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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소한 유상일 이야기

"야, 먹어먹어! 식을라! 어여 먹어!"

"..넌..내가 교도소에서 쫄쫄이 굶었을 거라고 생각하냐?"

"나 참, 뭐래? 너 그렇게 먹다간 근육 다 빠져서 허우대만 크고 비실비실거리게 될까봐 그렇지! 직업인의 말을 믿어."

직업인이라는 말에 걸맞게, 최재석은 태권도장의 관장직을 맡고 있었다. 경찰을 그만두고 새로운 길을 찾아내 작은 성공을 이룬 유상일의 친구는 10여 년 전과 달라진 점이 거의 없었다. 달라진 게 있다면 유상일 자신처럼 나이를 먹고 수염을 좀 길렀다는 것 정도. 사람을 유쾌하게 북돋으려 노력하고, 자신을 배려해주고 또 생각해 주고, 자신이 한 말 -언제고 도움을 요청하면 반드시 돕겠다는- 을 지킬 줄 아는 좋은 사람. 좋은 친구였다. 유상일 자신과는 다른.

유상일은 출소 직후 최재석의 연락처를 알아내 처음 만났을 때까지도 겉핥기 식의 대화를 주고받다가 금전적인 도움만 받으려고 했었다. 하지만 최재석은 지금처럼 식사부터 하자며 자리를 만든 뒤, 박근태에게서 노림받을 건 안 봐도 뻔하다며 될 수 있는대로 함께 행동하겠다고, 한번 도움 청할 거 제대로 도움 받으라며 유상일을 설득했다. 아무 것도 모르는 순진한 친구의 순진한 호의가 유상일을 가시덤불더미처럼 찔러들어왔지만, 그런 것은 유상일의 계획에 비하면 아주 사소한 것이라 못 이기는 척 받아들이기로 했다. 이 여정에 하나뿐인 친구를 끝까지 동행케 할 생각은 물론 없었다.

"도장은 어떡하고."

"같이 사는 사범 애가 한 명 있는데..내가 없어도 당분간은 아이들을 잘 가르쳐 줄 수 있을 거야. 나 하나 잠깐 없다고 수강이 안 될 만큼 무르게 가르치지 않았어."

"여전히 스스로를 과소평가하는구나."

"무슨 일이래냐, 나 칭찬하는 거지?"

유상일은 살짝 웃어보였지만 곧 무표정햐졌다.

최재석은 지금 이상으로 선을 넘지 않으려 노력했다. 변하지 않은 자신이, 제 태도가 유상일에게 비참함으로 다가갈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더라도. 자기 분수를 아는 것, 일정 선을 넘지 않을 것. 아이러니하게도 유상일과 최재석에게 이런 것들을 알려준 건 진저리나게 싫은 선진화파 시절 그 자체였다.

"그래, 오늘은 어디 갈 거야?"

"아침밥 먹고 생각하자."

최재석은 웃으며 그래, 하고는 숟가락을 바삐 움직였다.

***

출소한 유상일이 제일 먼저 한 것은, 권현석의 묘와 유아연이 있는 납골당에 찾아가는 것이었다. 최재석은 권현석의 장례식에 참석한 적 있었으나, 경찰에 복귀하여 유상일의 동료들과는 접촉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유아연의 장례가 몇 지인들의 도움으로 이뤄져 안치되었다는 사실을 그제서야 알았다. 그 다음으로는 몇몇 곳을 오갔고, 최재석은 운전기사 노릇을 톡톡히 했다. 서로 말은 하지 않았지만 이동하는 중간중간 박근태가 쫓고 있다는 사실을 확연하게 되새길 수 있었다. 유상일은 밥을 다 먹고 수저를 내려놓으며 짧게 말했다.

"오늘은 쉬자."

"엉?"

"피곤하기도 하고, 앞으로 시간을 많을 테니 너무 촉박하게 생각할 건 없잖아."

"그렇..지. 그래, 그렇지. 잘 생각했어. 바깥 공기도 좀 쐬고 얼마나 좋아."

최재석은 서울을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 사람들이 많이들 관광 삼아 다니는, 적당히 한산한 장소들을 골랐다.

유상일은 체포되기 전 시절처럼 바뀐 게 없는 장소도 보았고, 몰라보게 바뀐 장소도 보았다.

-정은창이야. 이미 알고 있는 것 같지만.

-아..사탕이냐. 애도 아니고...

그 중에는 옛 친구와 처음으로 면식을 나눴던 장소도 있었다.

어쩐지 그때로 돌아가서 모든 것을 바꾸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무슨 생각하냐?"

"옛날 생각. 지금 지나가는 여기서..정은창 녀석이랑 처음 인사했거든."

"...오랜만에 듣는 이름이네."

정은창.

선진화파 소속이었지만 경찰과의 거래로 정보원이 되어 잠입요원인 자신들처럼 목숨을 걸고 선진화파의 정보를 유출시키던 친구였다. 최재석은 경찰로 복귀를 마다하는 과정에서 정은창을 만나본 적 없었지만 그가 권현석을 죽였을 것이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유상일은 권현석이 직접 관리하던 정보원이라는 점과 자신의 복수를 뜯어말리던 모습을 떠올리며 최재석의 생각에 작게 동의했다.

"재석아."

"응."

"오늘 한 번 서울을 쭉 둘러보는 건 어때?"

"괜찮지. 어디 가고 싶은데 있냐?"

"어. 아주 많이."

"싸게 모시겠습니다, 손님."

최재석은 노래를 작게 틀며 으쓱였고, 유상일은 오늘 하루쯤 부서지지 않은 옛 기억에 몸을 잠시 맡겨보기로 했다.

***

먹는 것은 크게 상관없었으나 보고 듣고 찾아가는 것은 유상일 내부에서 완전히 죽어버린 감수성에 물 한 방울쯤 되는 자극이었다.

최재석은 앞으로도 또 놀러올 일 있을 거라고 호기롭게 말했지만, 그럴 일은 앞으로도 없을 예정이었다.

유상일은 오늘 하루를 전환점으로 삼았다. 오늘이 지나면 점차 최재석을 떼어놓고 행동할 생각이었다.

최재석은 유상일이 자신을 불사르지 않도록 당분간 친구로서 곁을 지키며 노력할 생각이었다. 어떤 불안감이 예지처럼 최재석에게 의심을 불러일으켰지만 그런 친구가 아니라고 속으로만 도리질할 뿐이었다. 그러나 이미 사건은 벌어진 뒤였다.

"자냐?"

"......."

"..상일아. 나중에 조용해지면.."

유상일은 못 들은 척, 자는 척하며 최재석의 목소리를 외면했지만 어디 갈 수도 없는 작은 쪽방에 나란히 누워있어 쉽지 않았다.

그러기엔 너무나 곧은 목소리였다.

"우리 도장에 들러서 너도 몸 좀 풀고 가는 거다. 알았지?"

"......."

"잘 자라."

아.

유상일은 소리 없이 탄식하며 그 날 밤 잠을 이루지 못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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