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퀘글
주황건오
김주황이 허건오를 데려다가 제 집에서 먹이고 재우게 된 건 이제 어언 한 달 여가 되었다. 박근태의 비호 아닌 비호에서 벗어나게 되자 당장 먹고 살 길이 막막해졌다는 게 이유였는데, 대장 나리네 얹혀살까? 라는 되도 않는 농담을 (허건오는 진심 반 농담 반이라고 했지만 하태성도, 김주황도 질겁했다.) 던졌기 때문에 김주황이 눈물을 머금고 자신을 희생하는 수밖에 없었다. 당연하지만 방세랍시고 일부의 돈을 받는 형태였다.
"야, 애송이. 허건오 씨. 아침 굶고 싶지 않으면 째깍 일어나."
"아우으..무슨 고릴라가...주말 아침인데도 이렇게 부지런해."
"평범한 사회인 기상 시간대거든. 네 녀석은 언제쯤 일어나는 거야?"
"..내키는대로."
"아르바이트건 취직이건 해서 정착하고 싶으면 째깍 수면 패턴을 고치는 게 좋을 거다."
"아, 알았다니까."
기상하느라 다 죽어가는 듯 소리를 내며 기지개를 편 허건오가 자리에서 겨우 일어났다. 짤막하지도, 그렇다고 어깨에 닿을 만큼 길지도 않은 어중간한 황색 머리카락들이 이리저리 뻗친 꼴이 가지런하지 않은 고슴도치의 모양새를 닮아있었다. 허건오의 지독하게 느긋한 기상 덕분에 아침마다 화장실은 늘상 김주황이 먼저 차지하곤 했다. 김주황은 화장실의 불을 켜고 면도 크림을 꼼꼼하게 바른 뒤 면도기를 쥐고 조심스럽게 면도하기 시작했다. 막 치약 묻힌 칫솔을 입에 문 허건오는 그 모습을 보다가 물었다.
"매일 같이 면도 열심히 하는데, 그래봤자 티도 안 나는데 참 열심이야."
"면도 꼼꼼이 안 하면 안 그래도 안 좋은 인상이 산적 두목 같아질 거 아냐."
"뭐야, 바깥에서 산적 두목같다는 얘기라도 들었었어?"
"말이 그렇다는 거지. 내 기분이 그렇단 얘기다. 그보다 넌 매일 안 하는 거 같은데 아주 말끔한 편이네."
"나야 뭐 고릴라 안 볼 때 열심히 하거든. 턱수염이 그렇게 하루 자면 반짝 나는 타입이 아니라서."
"잘났네요."
김주황은 면도를 끝낸 뒤 얼굴을 다시 한 번 말끔하게 헹구고 수건으로 얼굴을 톡톡 두드렸다. 머리를 빡빡 밀고 험상궂은 표정을 지어보여서 그렇지, 의외로 멀끔하게 생겼다. 괜시리 화장실 천장에 걸린 불빛에 김주황의 얼굴이 반짝반짝거리는 것 같이 보여 -물기 때문이었다- 허건오는 붕붕 고개를 젓고는 김주황을 스쳐 화장실 안으로 쏙 들어갔다.
'잘생겼다고 생각했냐? 아니 그리고 고릴라 얼굴이 반짝반짝해서 뭐? 쌈 싸먹냐?'
그렇게 생각하며 이를 벅벅 닦는 허건오를 본 김주황은 그러다가 이빨에서 피 난다. 하고 덧붙였다.
허건오의 속을 몰랐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말이었다.
***
허건오를 단기 아르바이트 위주로 이것저것 일을 맡아서 하다가, 원활한 구직을 위해 하태성의 도움을 받아 검정고시를 준비하곤 했다.
말이야 방세 주면 될 거 아냐! 라고 하긴 했지만 허건오가 제 입에 풀칠하기 바빴기 때문에 한 입에서 둘로 늘어난 부담은 온전히 김주황이 져야 했다.
네가 내 형이라도 되는 줄 알아?!
그런 생각을 해 보지 않은 것도 아니었지만, 자신에게 살아있는 형의 존재가 역린인 것처럼, 김주황에게도 죽은 동생의 일이 역린일 것이라 생각한 허건오는 같이 지내게 되면서 그런 식의 생떼같은 화를 벌컥 내지 않으려 노력했다. 배려해 주는 사람에게 배려로 답하지 못할지언정 제멋대로 밀고 나가는 것은 아무리 그래도 염치없는 짓이었으니까.
"고릴라."
"엉."
"나 좋아하냐?"
"그럼 싫어하는 놈 데려다가 내 집에서 재우고 먹이게?"
"내가 물어보는 거 그런 거 아닌 거 알잖아."
"그럼 너는? 내가 잘 대해주는 게 좋은 거야, 좋은 놈이니 잘 대해주는 게 더 좋은 거야?"
"내가 물어봤잖아."
"네 답이 곧 내 답일 수도 있단 생각에 그렇게 말해본 거였어. 다르다고 생각한다면.."
벽에 기대서 책을 읽던 김주황이 고개를 들었다. 허건오는 재빨리 벌어지려는 입을 제 손바닥으로 턱 막았다.
면도한 턱이 매끈하게 닿는 것이 나쁘지 않았다. 김주황이 흘끗, 보자 괜히 째려보기 당하는 것 같아 슬그머니 손을 거둬들였다.
"어이구, 우리 귀여운 애송이. 얼굴에 이 엉님 좋아한다고 써 있네요."
"웩, 그런 얼굴 안 했거든!"
"방세를 받긴 했지만 네가 돈 벌었으니 나가 산다고 하면 극구 말릴 거였어."
갑자기 뜬금없는 소리다.
허건오는 엥? 하고 고개를 갸우뚱하면서도 김주황의 말을 중간에 자르진 않았다.
"그러니까, 내 잔소리나 듣는 아침, 네가 가끔 맛있는 거 사 들고 와서 나눠먹는 저녁, 하태성 형씨한테 가끔씩 잔소리 듣는 날들을 앞으로도 쭉 함께했으면 좋겠다고."
이거 고백 아냐?
허건오는 괜히 얼굴이 벌개져서 고개를 돌렸지만 바로 옆에 앉은 김주황이 팔꿈치로 옆구리를 쿡쿡 찌르면서 대답을 재촉했다.
"아, 조, 좋다고!"
"안 들리는데."
"좋다니까!"
"GUNOC 건을 떠올려서 더 놀려줄까 하다가 참았다. 대답 됐지?"
"고단수 고릴라 같으니..."
허건오는 괜히 기분이 이상해서 머리를 벅벅 긁다가 리모컨으로 텔레비전의 전원을 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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