢어지도록 씨익 웃는 얼굴에 나누는 어떻게 대답할지를 몰랐다. 금요일 밤의 번화가가 온통 소란스러운 그 가운데, 마치 둘만이 남겨진 것처럼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게 된다. 그저 순수하게 친구이자 동료로 지내고 싶다는 의도였겠지만, 그런 식으로 말하면 누구나 당황할 것이다.

나누는 계속해서 대답을 할지 말지 고민하다가 마침내 대답을 하기로 결심했다. 먼저 다가와 준 것도 감사한 일이었으니 자신과 친해지고 싶다는 그의 마음에 그러겠다고 대답해야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선생님이라면……."

누구도 본 적 없을 진지한 얼굴로 순무의 눈을 바라보며 조용히 말을 꺼내던 나누는, 가게 문을 벌컥 열고 나온 권수의 등장에 재빨리 입을 닫았다. 권수는 순무의 옆으로 다가가서는 허옇게 세어버린 긴 콧수염을 만지며 나누를 한 번 보았다. 원래부터 매섭게 찢어진 눈매가 지금은 공포스러웠다.

"순무가 취한 것 같으니 제가 이만 데려다 줘야겠습니다."

"아… 예. 그러세요."

교무 부장을 감히 거스를 수 없는 나누는 아쉬운 느낌을 받으며 권수의 손짓을 따라 엉거주춤 끌려가는 순무를 바라보기만 했다.

"저 아직 괜찮은데요?"

"얼굴이 이렇게 시뻘건데 무슨 소리야. 일찍 들어가서 쉬어."

"아녜요, 저 더 있을 수 있어요."

"아 글쎄, 아니라니까."

권수와 순무의 실랑이를 지켜보던 나누는 순무가 갑자기 손을 내밀자 깜짝 놀랐다. 이 사람, 취하니까 왜 이리 돌발 행동을 많이 하는 거야?

"저랑 같이 가요."

"아… 예. 그럴게요."

나누는 놀랐던 것을 애써 감추고서 순무의 손을 잡았다. 왜 잡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잡으라고 내민 손이었으니 잡은 것이었다. 처음으로 맞닿는 그의 손은 꽤 뜨겁고 딴딴했다. 나누는 긴장한 상태로 재빨리 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부끄러움을 닮은 낯선 감정이 나누를 휘감는다.

순무는 권수에게 이제 괜찮죠? 라고 한 뒤 가게 안으로 들어가서 자리에 두었던 겉옷을 챙기고 동료들에게 인사를 했다. 엉겁결에 함께 가서 인사를 올린 뒤 순무와 가게를 나선 나누는, 월요일이면 권수의 분노가 가득한 잔소리를 들을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하며 월요일엔 좀 일찍 출근해야겠다고 결심했다.

가게 밖으로 나가기 싫었지만 순무를 따라 나오면 권수는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가늘게 뜬 눈에 담긴 많은 말들을 피하듯 허리를 숙이고 권수에게 인사를 올린 나누는 앞서 걸어가는 순무의 뒤를 따라갔다.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었지만 목적지보다는 왜 그랬던 건지가 제일 궁금해서 묻기로 했다.

"왜 그러신 거에요?"

"술자리 별로 안 좋아하신댔잖아요."

고개를 뒤로 돌리고 대답한 순무는 권수 덕분에 둘이서만 빠져나온 것이 좋아서 실실 웃었다. 빨리 취하는 만큼 빨리 깬다는 말은 사실이었다. 순무는 아직 약간 벌건 얼굴이었지만 제대로 걸으며 대답도 똑바로 했다.

지나가는 말로 한 건데 배려해 준 건가? 나누는 또다시 자신을 도와준 순무가 고마웠다. 한 편으로는 권수에게 마음대로 말할 수 있는 용기가 부럽기도 했다.

"……근데 어디 가시는 거에요?"

"저기 강변에 산책로가 있어요."

"몰랐어요. 강만 있는 줄 알았는데."

아직 호연 지방 지리에 밝지 않은 나누는 순무를 따라서 처음 가보는 산책로를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둘은 한참동안 말없이 걷기 좋게 다져진 길을 걸으며 가끔씩은 강물을 쳐다보거나 하기도 했다.

"권수 선생님이 아직도 저를 어릴 때처럼 취급하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아요."

갑자기 침묵을 깨고 나온 말에 나누는 대답하지 않았다.

"선생님을 좋아하시지 않는 것도 알아요. 항상 저에게 너무 친해지지 말라고 하시거든요."

이미 느끼고 있던 거라 타격없는 나누는 여전히 대답없이 길만 따라 걷는다.

"아깐 죄송했어요. 권수 선생님이 저를 어릴 때부터 봐오셔서 걱정하시는 마음에 그런 거니까 이해해 주세요."

"그래야죠, 뭐. 제가 어떻게 하겠어요."

그러자 순무는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강을 바라보았다. 나누도 그 옆에 멈춰 서서 봄의 밤빛을 띄운 채 유유자적하게 흐르는 강을 보다가, 주머니를 뒤져 담배와 라이터를 꺼냈다. 한 대 피우고 싶은 기분이었다.

순무도 어느정도 알고 있는 것에 조금은 마음이 놓였다. 권수가 나누에 대해 부정적으로 말하고 행동을 취할 때마다 순무는 나누 편을 들려고 할 것이다. 그는 분명 그럴 것이다. 그런 확신이 지금 뺨을 스치는 봄바람처럼 기분 좋게 다가왔다. 나누는 담배 연기를 한숨과 함께 내뱉으며 쌓여있는 걱정 거리를 덜어냈다.

"선생님께는 항상 죄송해요."

나직이 내뱉은 순무의 말에 나누는 머쓱한 기분이 들어 괜히 뒤통수만 벅벅 긁었다. 권수때문에 계속 부담이 되었던 건가? 별로 상관은 없었다. 권수가 어떻게 굴든, 나누는 지금처럼 맡은 일을 성실히 해내고 아이들을 가르치고 순무와 사이좋게 지낼 것이기 때문이다. 매일 지각하는 습관은 빼기로 하자.

"괜찮으니까 그렇게 생각하지 마세요. 저야말로 죄송한데요."

말을 끝내면 강을 바라보던 순무가 고개를 돌리고 나누를 보았다.

"왜요?"

"저는 처음이라 아무것도 모르는데 선생님이 먼저 이것저것 가르쳐 주셨잖아요."

"그건 당연한 거에요."

바로 나온 대답에 나누는 웃음이 터졌다. 바쁘고 귀찮을 텐데도 알아서 나누의 어려움을 헤아리고 도와주는 선의는 정말 돈을 내서라도 배우고 싶을 정도다. 나누는 그들 사이에 권수가 있더라도 순무와 잘 지낼 것을 예감하며, 아까 순무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저도 선생님이랑 그렇게 좋은 추억을 만들고 싶네요.

"선생님이라면 좋은 추억을 만들 수 있을 것 같아요."

나누는 다하지 못했던 대답을 했다.

카테고리
#기타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