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730

7주년 기념글

꿈을 한번도 꾸지 않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하루에도 몇 개의 꿈을 연달아 꾸는 사람도 있기 마련이다.

***

"..준혁 씨의 수술이 성공했다니, 정말 다행이구나. 양시."

"나 참, 선생님..보다 관장님 몸 걱정이나 하세요. 몇 개월 동안 침대 신세 진득하게 져야 할 분이 누굴 걱정하고 있는 거예요?"

"하하, 윽....크, 본 성격이 이래서 어쩔 수 없겠는데."

사과를 깎다 말고 한숨이 나왔다.

복합골절에 머리까지 다쳐서 죽은 줄로만 알았던 관장님은 정말 다행스럽게도 신속히 출동한 구급차 안에서 응급처치를 받았고 열 시간도 넘는 대수술을 마친 끝에 지금 이렇게 이야기 할 정도가 되었다. 수술비며 당장의 생계가 걱정되었으나 관장님이 기똥차게 들어놓은 보험금에 누군가 관장님 통장에 거액을 송금한 것으로 돈 문제는 한시름을 덜 수 있었다. 관장님은 이름도 모르는 사람의 돈을 덜컥 받을 수는 없다고 -요즘 남 모를 돈을 넣어놓고 사기를 치는 수법도 있다고 하니 더더욱- 했으나 통장에 찍힌 이름 석 자를 보고는 깜짝 놀라했다. 허허허, 허허, 웃더니 눈물을 아주 조금 글썽이기도 했다. 아는 사람이냐고 물어보았지만 관장님은 되도록 빨리 몸을 추스르는데 힘쓰겠다는 말만 하고 그 이상의 말은 아꼈다.

"..준혁 씨한테도 찾아가 봐야지. 양시. 어느 정도 몸을 추스르면 오랜 시간 못 볼 거 아니냐."

"......면회를 받아주려나 모르겠네요."

..준혁 선생님은 총상이 아슬아슬하게 빗나간 대신 몸을 장악한 암세포로 인해 그대로 쓰러져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낮은 확률이기는 했지만, 살아도 긴 시간을 복역해야 했겠지만 그 모든 것을 알고서도, 되돌릴 수 없이 늦은 것을 알면서도 위험한 수술을 감행한 건 선생님의 의지였다. 죽지 말고 살아서 용서를 빌라고 말했지만, 여전히 선생님에 대한 감정은 복잡했다.

"준혁 씨의 모든 걸 옹호할 수는 없지만..그 사람도 자기 자식을 위해서 무슨 일이든 가리지 않은 거지?"

"..네."

관장님의 얼굴에는 미움의 기색이 없었다. 나는, 내가 당한 일이 아닌데도 그러기가 참 힘들었다. 하지만 그것은 그것이고 간병은 간병.

사과 껍질을 다 깎은 뒤 먹기 좋게 썰었다. 이쑤시개를 푹 찍어 관장님께 내밀었는데 관장님은 사과는 됐다며 힘겹게 고개를 젓고는 목을 가다듬었다.

"양시, 할말이..있어. 오래된 이야기지만 잘 들어줘라."

사과 접시를 옆에 있는 탁자에 올려두고 고개를 끄덕였다.

***

순찰 도중 목격자의 증언을 얻게 되어 양해를 구한 뒤 골목길을 빠르게 주파했다.

반쯤 열려있는 철문을 열고 들어갔다. 오래토록 닫혀있었던 모양인지 텁텁한 공기가 훅 파고들었지만 당장은 그런 걸 신경 쓸 새가 없었다. 불조차 희미한 안쪽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놓칠까 얼른 외쳤다.

"정재 아저씨!!"

뚝.

인기척이 움직임을 멈추는 게 몸으로 느껴졌다.

"하....하아...흡...맞죠? 정재 아저씨!"

"......"

"..대답해 주세요!"

"그래. 오랜만이구나. 병원에 입원했다는 소식까지는 들었는데."

"여태까지 어디 계셨던 거예요. 출근도 안 하고..걱정했잖아요!"

"날 걱정해? 혜연아. 똑바로 말해야지. 날 걱정한 게 아니라 '잠입요원' 이었던 과거를 속이고 뒤에서 무슨 일을 꾸몄는지도 모르는 용의자가 사라진 걸 걱정한 게 아니고?"

정재 아저씨는 답지 않게 매몰찬 말을 했다. 희미한 불빛 속에서 아저씨의 형체만 그럭저럭 보일 뿐이었다. 곧잘 보았던 세운 머리도, 때때로 형형히 빛나던 눈동자도 보이지 않았다. 더듬지 않고 또박또박 말하려고 수없이 노력했다.

"..아저씨가 그런 일들을 감춘 이유가 있을 거예요. 그 점들을 물어보고 싶기도 했지만, 이제껏 함께한 아저씨를 걱정하는 제 마음도 거짓이 아니라고요!"

찰칵, 칙. 라이터 불꽃이 타올랐다가 꺼지더니 곧 허공에 붉은 담뱃불이 작게 떠올랐다.

정재 아저씨는, 내 앞에서 담배를 피운 적 없었다. 숨을 깊게 내쉬는 소리가 이어졌다.

"꿀리는 게 있는 놈들은 도망을 가지. 널 보기 힘든 것과는 별개로 꿀리는 일이 많거든. 그러니, 날 붙잡지 마라. 어차피 너 혼자서는 날 붙잡을 수 없으니까 괜히 씨름하지 말자는 소리다."

"아저씨."

"....왜."

"..제가, 지난 사건을 겪으면서 깨달은 게 하나 있어요. 그게 뭐냐면..."

자박.

한 걸음 다가가는 소리가 천둥처럼 났다. 그와 동시에 뒷쪽에서 문이 벌컥 열리는 소리가 났다.

정재 아저씨의 기색이 사납게 변해가는 것이 몸으로 째릿하게 느껴졌다.

"들어가기 전 미리 지원을 요청하자는 거예요. 같이 가 주세요, 정재 아저씨."

정재 아저씨는 한방 먹었다는 듯 혀를 찼다.

***

"살아있어줘서 고마워."

"...죽은 사람들이 듣습니다. 그런 말 마세요."

"죽다 살아난 사람이 위로차 하는 얘기니 적당히 흘려들어주길 바라는 수밖에. 그래도 산 목숨 죽으라고 할 순 없잖아."

재호 씨는 그 죽다 살아나게 한 원인 제공자에게 넉살 좋게도 말을 붙였다.

...좋은 사람이었다.

"언젠가 수정이를 볼 수 있을 때까지 끈질기게 살아남으라고."

"아니오. 만약 몸이 그때까지 버텨준대도..살인자인 아버지 같은 건 만나지 않는 게 나을 겁니다."

"사건은 이미 터졌고, 그 아이는 아버지로 알았던 사람도 잃었어. 친부인 자네마저 아이를 버릴 셈인가?"

"......"

"하지만 서로에게 시간이 필요하다는 점엔 동의해. 수정이 그 아이도, 준혁이 자네도."

"...재호 씨는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입니까?"

간병인 침대에 털썩 앉은 재호 씨가 수첩과 볼펜을 꺼내 이것저것 썼다.

"감방 선배 오미정이도 틈틈이 보러 갈 거고, 보호소에 간 설희에게도 다같이 찾아가 봐야 하고, 시백이랑 혜연이랑도 팀을 짜서 백석 그룹에 대해 알아볼 생각이지. 이번 일을 겪고 보니 혼자서만 움직이는 건 효율이 영 떨어지더라고. 여러모로 동지나 다름없는 사람들이 모였으니 기회를 적극 활용해 볼 생각이야."

"재호 씨 답군요. 한가할 틈이 없겠습니다."

"아, 궁금한 건 못 참는, 원래부터 기자가 되었을 사람이어서 말이야."

10여 년 전의 말투가 튀어나오자 저도 모르게 얕은 웃음이 튀어나왔다.

재호 씨는 잠시 눈을 내리깔더니 말을 이었다.

"..언젠가 양시백이가 찾아오거든, 지금처럼 얘기를 나눌 수 있게 노력해 보라고."

"시백 씨 쪽에서 절 만나려 하지 않을 겁니다. 저도..죄송하다는 말밖에, 용서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밖에 할 수 있는 말이 없고요."

"살아남았으니 그런 건 감수해야지. 양시백이에게 원망 받지 않을 거라고, 나쁜 소릴 듣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 거야?"

"그건 아닙니다만..."

"그게 아니면 됐어. 천만다행으로 최재석 관장이 살아났으니 죽도록 미움받고, 숨 막히게 멱살 잡히고 뺨을 맞더라도 용서를 빌 수 있는 기회가 완전히 사라진 게 아니라고. 그런 기회가 간신히 남겨져 있는데 자네 혼자 두렵다고 모른 척 할 생각이야?"

"...노력..해보겠습니다."

"자주 찾아올게. 쉬라고."

"감사합니다."

"친구 잘 둔 줄 알아."

재호 씨는 인사를 남기고 병실을 나갔다. 좋은 사람이었다. 자신과는 뼛속부터 다른 좋은 사람.

그런 사람들이 주위에 아직까지 남아있는데도 나는 저 혼자 생각하고 결론지어 멋대로 엇나가 파국을 빚었다. 거기에 최재석 관장님과 시백 씨에 대한 죄책감은 둘째 치고, 죽은 세 사람에 대한 죄책감은 여전히 희미했다. 수정이의 비밀을 폭로하고 흑색선전으로 이용하려 했던 사람들이니까. 우발적이었으나 결코 후회는 없었다. 흑백논리나 다름없는 사고를 가진 채 이대로 살아가도 정말 괜찮은 걸까. 배준혁이라는 사람은 겉은 멀쩡해 보이지만 속은 늘 이런 생각들로 가득했다.

하지만 살아남은 이상, 언젠가 모든 것을 목도하려면 결론을 내야만 했다.

자신의 의지에 반하는 결론이더라도. 부디 그런 날이 오기를, 용서를 비는 날이 오기만을 바랐다.

***

"...주황 씨. 건오 씨."

짧은 시간밖에 되지 않았지만 그토록 박근태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고 싶어했던 두 사람이었다.

그런데 정작 살아남은 것은 나뿐이었다. 어머니까지도...

"...죄송합니다. 제가...제가 박근태의 제안을 거절했더라면, 그랬더라면..."

어머니도, 두 사람도 잃지 않았을지 모르는데.

자기 자신을 향한 원망과 혐오감, 박근태를 향했던 증오와 살의. 그 모든 것이 하나가 되어 백석을 향하고 있었다. 내가 범한 과오도 그리 정당한 것은 아니었으나, 앞으로도 나와 같은 사람들을 여럿 만들어낼 가능성이 높은 그들이 천년만년 승승장구하며 살아가는 꼴을 보고만 있을 수도 없었다. 제깟 놈들이 뭐라고 여러 사람의 인생을 쥐고 흔들다 소모품처럼 취급하고 방해되면 죽이고 타인에게 뒤집어 씌우는가. 제깟 놈들이 뭐라고.

"..내 분노를, 복수심을 정당화 하려는 걸지도 몰라요. 하지만..멈추지 않을 겁니다."

'하태성!'

'하태성 경위님!'

"하지만...그런 저라도 아직, 아직 바라봐 주는 사람이 있어요. 엇나가지 말라고 말려주는 사람이 있어요. 그런 사람들이 있는 한, 아직은..아직은 하태성 경위로 남아있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언젠가는 두 사람에게 의존하지 않고도 지금의 마음을 지켜나갈 수 있는 날이 오기만을 바라고 또 바랐다. 울컥 올라오는 것을 도로 삼킨 채 잠기는 목소리를 애써 평소처럼 내려고 애를 썼다. 세 사람이 들을 수 있는 목소리가, 볼 수 있는 얼굴이 웃는 얼굴이기를.

"다음에는, 좀 더 좋은 모습 보여드릴게요. 약속할게요."

불어오는 바람이 모처럼 부드러웠다.

가야할 길은 가시밭길이었지만 각오만은 단단하게 잡혀있었다.

이야기를 털어놓고 길을 걸어 내려오니 현오 씨가 담벽에 기대어 서 있었다.

"오래 기다리셨죠."

"아뇨. 별로."

"건오 씨한테 같이 인사 드렸으면 좋았을 텐데요."

"건오는 저보단 어머니를 보고 싶어할 거예요. 통화는 자주 했지만 제게는 큰 관심이 없었거든요."

"동생 분을 잘 모르시군요."

"..그런가요."

"일이 끝나면 다 얘기해 드리겠습니다. 길진 않을 거고요."

"당신, 웃고 있네요."

"..만난 계기가 썩 유쾌한 일은 아니지만..건오 씨와 주황 씨를 알게 된 걸 후회하진 않을 것 같거든요. 당장은 그런 사실이 제 힘이 되어 주고 있어요."

현오 씨는 의아한 눈빛으로 나를 물끄러미 보다가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언젠가 모든 일이 끝났을 때 현오 씨 앞에서 웃고, 울고, 자조하고, 분노하며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는 날이 오기를. 죽지 않고 살아남은 삶이 작은 소망들을 가슴속에 쌓아올렸다. 그러니까 아직은 괜찮았다.

***

꿈을 한번도 꾸지 않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하루에도 몇 개의 꿈을 연달아 꾸는 사람도 있기 마련이다.

모든 것이 백일몽일지 모르나, 깨지 않는 꿈이라면 현실과 흡사하리라.

긴 꿈을 꾸는 자는 오늘도 눈을 뜨지 않은 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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