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kmn] 글

사제

underneath by 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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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는 언제나 모든 것을 품어주리라 생각된다. 아무도 찾지 않은, 아침해조차 오지 않은 어슴푸레한 새벽빛에 잠긴 바다를 보며 아무리 좋아한다 말해도 바다는 모든 것을 품을 뿐이었다.

남들이 보기엔 건장하고 어엿한 청년인 권수는 새벽 일찍 페인트칠이 다 벗겨진 대문을 열고 나가 바다구경하는 것을 좋아한다는 꽤 감성적인 취미가 있었다. 그리고 보랏빛 바다에 대고 슬그머니 말해본다. 좋아해요. 잠깐동안 대답없는 고백만 내뱉고는 터덜터덜 돌아가는 것이었다.

바다를 낀 해안시티의 특성상 주민들은 성격들이 드셀 수밖에 없다. 사투리도 심하고 억센 사람들 속에서 살아온 권수도 마찬가지였으나 점차 성인이 되어가며 드센 성질을 죽였다. 그 원인은 어느 동네 주민에 의해 영향을 받은 탓이리라.

호연사람답지 않은 기품으로 언제나 선량하게 사람들에게 인사를 건네는 그는 모두가 선생님이라고 불렀다. 루네시티의 출판사에 근무 중이라는 것에 어울리게 선생님은 동그란 안경을 썼고 독서와 글짓기가 취미였다. 말투도 나긋하며 고상한 언어를 써서 해안시티의 주민들은 그와 대화할 때면 저도 모르게 얌전해지곤 했다.

선생님에게는 몇년 전 사별한 부인 사이에서 낳은 어린 아들이 하나 있었다. 아이의 이름은 순무였다. 순무는 겨우 네다섯살 때 글자를 어느정도 읽고 쓸 줄 알게 되어 동네에서는 역시 선생님의 아들이라며 좋은 이야기가 돌았다.

권수가 다니던 학교에서 임시교사로 재직했던 그를 기억한다. 아직 고등교육을 마치지 않은 철없던 때였다. 여느 아이들과 같이 야생포켓몬에 가까웠던 권수는 허름한 교실에서 유일하게 빛나는 그에게 첫눈에 반해버렸다. 단순한 동경심이라 생각했으나 그런 것이 아니었다.

선생님은 호연대학에 진학할 아이들을 위해 단기로 개설된 문학수업반에서 수업을 진행했다. 보통의 아이들과 같이 포켓몬 트레이너를 목표로 하던 권수는 잠깐이라면 괜찮지 않을까 싶어 그의 수업에 참석했다. 낮지만 부드럽게 구르는 목소리, 지적으로 보이게 하는 동그란 안경, 위로 뻗은 머리칼, 단정한 옷차림. 수업내용보다는 얼굴과 몸짓을 눈으로 좇았다.

선생님을 만나고부터 권수는 그의 눈에 들고 싶었다. 교무원이 아니기에 선생님은 보통 남자교사 휴게실에서 쉬거나 수업내용을 정리하거나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냈다. 권수는 그 앞을 지나갈 때마다 선생님이 안에 있을까 상상하며 두근대곤 했다.

어느날 몰래 살짝 문을 열어본 적도 있었다. 작은 탁자와 오래된 의자, 텔레비전, 선잠을 잘 수 있는 낡은 매트리스, 조그마한 크기의 냉장고, 누군가 여가로 즐기기 위해 놔둔 통기타 하나. 선생님은 없었다. 출근하지 않는 날인가 싶어서 실망을 안고 문을 닫았다.

선생님은 권수의 수업시간 태도가 좋았다. 문학적인 면은 딱히 두드러지지 않았지만 매번 열심히 경청하는 모습이 기특했다. 수업을 마치고 아이들이 나가는 길에 선생님은 권수를 불러세웠고 읽기 편한 고전문학책을 선물했다.

"항상 열심히 수업을 듣는 모습이 좋아서 주는 거야."

권수는 감사인사도 겨우 하고 도망치듯 교실을 나갔다. 선생님이 권수를 위해 직접 고른 책이라니. 권수는 책을 읽기가 너무 아까웠지만 천천히 한장한장 읽어보았다. 문학 쪽엔 크게 관심이 없어서 읽다가 꾸벅꾸벅 졸아버린 적도 많았으나 끝까지 읽기엔 성공했다. 선생님도 좋아하는 책이겠지? 어떤 마음으로 어떤 이유로 책을 골랐을까. 권수는 그런 상상을 하며 흐뭇한 미소가 나왔다.

그 후 자연스레 권수는 선생님과 점점 더 사이가 좋아졌다. 그러나 그럴수록 권수의 고민도 커져만 갔다. 선생님은 이미 교제 중인 상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아마 몇년 뒤면 결혼하지 않을까. 그래도 남교사 휴게실에서 선생님과 잡담을 나누는 순간은 좋았다. 어쩌다 문학에 관심을 가졌는지, 어렸을 때는 천방지축이었던 일화들, 인생에 관한 조언들. 권수는 그 모든 이야기를 흡수했다.

어느날 선생님은 권수가 자기처럼 학문을 닦는 길도 나쁘지 않다는 이야길 해왔다. 그러나 권수는 트레이너로서의 평판도 좋았고 본디 꿈꾸던 것이었기에 쉽게 꿈을 바꿀 수 없었다. 선생님은 문학도의 길을 가지 않는데도 어째서 문학 수업에 열심인지 궁금해했다. 차마 선생님에게 첫눈에 반해서 라고 대답할 수 없어서 그저 포켓몬 배틀 다음으로 흥미가 가는 것이라고 둘러댔다.

권수는 어영부영 일년동안 짝사랑만 하다 학교를 졸업하고 호연대학에 진학해 트레이너 육성 과정을 밟기로 했다. 선생님은 문무를 겸비한 훌륭한 트레이너가 되길 바란다며 권수를 격려해주었다. 졸업식날에도 선생님은 책을 선물해주었고, 마지막으로 작별을 고하는 손을 붙잡고 싶었으나 가까스로 참았다.

학교를 빠져나와 가족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냈지만 집에 돌아와서는 쓸쓸한 감정에 휩싸여 선생님이 졸업선물로 준 책을 읽지 못했다. 그 책을 다 읽으면 선생님과의 인연도 끝이라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대학에 진학해서도 선생님과는 전화로 연락을 주고받았다. 권수는 대학교의 도서관에서 선생님과 이야기하면 좋을 듯한 책들을 빌려 읽곤 했다. 대학 생활은 무난했다. 털털하고 장난기 많은 성격이라 언제나 주위엔 사람들이 붙어있었다. 그러다 점점 선생님과 연락하는 횟수가 줄어들었고 권수의 마음에 자리잡았던 선생님은 좋은 추억으로 녹아갔다.

그래도 선생님은 가끔 권수네 집으로 전화를 해서 안부를 묻곤 했다. 권수는 그것이 전혀 성가시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정애없는 순수한 존경심으로 선생님을 대했다.

그렇게 이년이 흘렀고 권수는 마침내 그 때를 맞이했다. 선생님이 결혼한다는 것이었다. 전화로 그 말을 들었을 때 권수는 충격으로 손이 벌벌 떨려왔다. 그동안 식어버린 줄 알았던, 삼년 가까이 진행 중이었던 짝사랑은 결국 이렇게 끝나게 되는 것이다.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 결혼식장에 가서도 권수는 축제 분위기 속에서 홀로 쓰디쓴 기분을 맛봤다. 선생님은 그런 권수의 속도 모르고 와주었냐며 환하게 맞이했다. 정장을 빼입고 삐죽이는 머리를 단정하게 빗어넘기고 여전히 동그란 안경을 쓴 선생님은 여전히 보기 좋았다. 억지로 웃어보인 후 집에 돌아와서는 잘 차려입은 옷을 그대로 입은 채 잠자리에 엎드려서 울었다.

그즈음해서 이전과 달리 정말로 선생님과의 연락도 차츰 줄어들었다. 선생님은 먼저 연락해오지 않았고 권수도 수업과 특훈에 치여 바쁜 나날을 보냈다. 문학책들은 책꽂이에서 먼지가 쌓여갔다. 선생님은 행복한 신혼생활을 즐기고 있겠지. 권수는 남은 질투심을 분노로 삭히며 자신의 길을 닦는 데에 쏟아부었다.

그로부터 거의 일년이 지날 때즈음, 아들이 태어났다는 연락을 받았을 때엔 마치 예전과 같은 느낌으로 선생님의 집을 방문했다. 가슴이 두근거리며 저절로 긴장되어서 권수는 심호흡을 여러번 해야했다.

오랜만에 보고 듣고 만나는 선생님은 여전히 단정하고 고상한 인상을 주며 권수를 맞이했다. 그 찬란한 미소를 보자 선생님에 대한 마음이 다시 부풀어오르는 것이 느껴져 자신이 너무나 멍청하게 생각되었지만, 머릿속은 온통 선생님을 다시 만났다는 행복으로 가득했다.

선생님의 부인은 선생님과 분위기가 비슷했다. 그동안 이야길 많이 들었다며 지어지는 따스한 미소는 선생님의 미소를 닮아있었다. 어쩜 만나도 저런 사람을 만났지, 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기방에서 곤히 자는 아기에 대해선 별 감흥이 없었다. 아기를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선생님같이 햇빛을 품은 사람도 밤에 잠자리를 가졌으니 아이가 태어났겠구나. 그런 망측한 상상을 하기까지 이르렀다. 선생님도 성적으로 흥분했을까? 늘 단정하고 부드러운 얼굴에서 안경이 벗겨지고 올곧은 눈빛은 흐려지고 가지런한 얼굴은 점점 벌겋게 달아오르고 따뜻한 미소만 짓던 입을 살짝 벌렸을 때는 이미 늦었다.

그 날 권수는 밤늦게 속옷 빨래를 하느라 늦게서야 잠이 들었다.

어김없이 선생님네 집에 놀러가면 선생님이 해안시티로 이사온다는 말을 꺼냈다. 임시교사로 계속 재직하기엔 불안정해서 루네시티의 출판사로 이직했다는 것이다. 아이를 키우기엔 자연과 가까운 해안시티가 낫겠다 싶어 그렇게 결정했다고 한다. 마음 속으로는 같은 도시에 오는 것이 너무나 기뻤지만 결코 드러내지 않았다.

일주일 후, 선생님은 권수가 살고 있는 동네로 이사를 왔다. 번화가도 있는데 굳이 바닷일하는 사람들이 많은 끄트머리로 온 것이 의아했지만 아기때문이라고 결론을 지었다.

그때부터 권수는 새벽에 슬그머니 일어나 바다를 향해 속삭이는 버릇이 생겼다. 선생님, 좋아해요. 바다는 대답없이 권수의 목소리를 가지고 가서 잔잔한 파도 속에 숨겼다. 엉덩이를 깔고 앉아 점점 해가 떠오르는 바다를 보고 있으면 안정이 되었다.

권수는 대학을 졸업한 뒤 취직을 준비 중이었고, 선생님의 아들이 쑥쑥 커갈 때였다. 어느날 집으로 전화온 선생님의 말에 권수는 입이 쩍 벌어졌다. 선생님의 부인되시는 분이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는 것이다. 사고가 난 것은 며칠 전이었고 어느정도 진정되자 이 안좋은 소식을 알리기 위해 전화해온 것이었다.

장례식장에 가면 울어서 눈가가 벌개진 선생님과 아무것도 모르고 권수를 향해 방끗 웃는 아들-순무가 있었다. 순무는 짧은 단어를 내뱉으며 선생님의 품에서 떨어져 권수의 무릎에 매달렸다. 권수는 무릎을 꿇고 순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씁쓸한 마음으로 고인에게 절을 올리면 선생님은 와줘서 고맙다며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본인의 결혼식장에서도 선생님은 같은 말을 하며 같은 미소를 지었었고 그걸 본 권수의 마음 속은 그 때 느낀 슬픔도 함께 자라났다.

사랑하는 이를 예고도 없이 떠나보낸 선생님은 그래도 순무를 보며 힘차게 살아갔다. 선생, 이것 갖고가서 애기 먹여, 선생님, 저희 집에서 팔고 남은 건데 드세요. 동네사람들은 단 둘뿐인 선생님네 가족을 챙겨주었다.

그즈음부터 권수는 여분의 집열쇠를 받고 선생님의 집에 가서 어린 순무를 보살폈다. 순무는 글자를 깨우치는 것이 빨랐다. 장난감을 들고 놀아주거나 동화책을 읽어주거나 포켓몬들과 산책을 하며 함께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 선생님이 퇴근하고 오면 가끔 셋이서 저녁을 먹고 집으로 돌아오는 것이 유일한 낙이었다.

선생님은 취업 준비하느라 바쁠 텐데도 순무를 돌봐줘서 고맙고 미안하다는 말을 자주 했다. 권수는 어차피 시간이 많이 남은데다 부모님 잔소리 안 들어서 괜찮다며 선생님의 짐을 덜어주는 것에서 보람을 느꼈다. 그것은 사실이기도 했다. 부모님은 오히려 선생님에게 드리라며 권수의 손에 주전부리를 들리곤 했던 것이다.

아이를 돌보는 것이 능숙해진 어느날, 선생님은 순무를 재운 뒤 권수에게 술을 권했다. 시장에서 사온 조리된 안주거리들과 술병 하나. 조촐하기 그지없는 밥상을 사이에 두고 마주앉은 두사람은 잔을 부딪쳤다. 친구들이 아닌 처음으로 가지는 웃어른과의 술자리에 조심스러워졌다. 선생님은 편히 마시라며 웃었다.

문득 권수는 재혼할 생각이 있냐고 물어보았다. 선생님은 아, 하더니 마른세수를 한 번 했다. 동그란 안경이 손가락에 의해 눈썹까지 올랐다가 내려왔다.

"재혼이라. 너도 알다시피 지금 먹고 살기에도 바빠서. 그리고…."

멋쩍게 웃고는 수염이 조금 자란 턱을 벅벅 긁는 모습에 권수는 그에 대한 연정이 피어올랐다. 수수하고 기품넘치며 언제나 단정한 선생님답게 사별한 부인 생각에 재혼은 하지 않는다는 대답이 어쩐지 기쁘게 다가왔다. 좋아해요. 머릿속으로만 고백해본다.

순무는 어느덧 무럭무럭 자라서 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입학식날 권수가 찍어준, 부자 단둘이서 찍은 사진은 거실에 잘 걸려있었고 아침마다 부지런히 밥을 챙겨먹이며 작은 전쟁을 치루는 모습은 어느 가정집과 다른 점이 없었다.

이 때 권수는 동쪽 끝에 자리한 그랜드시티에서 리그 스태프 일을 맡게 되었다. 챔피언 로드를 지나는 트레이너들과 맞붙으며 그들을 격려하는 것이 주된 일이었다. 선생님은 권수의 훌륭한 재능을 칭찬하며 원하는 일을 하게 되어서 축하한다고 말해왔다.

선생님이 있는 해안시티를 떠나는 것이 싫었으나 장래를 위해선 어쩔 수 없었다. 꽃이 만개한 이 곳에서 막 떨어진 싱싱한 꽃잎을 주운 뒤 가끔 선생님네로 엽서나 편지를 부치곤 했다. 그러면 선생님도 수려한 글씨체로 근황을 적어서 답장을 보내왔다. 이따금씩 순무가 쓴 삐뚤빼뚤한 글씨체도 실려있어서 그것을 보면 웃을 수밖에 없었다.

선생님은 언제나 올곧은 마음가짐을 중시했다. 그래서 권수는 승부를 하기 전 트레이너들에게 포켓몬과 승부하는 것에서 무엇이 중요한지를 묻곤 했다. 그에 대한 대답은 당연히 올곧은 마음가짐이었고 정답을 맞춘 이는 하나도 없었다.

찢어진 눈매와 호리호리한 체격때문에 보기엔 매서워보일지라도 실은 열정을 품은 트레이너의 소문은 입을 타고 순식간에 퍼져나갔다. 까다로운 드래곤타입 전문에, 외모와 다른 뜨거운 성품, 우수한 실력. 단기간에 권수는 엘리트 트레이너 칭호를 얻게 되었다.

나름 승진을 한 것이 기뻐서 당장 선생님에게도 이 소식을 알렸다. 그러나 그즈음부터 선생님에게서 늘 오던 편지와 엽서가 끊겼다. 일하랴 애 돌보랴 바쁘신 분이니 조금만 더 기다려보자. 내일은 오겠지.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으면 마음에서도 멀어지는 것처럼 권수도 선생님과 순무가 잘 살 것이라 믿으며 묵묵히 자신의 길을 나아갔다.

권수가 해안시티로 다시 돌아온 것은 어느정도 경력을 쌓고 호연리그까지 승승장구했을 때였다. 동료들과 어울리며 자취를 해오던 권수는 거의 십여년만에 그랜드시티에서 떠나 해안시티로 돌아왔다. 리그 협회로부터 사천왕 자리를 권유받아 부모님과 상의하기 위해서였다.

권수에게는 어릴 때부터 친하게 지내온 하기라는 친구가 있었는데, 그는 바닷일을 하는 사람이라 미래에 같이 배를 타고 바다를 누비길 희망해왔다. 그러나 권수가 뜻하지 않게 그랜드시티로 가는 바람에 줄곧 하기 혼자 바다를 떠돌다 돌아오곤 했다.

사천왕이 되면 정해진 날짜에 리그장에 가서 도전하는 트레이너들을 상대하면 되었기에 권수는 하기와 바다를 떠돌며 사천왕 업무를 겸업하는 것을 생각해두고 있었다. 그래서 그것에 대해 부모님과 상의 후 결정하여 협회에 전달하기로 한 것이다.

십여년만의 집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고 마당의 대문은 페인트칠을 새로 해둔 상태였다. 오십세가 넘은 부모님은 아직 정정해서 일을 나간 터라 집에는 없었다. 돌아오기 전에 전화로 여분열쇠가 어딨는지를 들었기에 마당 구석에 놓인 작은 꽃화분 하나를 들어올렸다. 거기엔 집 열쇠와 또다른 녹슨 열쇠가 있었다. 선생님네 집의 여분 열쇠였다.

그것은 집어든 권수는 뒤통수를 후려맞은 듯한 감각에 휩싸이며 고등학생 때부터의 추억이 삽시간에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환한 미소로 수업을 진행하던 선생님, 마음에 들지 모르겠다고 쑥스러워하며 책을 내밀던 선생님, 결혼식, 선생님의 부인, 장례식, 순무, 재혼은 하지 않겠다던 선생님.

여분 열쇠를 손에 든 권수는 빠른 걸음으로 기억 속에 남아있던 선생님의 집으로 향했다. 아직 살고 계실까? 작은 집의 초인종을 눌러보길 망설이다 겨우 눌러보았다. 살짝만 눌러도 초인종 소리는 컸다. 이윽고 발소리가 들리며 문이 열렸고 처음보는 사내아이가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누구세요?"

권수는 흠칫했다. 소년이 너무나도 선생님을 빼닮았기 때문이다. 두자릿수가 될 때까지 잊고 있던 존재를 다시 마주하자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소년은 눈썹을 찡그리며 다시 누구냐고 물었고 정신을 차린 권수는 아차 했다. 선생님의 이름을 대며 옛날 제자라고 소개한 뒤, 선생님을 뵐 수 있는지 물었다. 그러자 소년은 눈을 내리깔았다가 치켜뜨고는 일단 들어오라며 대문을 활짝 열어주었다.

기억 속에 잠들어있던 선생님의 집 풍경은 여전했다. 세월감이 느껴지는 주택에 한걸음씩 내딛을 때마다 옛날 일들이 피어오르며 권수의 가슴을 간질였다. 선생님은 여전히 단정하고 세련되고 지적인 자태일 것이다.

현관으로 들어가며 실례합니다, 하고 외쳐보았다. 그런데 이상하다. 현관에는 방금 안으로 들어간 소년-순무의 신발밖에 없었다. 권수는 뭔가 좋지 않은 느낌을 받으며 조심스레 집 안으로 들어갔다.

안방이자 거실이자 응접실인 유일한 큰 방으로 들어간 권수는 숨을 들이키며 얼어붙었다. 선생님과 술을 마시며 재혼 이야기를 꺼냈던 그 방에는 두개의 액자가 걸려있었던 것이다. 오래 전 사고로 세상을 떠나버린 선생님의 부인 그리고 선생님의 사진.

권수는 순무를 돌아보았다. 순무는 눈썹을 찡그리며 권수를 올려다보았다. 저절로 손이 나아갔고 권수는 작디 작은 순무를 껴안았다. 순무는 놀랐다가도 권수의 어깨에 얼굴을 묻어주었다.

순무는 작은 목소리로 마실 걸 가져오겠다며 방 밖으로 사라졌고 권수는 방바닥에 털썩 앉아서 고개를 들고 사진을 쳐다보았다. 액자 속에서 영생을 사는 댓가가 목숨이라니 너무나 아이러니하다. 아직도 믿을 수 없어서 허벅지를 꼬집어보지만 그래도 선생님이 없다는 현실을 받아들이기가 힘들다.

이야기를 듣자하니 선생님에게는 아무도 모르는 비밀이 있었다고 한다. 선생님이 어릴 때부터 앓고 있던 지병은 선생님이 일을 하며 받은 스트레스와 피로를 먹이로 삼고 커져갔다. 선생님은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며 몇년을 보내다가 끝내 세상을 떠났다.

그때문에 권수가 보내는 편지나 엽서에 답장을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순무는 그때를 잊어버렸겠지만 그랬을 것이라 추측한다. 권수는 한숨을 내쉬었다. 학생일 때부터 전혀 그런 기미가 보이지 않아 몰랐다. 아무도 몰랐다고 하니 철저히 지병에 대해 숨겨왔을 것이다.

그 후부터 어떻게 지냈냐고 물어보니 다른 지방에 사는 친척들이 집에 머무르며 동네사람들과 함께 자신을 돌봐주었다고 한다. 선생님은 가진 것이라곤 책들이 전부이기에 당장 재산인 이 집은 처분할 수 없었고, 지금은 어느정도 앞가림을 하게 된 순무 혼자 지내고 있다고 대답해온다.

혹시나 싶어 권수를 기억하냐 물어보지만 순무는 고개를 저으며 사과했다. 십여년 전 그것도 어린 유아일 때의 기억이 선명할 리가 없었다. 권수는 선생님과의 추억을 되짚으며 순무가 몰랐던 선생님의 젊은 시절에 대해 알려주었다. 해가 질 때까지 선생님과 부인 그리고 순무의 아기 시절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이만 가보겠다고 일어섰다. 다음에 또 오겠다 하고 나가려는 순간, 순무가 권수를 불렀다.

"꼭 다시 와주실 거죠?"

권수는 노을빛을 받으며 촉촉히 젖어드는 순무의 눈빛을 보고는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순무는 자주 와달라며 손을 흔들었다.

그 후, 권수는 사천왕 자리를 거절하고 하기와 바닷일을 하는 것을 선택했다. 그랜드시티에 머무르면 순무를 돌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비록 바다를 항해하다보면 길게는 몇달이 걸릴 수도 있었지만 그랜드시티에 얽매이는 것보단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순무에게 꿈이 무어냐 물어보면 포켓몬 트레이너가 되고 싶다고 대답했다. 권수와 하기가 순무에게 제 포켓몬들을 보여주며 놀아준 것이 큰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한다.

완전히는 아니지만 어느정도 어린 티를 벗어가는 순무는 둘을 따라잡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다. 학교를 마치면 도서관에 가서 포켓몬에 대해 공부를 했고 방학에는 해안시티를 떠나 포켓몬을 잡으러 돌아다녔다. 권수와 하기가 바다에서 돌아왔을 때, 이미 순무의 곁에는 가디가 한 마리 있었다.

얌전했던 부모님과 달리 순무는 뜨거운 아이였다. 열정이 가득했고 가끔은 제 나이답게 저돌적이고 무식했다. 권수는 순무를 예뻐하며 훌륭한 트레이너가 되도록 지도해주었다.

그래서인지 순무는 권수를 선생님이라고 불렀다. 선생님이라, 참으로 그리운 호칭이다. 가끔 먼 지방에서 찾아오는 순무의 친척들은 그런 권수에게 늘 고맙다는 말을 아끼지 않았고 권수는 자기가 좋아서 하는 일인데다 순무에게 재능이 있다며 순무를 치켜세웠다.

언제나 권수와 하기는 바다를 누비다 해안시티로 돌아왔고 순무는 도감을 채우고 뱃지를 따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그렇게 몇년이 흐르고 순무에게도 권수처럼 호연대학의 트레이너 육성 과정을 밟는 게 어떻겠냐고 추천했으나 순무는 그것을 거절했다. 야생에서 직접 몸으로 부딪치고 싶다는 것이다. 서서히 눈가에 잡혀가는 주름을 지으며 권수는 피식 웃었다. 참으로 순무다웠기 때문이다.

그런 순무는 성인이 되면서 선생님의 얼굴을 닮아갔다. 가끔 선생님의 얼굴이 겹쳐보이면 권수는 가슴 속 어딘가가 아려오곤 했다. 그 옛날 새벽부터 바다로 나가 대답없는 고백을 하던 때를 닮은 아픔이었다.

그럴 때마다 권수는 상념을 잊기 위해 따뜻한 우유에 설탕을 가득 타마셨다. 단맛은 기분을 좋게 만들어준다. 한 번은 하기가 단 우유맛을 보더니 애입맛이라며 놀려대곤 했다.

순무는 뱃지를 모두 따고 호연리그에 도전하기 위해 그랜드시티로 떠났다. 좁은 해안시티에서 순무의 소문은 빠르게 퍼져나갔다. 해안시티에서도 챔피언이 나오는 것 아니냐며 모두들 호들갑을 떨었다.

권수는 함께 그랜드시티로 향했다. 오랜만에 오는 이곳은 여전히 형형색색의 꽃들이 만발한 아름다운 곳이었다. 땅에 떨어진 꽃잎을 주워든 권수는 선생님네 집으로 편지나 엽서를 보내던 것이 떠올랐다. 이제는 가슴 속이 아파오지 않았다. 그만큼 성장한 것이다. 그리고는 순무의 늠름한 뒷모습을 보며 참 신세 많이 졌다는 생각을 한다.

순무는 아쉽게도 탈락해버렸다. 과거에 우수한 엘리트 트레이너였다가 젊은 나이에 사천왕 자리까지 추천된 권수의 제자라는 꼬리표는 순무를 괴롭혔으나, 그것이 현실이었다.

해안시티로 돌아온 순무는 그 꼬리표를 잘라내기 위해 죽도록 노력했다. 아침 일찍 일어나 해변가를 달리며 제몸부터 단련했고 포켓몬들의 기술을 효과적으로 사용하기 위해 책을 보며 실전에도 적용했다. 권수는 안타깝긴 했으나 탈락을 계기로 순무가 더욱 위로 향할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을 놓지 않았다.

긍정적인 믿음은 권수를 배반하지 않았다. 일년 후에 다시 리그에 도전한 순무는 저멀리 서방의 가라르에 스카웃된 것이다. 처음엔 믿기지 않았다. 일년 전과 똑같이 탈락하긴 했지만 이제는 그 솜씨가 훌륭했던 것인지, 가라르의 관계자가 순무를 데려가고 싶다고 연락해왔다. 보호자이자 후견인 자격으로 그들을 만난 권수는 속으로 뛸 듯이 기뻐했으나 애써 표정을 감췄다.

순무에게 이 소식을 알리면 순무는 펄쩍 뛰며 권수를 꽉 안았다. 비록 또다시 결승 문턱까지는 갈 수 없었지만 다른사람들이 순무의 재능을 알아본 것이다. 그동안 너무 쉼없이 달리기만 한 순무를 위해 호연을 떠나기 전에 좋은 추억을 만들어주고 싶었다. 다른 곳으로 놀러가볼지, 아님 원하는 선물을 사줄지 고민해본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바다에 있던 하기에게서 급한 연락이 왔다. 불법 어선이 황금마을의 수역을 침범해 물고기포켓몬들을 무자비하게 포획해갔다는 것이다. 권수는 순무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빨리 일을 처리하고 해안시티로 돌아올 테니 그동안 푹 쉬고 있으라고 권했다. 마지막으로 본 순무의 얼굴엔 아쉬움이 어려있었으나 권수는 그것을 일부러 못 본 척을 했다. 그 얼굴을 보면 떠나기 어려웠다.

영해권 침범과 수역의 무단 침입, 불법 포획 등 복잡한 문제가 꼬여서 권수와 하기는 아주 오랜시간을 황금마을에서 보냈다. 간간이 전화를 하다가도 어느 순간부터 바빠진 탓에 순무네 집으로 전화를 하지 않았다.

어느정도 일이 마무리되고 해안시티로 돌아온 권수는 발이 육지에 닿자마자 순무네 집으로 향했다. 너무 일에 신경쓰다보니 순무의 출국일이 언제인지 잊어버린 것이다. 서둘러서 그 작은 집으로 갔을 때는 이미 늦은 상태였다. 대문은 굳게 닫혀있었고 아무리 초인종을 눌러도 순무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당황한 권수는 담을 넘어갈 생각까지 하며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는데, 문득 무언가가 눈에 들어왔다. 순무네 집 우편함에 편지가 한 통 들어있었다. 권수는 본능적으로 그것을 꺼냈고, 육감은 틀리지 않았다. 선생님의 아들답게 또박또박 가지런한 글씨, 못 알아볼 리가 없는 글씨로 순무는 권수에게 편지를 남겼다.

내일은 드디어 떠나는 날이에요. 아무리 기다려도 전화도 없고 두분 다 돌아오실 기미가 안 보여서 집 우편함에 편지를 놔두고 갈게요. 이 편지를 발견했을 때면 저는 이미 없을 거에요.

지금도 많이 걱정돼요. 기대보다는 불안이 더 커요. 그래도 그동안 응원해주신 분들이 있어서 포기하고 싶지는 않아요.

무엇보다 선생님께 제일 감사하고 싶어요. 저는 기억이 잘 안 나지만 어릴 때부터 봐주셨고, 계속 지켜봐주셔서 지금의 제가 있다고 생각해요.

선생님이 언제나 올곧은 마음가짐을 강조하신 게 큰 도움이 된 것 같아요. 조금이라도 포기하고 싶고 하기 싫다는 생각을 했다면 과연 제가 이 자리에 서있을 수 있었을까요?

호연에서도 못했는데 가라르에 가서는 얼마나 더 잘 하겠어 하고 걱정이 되곤 했는데 선생님의 말씀을 떠올리면 다 괜찮아질 거라는 느낌이 들었어요. 감사합니다!

가라르에 가서도 보고 싶을 거에요. 열심히 해서 호연의 자랑이자 선생님의 자랑이 될게요.

나중에 다시 편지보낼게요. 선생님네 집 주소를 몰라서 일단 저희집으로 보내볼게요. 맨날 와서 확인해주셔야 해요….

하기 아저씨에게도 안부 전해주세요!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벌써 다들 보고 싶네요.

권수는 짧은 편지 내용을 읽고 또 읽다가 선채로 펑펑 울어버렸다. 순무를 더 챙기지 못한 미안함과 후회가 덮쳐왔던 것이다. 이른 나이에 홀로서기를 시작한 순무는 고향을 떠날 때에도 흐트러짐없이 강인했다. 마치 오랫동안 앓던 지병을 숨겨온 선생님을 닮은 강인함이었다.

권수는 그런 순무에 비해 질질 짜는 자신이 바보같이 느껴져 울기를 멈추고, 편지를 접어 소중하게 손에 들었다. 오히려 권수가 순무에게서 용기라는 가르침을 받아버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꼭 다시 만나기를. 그 때는 둘 다 한걸음 더 성장해있기를.

순무도 없으니 딱히 바닷일에 매달리지 않아도 될 것 같아서 권수는 혹시 사천왕 자리에 은퇴자가 나오면 제일 먼저 연락을 해달라고 말해두었다. 그리고 매일 오후가 되면 산책을 겸해서 순무네 집을 기웃거렸다. 아무리 기다려도 편지는 오지 않는다. 그래도 하루도 거르지 않고 순무네 집의 우편함을 확인했다.

한달이 지나자 마침내 편지가 도착한 것을 발견했다. 고향의 글씨만큼 가지런한 글씨로 가라르어가 적혀있다. 편지는 우선 불평으로 시작했다. 도착하면 시차에 시달렸던 것, 음식이 입에 맞지 않은 것, 말이 통하지 않아 통역가가 없으면 아무것도 못하는 것, 처음 겪어보는 문화 차이. 어린아이같은 투정이 귀여워서 웃음이 삐져나와버린다.

그 뒤에는 합숙훈련, 가라르의 리그 시스템, 친해진 아이들, 도시에서 본 것, 먹은 것 등에 대한 감상이 적혀있었다. 마지막에는 이 주소로 편지를 보내달라는 말로 끝맺고 있다.

권수는 집으로 가자마자 펜을 들었다. 그리고 해안시티를 떠났을 때부터의 기억을 되살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얼마나 네가 그리운지, 거기서도 잘 하리라 믿을 것이라는 말들로 빈 종이를 가득 채운다.

편지를 주고 받다보면 만날 기회도 오는 법이다. 순무는 편지와 함께 자신의 데뷔전 티켓을 보내왔다. 국제전화를 걸어보면 제일 잘 보이는 특별석이니 후회하지 않을 거라며 자신만만해했다. 이제는 어린 티가 하나도 나지 않는 목소리에 어쩐지 보람을 느꼈다.

가라르에서의 재회는 매스컴을 탔고 순무에게 있어 권수라는 사람이 어떤 존재인지를 알리게 되었다. 현지에서 인기몰이 중인 호연출신 순무 선수는 권수에 대해 인터뷰를 받을 때마다 늘 같은 대답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저에게 올곧은 마음가짐을 물려주신 선생님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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