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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밟는 호연의 땅은 여전한 열기를 머금고서 방문객들을 맞이한다. 하지만 지금같은 계절엔 그다지 반갑지 않다. 호연의 여름은 그 어느 지방보다 덥기 때문이다. 옷을 자주 갈아입은 것은 성가시지만 어차피 오래 머무를 거니까, 하고서 옷가지들을 마구 챙긴 뒤에 이미 며칠 전에 택배로 부쳐둔 상태이다. 아마 주인보다 짐이 먼저 도착해있을 것이다.

성도에서 대중교통을 이용해 겨우 호연에 발을 디딘 나누는 곧장 휴대기기로 오랜 친구에게 연락을 넣었다. 신호음이 몇번 간 뒤, 반가워하는 목소리가 어디에 있냐고 물어서 지금 서있는 곳을 둘러보며 알려주었다. 전화를 끊지 않은 채 헤매다보면 아는 얼굴이 달려오는 것이 보인다. 바로 찾았네? 하고 물으면 친구-순무는 당연한 거라고 대답해온다.

나누가 호연까지 온 것은 그리 특별한 일이 아니다. 아직 어렸던 학생시절, 나누는 교환학생으로 선발되어 호연에서 잠깐 학교를 다니며 포켓몬 육성이나 상성에 관련된 수업에 열중했다. 둘은 그 때 그곳에서 만나 지금까지 친하게 지내고 있는 것이었다. 성인이 될 때까지 연락을 주고 받으며, 가끔 돈과 시간이 넘칠 때는 서로 거주하는 지방에 놀러가고 있었다.

졸려보이는 눈에 매사에 귀찮아하며 나른한 태도를 취하는 나누와 언제나 열정 가득히 눈을 빛내는 순무는 친구가 될 구석이 없어 보이지만 의외로 나누가 호연에 서식하는 포켓몬인 깜까미에 대한 관심이 높았었기에, 모험심이 강한 순무가 그를 도와 함께 깜까미를 찾아 여정을 떠나곤 했다. 그리고 빈손으로 돌아오기 일쑤였다.

으레 호기심이 강한 나이였던 둘은 구멍가게에서 산 장난감 보석을 손에 들고서 어두운 숲속과 동굴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녔다. 늦은 밤까지 위험한 곳을 돌아다녀 둘 다 순무의 부모님에게 혼나는 일이 잦았다. 그러나 나누는 우여곡절 끝에 깜까미를 잡는 것에 성공했다.

그런 대담한 시절이 지난 후, 둘은 장래희망인 훌륭한 포켓몬 트레이너가 되기 위해 정진하고 있었다. 늘 귀찮아하며 뒤로 빠지지만 막상 앞에 나서게 되면 붉은 눈을 한껏 빛내는 나누는 학업과 실전에서 평판이 좋아 부모님을 포함해 나름 그에게 기대하는 층이 두터웠다. 그래서 이번에 호연을 찾은 것도 그때문이다.

새롭게 호연 사천왕의 일원이 된 드래곤타입 전문 트레이너 권수가 가까운 곳에서 여름방학기간동안 드래곤타입에 대해 강의를 하게 되었다. 부모님은 사천왕이 직접 포켓몬에 대해 가르치는 일은 흔하지 않다면서 방학동안 빈둥대지 말고 강의나 들으라며 나누를 독촉했고, 어쩔 수 없이 등떠밀려 떠나온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간만에 찾은 호연에서 나누는 칼라셔츠를 걸치고 있었고 아래에 입은 면바지는 선이 고운 그의 발목을 드러내고 있었다. 어쩐지 세련된 느낌의 나누와 달리 순무는 나시가 그려진 티셔츠에 무릎 아래까지 오는 바지를 입고 나타났다. 나누는 옷에 그려진 나시 그림을 보고는 비웃으며 놀렸고 순무는 여름느낌 나서 괜찮지 않냐며 웃었다. 여름과 어울리는 물포켓몬도 많은데 맹하게 생긴 나시가 뭐냐느니 언젠간 알로라에 가서 커다란 나시를 보고 싶다느니 그런 잡담들을 해본다.

여름방학동안 순무네 집에서 생활해야 했기에 우선은 순무네 부모님께 드릴 선물같은 것을 사야했다. 그들은 번화가를 둘러보며 잘 닦인 길을 걸었다. 문득 전자제품 매장에서 틀어놓은 홍보용 텔레비전에 광고가 나와 순무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걸음을 멈추고 그 자리에 서서 바라보면, 내년 봄에 개최될 호연리그에 대한 광고가 통유리 너머에서 소리없이 흘러나오고 있다.

"뭐야? 아하."

나누가 미동도 없는 순무를 힐끔 쳐다보더니 팔을 잡고 통유리에 가까이 다가간다. 순무는 눈을 반짝이며 호연 리그에 나가보고 싶다고 중얼거렸다. 대부분의 트레이너들은 체육관에 도전하고 리그에 출전하여 실력을 확인받고 명성을 드높이는 것이 목표였다. 둘도 예외는 아니었다. 때문에 순무는 광고 내용에 더욱 집중한다.

유능한 베테랑 트레이너 셋이 지나간 뒤에는 초신성같은 존재인 권수가 나타났다. 앞서 지나간 세 사람에 비해 아직 새파랗게 젊었다. 순무가 계속 서서 화면을 바라보자 나누도 함께 보면서 사천왕들이 어떤 사람인지 파악해보려 했다. 권수의 첫인상은 찢어진 눈매와 짧게 기른 콧수염때문에 깐깐하고 엄격해보였다. 나누는 이런 사람이 진행하는 강의는 무척 따분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순무는 여전히 화면을 주시하며 눈을 빛내고 있었다. 그 옆모습을 슬쩍 본 나누는 이제 흥미가 없어진 것인지 피곤하니 빨리 가자며 재촉했고 순무는 어쩔 수없이 자리를 떠났다.

친구네 집에서 환영을 받고 호의의 뜻으로 사간 선물을 드린 뒤 나누는 미리 부쳐두어 도착해있던 짐을 정리했다. 그러면서 부모님의 학구열에 불평하긴 했으나 그분들의 말씀대로 사천왕이 직접 포켓몬에 대해 강의를 하는 일은 성도에서마저 드물었다. 경험많고 높은 위치에 있으니 도움이 되긴 하겠다, 라는 생각이 들자 귀찮아도 공부의 일환으로 여기기로 했다.

편한 차림이 된 둘은 방의 창문을 열어놓고 여름밤의 바람을 맞으며 이런저런 만사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그리고 곧 참석할 강의에 관해서도 입에 올렸다. 재밌을까? 라는 물음에 이런 건 재미가 아니라 훌륭한 트레이너가 되기 위한 공부라는 대답이 무뚝뚝하게 튀어나왔다.

순무는 나누만큼 학구파가 아니었지만, 나누는 문무를 잘 갖춘 친구였기에 곧잘 그의 말에 이끌리곤 했다. 흥미나 재미를 추구하기보다는 나누의 말대로 학습을 중점에 두기로 한다. 흥미로운 요소가 없다고 판단되면 강의를 들으러 가기 싫어질 것 같아서다. 그리고 나누가 그때문에 일부러(부모님의 성화에 못 이기긴 했지만) 호연까지 와주기도 한 것이다.

꿈꾸는 미래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장난을 치며 웃고 떠들다 보면 밤은 늦게 깊어갔고 그와 반대로 아침은 빠르게 찾아왔다. 순무는 그의 포켓몬인 가디와 산책을 즐겼지만 나누는 시원한 방바닥에 들러붙기만 했다. 아직도 적응되지 않는 호연지방의 기온을 버티려고 했다. 차가운 몸을 가진 깜까미를 안고 있으면 금방 체온이 낮아지긴 했다. 물을 자주 마시고, 외출 시에도 되도록이면 그늘 쪽에서 걸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고 둘은 강연장으로 향하는 길에 자질구레한 대화를 하면서 주변 분위기를 살폈다. 드래곤타입은 본디 까다로워 선호되지 않는 타입이라 전문 트레이너가 적다. 때문에 이렇게 공식적으로 실력을 인정받아 높은 자리에 앉은 트레이너의 강의는 정말 드문 행운에 가까운 것이다. 둘의 또래로 보이는 젊은층도 많았지만 의외로 어린아이도 있었고 충분히 나이 먹음직한 어르신들도 강연장을 찾고 있었다.

나누는 구석진 자리에 엉덩이를 내리고 순무의 귀에 속삭였다. 처음에만 이렇지 나중에 가면 사람이 적을 것이란다. 그 말에 순무도 동의의 표시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런 사람들 중 하나가 되지 않으리라 결심한다.

공지된 시간보다 조금 이르게 강단에 선 권수는 준비해온 자료집을 정리하며 그것들을 살펴보았다. 얼마 전에 텔레비전 광고에서 본 것보다 더욱 호리호리하고 매서운 인상에 가깝다. 전문으로 쓰는 타입을 닮아가는 것이라고 생각될 만큼 종이를 보며 가늘게 뜨는 그의 눈빛은 예사롭지 않았다. 나누는 그렇게 생각했다.

준비를 끝내고 먼산을 바라보는 권수의 첫마디는 인삿말이었다. 그러자 사방팔방에서 안녕하세요, 라는 대답이 한데 뭉쳐나왔다. 권수는 이렇게 많은 분들이 오실 줄 몰랐다며 감사의 말부터 전했다. 그리고 협회의 권유에 의해 하게 된 데다 사천왕이 된 지도 얼마 되지 않아 부족하겠지만 잘 부탁드린다는 말을 끝으로 그는 박수 갈채 속에서 싱긋 웃었다. 이미 드래곤타입 트레이너를 꿈꾸고 있는 사람, 드래곤타입에 흥미만 있던 사람 등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준비해왔지만 이해되지 않거나 궁금한 점은 언제든지 물어봐달라고 덧붙였다. 나누는 첫인상과 달리 시원시원한 태도와 웃음에 예상보다 딱딱하고 엄격한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을 고쳐먹었다.

각자의 우려와 달리 권수가 하는 설명은 쉽게 머릿속에 들어왔다. 발음도 흐트러짐없이 정확하고 약간 떨리는 목소리도 낮지만 크게 울렸으며 말을 재밌게 하기도 했다. 나누는 재주있게 손가락으로 펜을 휙휙 돌리며 권수의 말을 경청했다. 괜히 젊은 나이에 사천왕이 된 게 아니라는 생각을 한다. 드래곤타입 전문 트레이너들에게는 권수의 등장이 굉장히 반가울 것이다.

정해진 시간이 지나고 강의가 끝나자 나누는 기지개를 켰고 순무는 곧바로 나누에게 재밌었다고 말하며 흥분했다. 강연장을 나서면서도 잘 선호되지 않는 드래곤타입에 대해 이렇게 기초부터 공부하게 되어서 기쁘다고 조잘댄다. 나누도 흥미있진 않지만 알아두면 나쁠 것이 없었기에 괜찮은 것 같다고 대답했다.

"악타입도 저렇게 멋진 강의 안 하려나."

장난스레 중얼거리면 순무는 웃었다.

"네가 하면 되지 않을까? 권수님처럼 '협회에서 하라길래 어쩔 수 없이 하게 됐습니다' 라고 하면서."

"진짜 그렇게 된다면 다 때려칠거야."

남들 앞에 나서길 싫어하는 나누는 과장스런 표정을 지어보이고는 순무를 따라 웃었다.

첫날부터 둘은 꼬박꼬박 성실하게 권수의 강의에 참석했다. 처음에는 구석진 자리에 앉았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 한 줄씩 앞으로 자리를 잡을 수 있게 되었다. 나누의 말대로 오는 사람들이 줄어들었기 때문이기도 했고 순무가 원해서 그렇게 한 것이기도 했다. 수강자가 줄어들어도 권수는 그에 대해서는 한 번도 언급하지 않으며 매시간마다 최선을 다했다. 점점 심화되어가는 강의 내용을 쉽게 풀어내기 위하여 수강자들에게 질문도 던지며 적극적으로 강의를 이끌었다.

어느날의 나누는 강의에 집중이 잘 되지 않았다. 빨리 순무네 집으로 돌아가서 찬 방바닥에 드러누워있고만 싶었다. 오늘 저녁에는 선선하다던데 순무랑 산책이라도 할까, 하며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나누는 문득 옆자리의 순무에게로 곁눈질을 했다. 그런데 순무가 권수를 바라보는 표정이 심상치 않은 것이 보였다. 어딘가 멍해보이는데다 나눠받은 자료들도 쳐다보지 않고 열심히 설명하는 권수만 보는 것이었다. 그 순간, 나누의 머릿속에는 자신이 호연에 오던 날이 스쳐지나갔다. 순무는 그 때 텔레비전 광고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아, 이 녀석 설마…?'

너무 넘겨짚는 것이라 생각한 나누는 자신의 직감을 부정했다. 직감이란 때로는 맞지만 때로는 맞지 않는 것이다.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한 나누는 머리를 긁고는 어서 빨리 시간이 지나길 바라며 억지로라도 강의 내용에 집중했다. 오늘은 드래곤타입이 어느타입에 약한 것인가 대한 연구들에 관한 내용이었다. 흥미롭긴 하지만 고대의 연구기록부터 훑고 있었기에 지루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마침내 권수가 손목시계를 보고 오늘 강의의 끝을 알린다. 이제 수강자는 첫날보다 절반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그 중에서 둘처럼 한 번도 빼먹지 않고 참석하는 사람은 극소수였다. 나누는 비어가는 강연장을 돌아보며 사천왕의 강의를 무료로 들을 수 있는 것은 희귀한 일인데 참 애석하게 느껴졌다.

뜨거운 햇빛을 맞으며 집으로 걸어가는 길에 순무가 갑자기 드래곤타입과 복수로 전공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라는 말을 꺼냈다. 그 말에 나누는 놀랐다. 나누네 집안과 달리 순무네 집안은 대대로 불꽃타입 포켓몬을 주력으로 삼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그 가문의 사람들은 불꽃타입에 빠삭했으며 현재 순무의 파트너도 가디였다.

"너네 집은 대대로 불꽃 타입만 썼잖아."

나누가 눈썹까지 찡그리고 의아해하자 순무는 당황해하며 둘 다 같이 하면 멋지잖아, 하고 얼버무렸다. 나누는 입을 닫고 자기가 생각하는 것이 맞을지도 모른다고 의심을 하기 시작했다.

종강이 가까워질수록 더더욱 줄어드는 수강자들 중 제일 수업을 열심히 듣는 것은 순무였다. 재미있게도 한 번 치른 모의 테스트에서 제일 점수가 좋은 것은 나누였다. 둘은 그렇게 권수의 눈에 띄게 되었다. 가끔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만나면 권수가 먼저 다가와 인사를 하기도 했다. 순무는 쑥스러워했지만 나누는 그저 시큰둥하게 인사할 뿐이었다.

어느날 조금 일찍 강연장에 도착하자 나누는 홀로 흡연실을 찾았다. 그런데 거기 있던 뜻밖의 선객에 나누는 멈칫했다. 들어온 사람이 누군지 알아본 권수는 나누에게 살갑게 인사했다.

"나누였던가?"

"맞아요."

나누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권수와 거리를 두고 담배를 입에 물었다. 라이터로 불을 켜고 연기를 들이마시며 이 분위기가 왜 이리도 껄끄러운지 분석하려 한다. 아마 부담감일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순무는 담배 안 피우니?"

"네? 네. 걔는 나이만 어른이지 하는 짓은 애라서요."

나누의 대답에 권수는 풉 웃고는 나누 너도 아직은 어린 편이지, 라고 말했다. 나누는 그 말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권수는 계속해서 나누를 귀찮게 했다.

"고향이 호연이야?"

"아뇨, 저는 성도에서 왔어요."

"어쩐 일로 거기서?"

"순무랑 저랑 어릴 때부터 친구거든요."

권수는 그렇구나, 라고 중얼거린 후 다 타들어간 담배를 껐다. 그것을 쓰레기통에 휙 던지고는 나중에 보자며 먼저 흡연실을 나갔다. 나누는 가는 몸선이지만 듬직해보이는 등을 바라보며 눈썹을 찌푸렸다. 순무가 권수에게 푹 빠진 것을 그동안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결국 인정해버리고나니 그가 미워진 것이다. 알 수 없는 질투심에 나누는 아직은 어린 편이지, 하고 자조적인 느낌을 담아서 중얼거렸다.

그 후, 나누는 이제 강의에 그다지 흥미가 없었으나 권수에게 빠진 순무를 지켜보기 위해서 부지런히 강의에 참석했다. 대체 저 콧수염 아저씨의 어디가 좋은 건지를 모르겠다. 그저 일개 존경심일 거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나는 왜 순무에게 신경을 쓰는 걸까. 왜 권수를 미워하는 걸까. 나누는 복잡한 마음의 해답을 찾기 위해서라도 순무의 곁에서 떨어질 수 없었다. 그럴수록 순무의 감정이 더욱 잘 보였다. 권수를 향한 헤실거리는 웃음, 애정이 충만한 눈빛, 다가가고 싶어 하지만 망설임이 가득한 몸짓. 모든것을 지켜보는 나누는 자신의 심정을 정확히 파악하기 전까지는 모른척 할 수밖에 없었다.

깨달음은 주어지지 않은 채 시간이 지났고 드디어 마지막 강의시간이 찾아왔다. 권수는 자기가 잘하지 못한 것 같다며 아쉬움을 토로했다. 혹시나 기회가 되면 다음엔 더 잘해보이겠다는 말을 끝으로, 강의가 완전히 끝나자 일제히 사람들이 강연장을 나간다. 나누는 순무의 부탁으로 천천히 돌아갈 준비를 했다. 순무가 권수에게 할 말이 있으니 잠깐만 기다려달라고 한 것이다. 몇없던 사람들이 거의 다 빠져나갔고 순무는 계단식으로 된 강연장의 좌석을 턱턱 내려갔다. 그리고는 교탁에서 자료를 정리하던 권수에게 어렵사리 말을 걸었다.

"저기, 권수님…."

"아, 순무구나. 항상 열심히 들어줘서 고마웠어. 그래, 무슨 일이니?"

자신을 칭찬한 말이 기뻤던 순무는 우물쭈물거리며 혹시 개인적으로도 공부를 가르쳐줄 수 있냐고 물었다. 끊임없는 고민 끝에 불꽃타입과 드래곤타입을 병행하겠다고 결심한 것이다. 그러나 권수는 아- 하고 마치 버릇인 것마냥 곤란한 표정으로 자신의 콧수염을 잡아당겼다.

"미안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보면 좋지 않아서…. 제자도 아닌데 편애하는 아이가 있으면 보는 눈들이 별로 곱지만은 않단다."

그도 그럴 것이 권수는 호연지방에서 공식적으로 임명된 사천왕의 일원이다. 공인이나 다름없기에 사적으로 제자를 둘 수 없었다. 공공기관에서 승인받은 자격을 갖춘 자만이 직제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을 알고 있던 순무는 어깨에서 힘을 빼고 알겠다고 대답했다. 그리고서 발길을 돌리려는데 권수가 잠깐만, 하고 그를 불러세웠다.

권수는 열심히 하려는 순무가 기특하게 생각된다며 따로 자신의 연락처를 적어주었다. 순무는 눈을 크게 뜨며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 때, 나누는 길어지는 둘의 대화소리가 잘 들리지 않아서 순무의 짐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서서 계단을 내려갔다.

"내년 봄에 리그 개최 전까진 아직 시간이 남으니까 연락해도 괜찮아."

"감사합니다…!"

"나누는 곧 성도로 돌아가겠구나?"

어느새 뒤에 서있던 나누는 대답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순무는 나누가 온 것을 이제서야 알고서 흠칫했다.

"너도 궁금한 게 있으면 언제든지 물어봐도 돼."

딱히 그럴 일은 없을 것 같지만 알겠다고 대답은 해둔다. 그리고는 잘 가라는 인사를 주고받으며 둘은 강연장을 나섰다.

돌아가는 길에 순무는 굉장히 기뻐하였다. 비록 매일같이 만나서 수련할 수 있는 직제자는 아닐지라도, 궁금한 게 있으면 언제든지 편하게 연락할 수 있었던 것이다. 나누는 응어리라도 생긴 것마냥 여전히 탐탁치 않은 기분이었다. 순무가 존경하는 권수에게서 가르침을 받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가슴 속 여기저기에는 찝찝함이 들러붙어 있었다.

강의가 완전히 끝난 후부터 순무는 권수와 친분을 쌓았다. 제멋대로 그를 선생님이라 부르며 궁금한 것에 대해 배우러 간다는 말을 남기고 사라지곤 했다. 때때로 나누는 홀로 남은 방 안에서 포켓몬들을 돌봐주며 순무의 의중을 헤아려보곤 했다. 텔레비전 광고에서 쉽게 눈을 돌리지 못하기도 했고 강의를 들을 때에는 교재보다 권수를 더 많이 쳐다본 것 같다. 아니, 추측이 아니라 확신에 가까웠다.

말도 안 되는 일이다. 나누는 순무의 정신을 차리게 만들고 싶어졌다. 권수가 싫지는 않지만 오랫동안 봐온 친구 순무가 그를 좋아한다는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은 것은 분명했다. 처음 품었던 의심은 질투가 되었고 이제는 독점을 꿈꾸고 있었다.

그렇게, 나누는 여태 해답을 찾을 수 없었던 자신의 심리 상태를 깨달았다. 순무를 지켜주고 싶었던 것이다. 만약 둘의 마음이 통한다 해도 권수는 순무에 비해 나이가 많았고 내년에는 업을 위해 이 도시를 떠나야했다. 순무가 다 감당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매일같이 권수를 그리워할 것이 눈에 선하다. 나누도 성도에 있으니 그를 곁에서 위로해줄 수도 없는 일이다.

우선은 좀 더 지켜보기로 하고 종종 순무가 권수를 만나러 간다 하면 나누는 또 데이트 하냐고 놀렸고 순무는 그런 게 아니라며 발끈했다. 이렇게 나누는 실없는 농담을 자주 던지면서 무의식적으로 순무에게서 경각심을 유도했다. 자신이 권수에 대한 순무의 애정을 인지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장치인 셈이다. 한편으로 그런 태도는 농담이 주는 효과로 인해 친근감을 나타내기도 했다. 권수에 대해 '그런 식'으로 입에 올릴 때마다 순무는 나누가 선생님을 가까운 존재로 생각하고 있다고 여기게 될 것이었다.

어느 비 내리는 날, 휴대기기로 순무에게서 연락을 받은 나누는 누워있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갑자기 비가 오리라고 생각하지 못한 채, 우산을 들고 나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리고는 미안한데 어디로 와달라고 주소를 알려주었다. 나누는 서둘러서 순무가 쓸 우산을 손에 들고서 밖으로 나갔다. 조금 전까지는 하늘이 조용했는데 지금은 어둡게 물들고 비가 퍼붓는 중이다.

"뭐야, 여긴…."

찰박이는 길을 더듬으며 찾아간 곳은 다름아닌 권수네 집이었다. 낡은 문패에 적힌 그 이름을 확인한 나누는 더욱 의미심장한 느낌을 안고서 초인종을 누르기까지 혼란스러웠다. 어째서 순무가 권수의 집에? 머뭇거리다가 초인종을 누르자 이윽고 권수가 우산도 쓰지 않은 채로 재빠르게 대문을 열어준다. 안녕하세요, 하고 무뚝뚝하게 인사하면 권수는 나누를 반갑게 맞이했다.

"순무 연락 받고 온 거지?"

"네. 바보같이 우산을 안 들고 나가서."

"하하, 너무 그러진 마. 갑자기 소나기가 오는 거니까."

연식이 있어보이는 주택을 감싸는 마당은 좁았고 현관까지 가는 길은 돌길이 깔려 있다. 물뿌리개, 낚싯대같은 가재도구나 잡동사니가 여기저기 자리를 잡고 있다. 구석에는 오래된 평상이 있었는데 거기에는 재떨이로 쓰는듯한 사기그릇 하나가 올려져있었다. 그릇에는 빗물이 넘쳐서 주르륵 흐르고 있다. 집 안으로 들어가면 내부는 목조로 되어 있었고 허브향 비슷하게 상쾌한 향이 났다. 나누는 우산꽂이에 우산 두개를 꽂아둔 뒤에 권수의 뒤를 따라가며 묻는다.

"순무는요?"

"으응, 지금 씻는 중이야."

그 대답에 나누는 눈썹을 찌푸렸다. 그것을 볼 수 없는 권수는 나누를 주방으로 데려갔다. 응접실로도 쓰는 모양인지 곧바로 찬장에서 세련된 디자인의 컵을 꺼내고 거기에 차를 타기 시작한다. 과자 먹을래? 라는 질문에 나누는 괜찮다고 사양했다.

나누는 순무를 기다리면서 나무열매향이 그윽한 따뜻한 차를 마시고 권수와 잡담을 나눴다. 나누의 장래에 대한 것들이나 성도 지방에 대한 이야기, 신입 사천왕이 겪는 고초 등 신변잡사에 가까운 내용들이다. 나누가 분석한 권수는 분명 좋은 사람이다. 하지만 순무가 좋아한다는 이유때문에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는다.

곧이어 순무가 나타났다. 덜 마른 머리 위에 수건을 올린 순무는 나누에게 미안하다고 사과해왔다. 나누가 어찌된 일인지를 물어보면 선생님이랑 마을 공터에서 포켓몬 배틀을 하는 도중 갑자기 비가 왔고, 그나마 공터랑 선생님네 집이 가까워서 온 것이라고 대답한다. 나누는 과연 이것이 거짓말일까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사실 둘이서 정분이라도 난 거라면?

불안과 분노를 동시에 느낀 나누는 폐가 된다면서 빨리 집으로 돌아가자고 재촉했다. 권수는 괜찮으니 소나기가 그칠 때까지 있어도 된다고 하였다. 순무는 정말요? 하고 좋아했지만 옆에서 자신을 노려보는 나누의 눈을 보고는 가보겠다고 말했다. 돌아갈 채비를 끝낸 둘은 권수에게 인사를 하고 집을 나섰다. 돌아가는 길에 나누는 한 번 떠보기로 한다.

"순무."

"왜?"

"너, 저런 늙다리랑 붙어먹는 거 너네 부모님이 아시면 어떻게 되겠어."

그 말에 순무는 눈을 크게 뜨고서 얼굴을 붉히며 무슨 말이냐고, 그런 게 아니라고 화를 냈다. 나누가 방금 본 광경은 누가 봐도 오해할 소지가 있다고 하면 순무는 눈을 내리깔고서 길을 걷는다. 순무는 작은 목소리로 자기가 권수를 좋아하는지 알고 있었던 거냐고 물었다. 나누는 한참동안 말을 않다가 결국 처음부터 다 말해주기로 했다. 텔레비전 광고에서 처음으로 권수를 보았을 때나 강의시간에 본 순무의 시선, 드래곤타입에 대한 지나친 흥미 등.

"…선생님은 나에게 아무 감정이 없으셔."

"어떻게 확신해?"

그렇게 물으면 나이 차이도 있고 성별도 성별인데다 적극적으로 다가가지 않아서 그런 것 아니겠냐고 대답했다. 나누는 손가락으로 턱을 쓸며 생각에 잠겼다. 권수를 올려다보는 순무의 수줍은 표정을 바로 옆에서 봤는데도 권수는 그런 순무를 단지 자신을 따르는 꼬마라고 생각하는 게 재밌어졌다.

"그 늙다리랑 어디까지 해봤냐?"

나누가 비웃으며 묻자 순무는 전혀 아무일도 없었다고 고개까지 저으며 발끈한다. 그리고는 장난 그만 치라며 토라진다. 나누는 사과하긴 했지만 속으론 군침을 삼키고 있었다. 자신이 순무에게 다가가기 시작한다면 순무가 당황하면서 좋아하지 않을 거라는 것도 짜릿하게 느껴진다. 권수가 순무의 마음을 알아채기 전에 먼저 순무의 모든 것을 제 손으로 거두고 싶다.

그의 가벼운 의심은 질투가 되었고 보호욕으로 변질되다가 마침내 소유욕을 불러일으켰다. 순무를 넘겨줄 수 없다. 그렇게 결심하자 붉은 눈동자에 힘이 들어간다.

자신이 권수를 좋아한다는 걸 알게 되었으니 순무는 나누에게 자주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권수와 함께 수련하고 공부하는 것에 대해 말하기보다는 권수의 행동거지에 대해 자주 이야기했다. 나누는 코웃음치며 그만 포기하라고까지 말했지만, 순무는 난생 처음인 짝사랑의 단맛과 쓴맛을 번갈아가며 맛보자 제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권수와 같이 있으면 행복했지만 공부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면 한숨을 자주 내쉬었다. 나누는 그런 순무가 속앓이하는 것을 잘 받아주었다.

순무나 나누 둘 다 별 진전이 없는 여름방학이 끝나기 전, 그동안 순무가 늘 권수에게 신세만 진 것 같다며 용돈으로 선물을 사기로 했다. 나누가 권수를 그리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 것을 알면서도 쭈뼛거리며 같이 가줄 것을 요청하자 나누는 흔쾌히 같이 따라가주기로 하였다. 순무가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기도 했고 뭘 살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둘은 대도시의 백화점까지 가서는 청회색에 하얀색 줄무늬가 새겨진 넥타이를 고르고 돌아왔다. 어린아이처럼 이것저것 다 멋지게 보인다며 설렘이 가득한 순무를 곁에서 본 나누는 이 남은 여름날에 결판 짓지 못하면 앞으로 질질 끌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성도로 돌아가기 전까지 권수에 대한 순무의 연정이 자신에게 향하도록 만들어야 했다.

잘 포장된 상자를 손에 든 채 걸어가는 순무는 권수가 마음에 들어할지 모르겠다는 말만 백번 넘게 중얼거렸을 것이다. 그에 따라 당연히 나누도 디자인과 색상이 무난하기에 괜찮을 거라고 백번 넘게 그를 안심시켰다. 권수네 집이 가까워질수록 도망가고 싶어하는 순무를 대신해서 초인종을 누르면 권수가 문을 열어주었다.

순무는 부끄러움에 다짜고짜 선물상자부터 내밀었고 권수는 깜짝 놀라며 이게 뭐냐고 물었다. 순무는 항상 감사해서요… 하고 쑥스럽게 대답했다. 권수는 그것을 받아들고 고맙다며 웃었다.

"모처럼 여기까지 왔으니 뭐라도 먹고 가."

"어…."

어른이 말씀하시기에 둘은 눈빛을 교환하다가 권수의 집 안으로 들어갔다. 주방에서 나누는 권수가 준비해준 간식을 먹는동안 권수와 순무를 번갈아보면서 관찰했다. 옆에 앉은 순무는 기쁜 걸 다 감추지 못한 채 얼굴에 질질 흘리고 있었고 맞은편에 앉은 권수도 따르는 아이가 자길 생각해서 선물을 준 것에 기뻐하고 있는 그런 표정이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던 도중 권수는 잠깐 담배 좀 피고 오겠다며 일어섰다. 나누도 그 뒤를 따라나섰다. 낡은 현관문의 삐걱이는 소리를 뒤로 한 채, 둘은 마당 구석에 놓인 평상에 나란히 앉고서 담배를 태웠다. 나누는 권수의 생각을 알고 싶어서 질문을 던진다.

"순무, 어때요?"

"으음? 영리하고 포켓몬을 다루는 솜씨도 괜찮아. 조금만 잘 다듬으면 훌륭한 트레이너가 될 것 같아."

권수는 오른손 검지와 중지 사이에 담배를 끼우고 미소를 지었다.

"선생님이 좋다던데요."

나누가 불쑥 내뱉은 말에 권수는 입을 벌렸다가 담배를 입에 물고 뒤통수를 벅벅 긁었다.

"그게… 어떤 의미인 거니?"

권수는 곤란한 듯이 눈썹을 살짝 찡그리고 물었다. 나누는 연기를 후우 내뱉었다.

"말 그대로요."

그 대답에 권수는 깜짝 놀랐다가도 그러기엔 너무 어리다고 말한다. 게다가 자기같은 아저씨 어디가 좋냐고 유쾌하게 웃어보인다. 나누의 눈에는 그것이 당황함을 감추려는 웃음으로 보였다.

"그렇죠…. 제 생각도 그래요. 존경심을 착각하는 게 아닐까 싶어요."

권수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슬쩍 곁눈질로 보면 그는 먼산을 보며 깊은 생각이 빠져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진 알 수 없지만 어쨌든 그가 순무에게 별다른 감정이 없는 건 확실하다.

그렇게 시간을 죽인 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나누는 권수와 나눈 대화 내용을 알려주었다. 놀란 순무는 마치 냉동빔이라도 맞은 것처럼 그 자리에 얼어붙어버린다. 뺨이 점점 발갛게 물들어가며 아랫입술을 덜덜 떤다.

"왜… 왜 말 한 거야?!"

"궁금했거든."

"그래도 네 마음대로 하면 어떡하냐."

순무는 화를 냈다가도 권수의 말을 곱씹어보고는 울적해하기 시작했다. 권수를 좋아하게 되고나서부터 순무의 감정 기복이 심해진 것만 같다. 나누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순무에게 바짝 다가가서 그를 내려다보았다.

"널 봐주지도 않는 그 사람한테 언제까지 목 매달고 있을거야. 정신차려."

순무는 코앞에 있는 나누의 붉은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나누는 그 상태로 말을 잇는다.

"네 옆에 내가 있잖아."

순무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리는 것을 본 나누는 곧장 거리를 두고 떨어졌다. 그리고는 몸을 휙 돌리고 먼저 걸어나갔다. 저도 모르게 낯간지러운 말을 내뱉은 것이 부끄러웠던 것이다. 이런 말을 하려고 한 게 아니었는데.

같은 시간, 나누의 말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던 권수는 아이들이 떠난 자리에 꼼짝도 하지 않고 앉아서 순무가 자신에게 보였던 표정이나 행동들을 곱씹어본다. 그저 수줍은 성격이겠거니, 어른을 상대하는 게 어렵겠거니 하고 치부했던 것이 실은 호감에서 비롯된 것이었을 줄이야. 좀 더 빨리 알아채지 못해서 미안하기도 했다. 생각을 마친 그는 한 손으로만 마른 세수를 하고는 복잡한 머릿속을 가리기 위해 담배를 꺼내들고 일어섰다.

예전과 같이 그 아이를 바라볼 수 있을까? 이제는 그 눈빛이 어떤 의미인지를 다 알았는데? 하지만 권수의 걱정을 알아차린듯 점차 순무에게서의 연락이 뜸해졌다. 순무는 잘 사는지, 나누는 성도로 잘 돌아갔는지 궁금했지만 권수가 섣불리 연락을 할 수는 없었다. 아마 곧 방학이 끝나니 바빠서 잊어버리고 있는 것이라 생각한다. 아니면 별다른 이유가 없을 것이다.

그 상태로 여름이 완전히 지나고 가을이 되고 겨울이 찾아와도 권수는 순무를 만나지 못했다. 그 날의 만남이 마지막이었음을 생각하면 조금 아쉽지만 순무도 나름대로 성장을 위해 바쁠 것이었다. 훗날 함께 마주보고 배틀을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기 위해서는 권수도 성장해야만 했다. 잊어버리기 위해 치열하게 살았다. 가끔은 밀려오는 파도처럼 순무의 수줍게 웃는 얼굴이 생각났으나 그와 동시에 빨갛지만 차가운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던 나누의 얼굴도 떠올랐다.

마음 속의 어중간한 감정들 속에서 겨울이 끝날 무렵, 슬슬 호연리그를 위해 봄이 오기 전에는 그랜드시티로 떠나야 했다. 이제는 더욱 볼 수 없을 테니 작별 인사나 하려고 꽤 오랜만에 순무에게 연락을 했다. 다행히 순무는 여전히 본가에 머물고 있었고, 때마침 나누도 겨울방학을 맞이하여 성도에서 와있었다. 가족끼리 온천여행을 왔다는 것이다. 나누도 데려와, 하고 셋이서 어느 카페에서 만나기로 했다.

약속한 날, 오랜만에 만난 권수는 말끔하게 차려입고 순무가 선물로 주었던 넥타이를 하고 있었다. 그것을 보며 멍한 표정을 지은 순무를 본 나누는 손으로 순무의 허벅지를 툭툭 쳤다. 따뜻한 차를 마시면서 여름 이후에 연락이 없었는데 별 일 없었는지를 묻자 순무는 미소를 띄우고 있기만 했다. 나누는 별 일 없었다고 대답한 후 선생님은 잘 지내셨어요? 하고 물었다.

"그럭저럭. 이제 리그 개최시기가 되어서 바쁠 거야."

순무는 권수에게 잘 다녀오세요, 하고 웃었다. 머뭇거리는 부끄럼 많은 미소가 아닌 밝고 가벼운 미소에 씁쓸해지는 기분이 든다. 권수는 농담삼아 순무 너 소질 있어보이는데 나 따라서 가지 않을래? 하고 물었다. 그러나 순무는 완고하게 거절한다. 머쓱해진 권수는 하하 웃다가 자길 쳐다보는 나누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은 것 같은 육감을 느꼈다. 마치 어둠 속에 숨어서 붉은 눈동자를 빛내는 무서운 포켓몬 같았다.

"선생님 오랫동안 못 볼 건데 외롭지 않겠어?"

"나누가 있어서 괜찮아요."

"그래 뭐, 나누라면 걱정 없겠다."

권수는 진담과 농담이 반씩 섞였지만 조금 노골적이었다며 자책한다. 이제 순무가 권수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지만 그랬다는 사실은 쉽게 잊혀지지 않는 것이다. 순무는 권수 덕분에 드래곤타입에 대해 잘 알았으니 나중에 도전할 때 만나자며 싱글싱글 웃었다. 권수는 좋아, 하고 씩 웃었다. 나누는 성도지방에 살고 있으니 석영고원이겠네? 하고 물으면 네, 라는 짧은 대답만 나온다.

계속 앉아있기엔 뭔가 껄끄러워진 권수는 볼 일이 있다는 핑계로 이만 가봐야겠다며 먼저 자리를 떴다. 둘의 몫까지 합쳐서 계산을 마친 후 카페를 나가도 속이 편하진 않았다. 그 상태로 근처의 흡연구역에 서서 담배를 태우다가 뒤늦게 나온 둘과 마주쳤다.

"먼저 가신 줄 알았는데."

"약속한 사람이랑 약속했던 시간보다 늦게 만날 것 같아서."

대충 둘러댄 권수는 유달리 사이가 좋아보이는 둘에게 좋아보이네, 하고 중얼거리고 아차했다. 무의식에 튀어나온 말인 것이다. 그 말을 들어버린 나누는 눈을 가늘게 뜨고서는 그렇죠? 라고 말했다. 아무말도 못하는 권수가 당황한 사이에 나누는 마지막으로 인사를 했고 순무도 웃는 얼굴로 손까지 흔들며 작별인사를 했다. 권수도 머쓱히 손을 들고 둘에게 인사를 해보였다.

권수가 자신의 꼴사나운 마음을 눈치챘을 즈음, 이미 모든 게 끝나있었고 앞으로 순무도 제 옆에 없을 거라는 게 마치 백만볼트라도 맞은 듯한 느낌이다. 그때서야 권수는 지난 여름 나누가 둘만 있을 때에 괜히 순무 이야기를 꺼냈었고 그것이 순무를 가로채겠다는 뜻이 다분히 내포된 접근이었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모든 것이 허탈하게만 느껴져 어이없는 웃음소리를 내며 킬킬거리다가 담배를 비벼끈 후 발길을 돌리고 제 갈길을 나아간다. 지독한 악 타입이 바로 옆에 있었다는 걸 뒤늦게 떠올린 자기자신이 정말로 어리석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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