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alatea 02
재호상일
-그는 사실 현실과 이상의 괴리에 대해서 아주 오래 전부터 깨달은 상태였다.
카페의 명의는 분명 내 이름으로 되어있었지만 건강이 좋지 않아 개업 직후 몇 번 얼굴을 비춘 것 외에는 요양 명목으로 지방에서 몸을 추스리고 있었다. 그래서 재석이에게 카페 일을 전적으로 맡겼었는데, 이번에 녀석이 갑작스럽게 뺑소니 사고를 당하게 되면서 며칠간 카페의 문을 닫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자 믿을만한 동생에게 급히 도움을 요청했다. 내가 급히 서울로 올라오지 않도록 배려한 것 같지만 결국 연락이 닿으면서 순순히 그간의 이야기를 털어놓았고, 일주일 뒤에야 카페에 발을 들일 수 있었다.
동그래진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내가 누구냐고 물은 청년에게 가벼운 소개를 했다. 나와는 일면식이 전혀 없었으니 손님인 줄 착각하고 물어본 것도 당연했지만 조금 부끄러운 소개다 싶어 몃쩍게 머리를 긁적였다. 카운터까지 걸어오고 나서야 그늘에 반쯤 가려진 사람의 얼굴이 확실히 보였는데, 쟁반을 들고 있는 사람의 얼굴마저도 반갑게 느껴져 입을 열었다.
"재호 씨 아니세요?"
"예...예?"
"유상일입니다. 오랜만이에요. 저 기억하고 계시죠?"
"...저, 저희..만난 적이 있나요?"
..보지 못 했던 시간이 길어 내 얼굴을 까먹었나?
잠시 고개를 갸우뚱하다가 그럴 수 있겠거니 하고 잠시 카페 안을 둘러보다가 한 점에 시선이 절로 머물렀다. 오래 전 선물받아 내부 인테리어가 최종적으로 마무리 된 때부터 벽에 걸었던 초상화였다. 시간의 흐름이 조금 눈에 띄긴 했지만 자연스럽게 봐줄 수 있는 정도였다. 그것을 손짓하며 말했다.
"저 그림, 재호 씨가 그려주셨잖아요."
"....예?"
정말 모르겠다는 듯 놀란 얼굴로 되묻던 재호 씨는 들고 있던 쟁반을 떨어뜨렸고, 그 위에 얹어져 있던 것들이 바닥을 굴렀다. 동시에 접시는 쨍깡 하는 소리를 내며 두 쪽이 났다. 뭔가 이상한 기분이 들었지만 일단 엉망이 된 바닥을 수습하기로 했다. 카운터를 보던 청년에게 쓰레기통과 닦을 것을 부탁하고 접시 조각을 집기 위해 손을 놀리다가 재호 씨가 몸을 덜덜 떠는 것 같아서 올려다보니 주먹을 꽉 쥔채 나를 내려다 보는 -혹은 발끝을 내려다 보는- 얼굴은 아주 새파랗게 질려있었다.
"재호 씨, 괜찮아요? 안 다치셨어요?"
그렇게 물으며 손을 뻗는 순간, 재호 씨는 내 손에 닿지 않으려는 듯 쏜살같이 카페를 박차고 나갔다.
***
-저 그림, 재호 씨가 그려주셨잖아요.
잊고 있었던 것이, 잊자고 생각한 것이 모조리 산산조각나 부서지며 전보다 더 선명하게 빛났다. 어쩌면 외면하고 싶었던 건지도 모른다.
그러나 처음부터 끝까지 내가 자초한 것이었다. 노트북도, 가방도, 어느 하나 챙기지 못 한 채 도망치듯 카페를 나와 마구잡이로 길을 달렸다.
모든 것이 기억났다.
몇 개월 전의 일을 떠올렸다.
***
집 근처에서 유독 가게가 잦게 바뀌는 목이 있었다. 자리로는 나쁘지 않았는데도 과일 가게, 아이스크림 가게, 약국, 휴대폰 판매점 등 온갖 가게들이 스쳤다가 폐업해 사라지는 것이 일상인 그런 곳이었다. 어느 날 임대 문의라는 종이가 떨어지고, 그 앞에서 어물쩍거리는 남자의 뒷모습을 수상히 여겨 불러세웠었다.
"거, 수상해 보이는데 누구십니까?"
뒤돌아본 남자는 훤칠한, 아니 눈이 번쩍 뜨인다는 말로도 부족한 미남이었다. 하필 가로등 아래에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남자는 자신이 의심을 받았다는 것에 아랑곳 않고 웃었다. 그 웃는 모습에 나는 가슴이 쿵쿵거리며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그렇게 보였나요? 음, 이 건물을 임대하려는 사람입니다. 제가 직접 계약한 건 아니지만 터가 어떤지 제 눈으로 보고 싶어서요."
"저, 의심해서 죄송합니다."
"괜찮습니다. 수상해 보일수도 있죠."
그 두근거림 때문에 입이 근질거렸다. 이상한 말일 것을 안다. 내가 생각해도 이상한 말이었다. 거절당하는 것에 그치지 않을지도 모른다. 불쾌함을 내비칠지 모른다. 그러나 고개를 숙여 정중히 사과를 한 뒤 나는 여과 없이 입을 열었다.
"정말 뜬금없고 황당한 말이겠지만...죄송합니다. 당신의 초상화를 그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나는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였다.
남자의 얼굴이 그 순간 어떤 표정이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내 이상한 부탁에 그는 웃으며 덧붙였다.
"저는 당신이 아니라, 유상일 입니다."
***
내 처지를 좋게 말하면 프리랜서. 나쁘게 말하면 백수다. 나는 그림을 그리는 것을 직업으로 삼고 있다. 실력은 변변찮지만 먹고 살 수는 있는 정도였다. 그러나 요즘 들어 말하기도 과분한 슬럼프를 겪는 것인지 연필이건 붓이건 끈기 있게 잡고 무언가를 그러내겠다는 생각에 도달치 못 하고 있었다. 어느 것도 그려내지 못 하면서 맛본 지독한 무기력감과, 더불어 낮아진 자존감, 절망감, 재능에 대한 회의.
그런데, 그 남자를 본 순간 그런 것들이 하찮은 것처럼 느껴졌다. 연필을 잡고 싶어졌다. 사진보다도 내 손으로, 내 그림으로 저 남자의 지금을 그려내고 싶었다. 남자의 완벽한 외모를 내 식대로 재구성 하고 싶어한 묘한 욕심이었고, 그 완벽함에 도전하고 싶은 승부욕 비슷한 것이기도 했으며, 다시 품지 못 할 오만함도 섞여있었다.
나는 집까지 남자, 유상일 씨를 불러들였다.
아틀리에 같은 사치를 부릴 수는 없고, 거실에 불을 켜고 의자에 앉게 했다. 나 또한 필요한 것들을 모조리 챙기고 의자를 하나 끌어와 앉았다.
"..용케 순순히 따라와 주셨네요."
"서재호 씨, 라고 하셨지요? 그림을 그리시는 분이라고 소개하셨잖습니까."
"아니면 어떡하시려고..?"
"글쎄요, 그렇게 물으시는 게 이상하지만 만약 그랬다면 때려눕히지 않았을까요?"
그 농담을 끝으로 입을 다물고 전체적으로 덩어리를 잡았다. 유상일 씨는 얼굴뿐만 아니라 몸도 꽤 좋은 편이었다. -같은 남자로서 질투가 날만큼 사기적으로- 그러나 나는 단호하게 얼굴에 집중했다. 어둑한 조명 아래에서조차 불모지 같은 의욕을, 열망을 심어준 사람이었다. 그보다 밝은 인공적인 백색 불빛 아래서 그 열망은 불꽃처럼 타오르기 시작하더니 연필을 쥔 손끝으로 모조리 쏠려있었다.
수많은 종이를 찢고, 수많은 종이를 구겨버리고, 수많은 연필을 부러뜨려 먹었다.
유상일 씨는 그 격렬한 행동에도 -흡사 미친 짓으로 오인 받기 쉬운- 이상할 정도의 호의로 아주 참을성 있게 앉아있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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