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퀘글

"웬일이냐, 영화를 다 보자고 하고."

"극장엔 가기 싫고, 영화는 보고 싶고, 혼자 보기엔 비도 겁나게 오는데 기분 추적해질 거 같아가지고 불렀다. 어때, 좋지?"

"좋긴 개뿔이 좋아."

"새끼가 형님이 영화 보여줘, 밥도 줘, 술도 주는데 말뽄새가..어휴, 됐다. 영화나 보자, 영화나."

"뭔 영화인데?"

"보면 알아."

남자는 형사, 주정재의 심보를 도통 이해하기 힘들었다.

이제는 어딜 가도 경찰입네 할 수 있어서 선진화파에서 잠입요원으로 조직원 짬밥 쌓아가던 때와는 다른 게 당연하겠지만, 박근태에게 거둬지면서 또 다시 반쪽짜리 신세가 되었다. 앞에선 사회정의 운운해도 뒤에선 그 사회정의를 일그러뜨리며 암약하는 축에 속해있는 것이다. 죽을 생각도 없으면서 곱게는 못 죽을 거라고 말은 잘도 하는 주정재가 가끔씩 핀트가 나간 것처럼 -다른 사람이었다면 평범한 일상을 보내는 거라고 납득했을 것이다- 구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주정재의 업보는 주정재 스스로가 선택한 결과였다. 남자의 모든 것이 그렇듯이.

영화는 다행히 피 튀기는 내용은 아니었다. 생각해 보면 늘 그랬다. 주정재가 액션물을 주로 보기는 했지만 납치극이라거나, 인질극 등을 다루거나, 칼로 찌르고 피가 튀는 것은 꺼렸다. 주로 보는 건 코미디 영화거나, 귀신이 나오는 공포 영화였다. 좋아한다고 본인의 입으로 종종 이야기하긴 했지만 남자는 그 취향이 어디에서 기인했는지 금세 알 수 있었다. 원래부터 영화에는 큰 관심이 없었던 남자는 담배를 피우며 대강 대강 보았다. 영화 내용은 모든 사람을 속일 수 있는 사람이, 단 한 사람만은 속이지 못해 심적인 나락으로 떨어졌다가 그 사람에게만큼은 속임수 없는 자신을 드러내 보인다는 뻔하디 뻔한 내용이었다. 그 뻔한 이야기가 인생의 한 부분이었던 적이 있었다...

"야."

"왜."

"영화 안 보지?"

"애초에 난 영화 안 좋아한다고 말했다."

"좋아하는 게 뭔데?"

"..뭐?"

"돈에 눈이 뒤집히는 것도 아니고, 여자 만나는 건 보지도 못했고, 이짓거리 하고 사는 거 보니 칼질 한두번 해본 것도 아닌데 네가 뭘 좋아하는지 모르겠다."

"좋아하는 걸 남겨둘 정도로 원만한 삶이 아니어서 모르겠다."

"그래?"

주정재는 리모콘을 들어 TV를 껐다.

영화는 거의 끝나가고 있었지만 아직 결말이 남아있었다. 남자는 이 다음부터가 조금 성가셔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랑 하는 건 좋아하잖아?"

"좋더라도...그것 때문에 사는 건 아니야."

"그래. 그렇지. 나도 그래. 널 죽도록 사랑하지는 않아."

조금은 사랑한다는 말인가?

의문이었지만 남자는 그에 대해 묻고 싶지 않았다. 알고 싶지도 않았다.

하지만 주정재가 담배를 비벼끄고 입을 맞춰오는 것은 거부하지 않았다.

아직은 때가 아니었으므로 적당히 장단을 맞춰주기로 했다.

***

"너, 친구 없지?"

"지랄. 너는?"

"친구로 생각했기는 한 모양이지?"

"그래. 악연이지."

악연.

리트머스.

접선.

생일.

각별했다.

비.

피.

총.

사망.

권현석.

종종 주정재가 던지는 말에 남자는 자신이 그 곁에서 보아온 것과 누군가였던 시절의 기억이 플래시백처럼 터져나오는 것을 느꼈다.

그런 심란함을 되도록이면 내보이지 않으려 욕을 주워담곤 했다. 하지만 오늘만은 남자의 핑계가 달랐다.

"이 일, 언제까지 할 거야?"

"엉?"

"..그래도 형사인데, 언제까지 뒤에서 손에 피나 묻히고 살 거냐고. 경찰로서 정의감은 엿바꿔먹은 거 같긴 해도 너도 그...딸인지 하는 여자애 돌봐주면서 살려면 언젠간 그만둬야 할 거 아냐."

"그게 내 의사대로 척척 그만둘 수가 없단다~ 네가 뭘 알겠냐, 중간관리자의 설움을~"

"모르니까 말한다, 왜."

"넌 나한테 그런 날이 올 거라고 생각하냐?"

"......."

그런 날이 올 수 있을까. 그런 물음을 하필 남자에게 던지는 것이 참으로 극적이었다.

그런 날이 주정재의 코앞까지 다가온다면, 이미 그런 날들을 누리고 있다면, 스스로 정한 시한마저 넘었다면 남자가 주저없이 숨을 끊어줄 생각이었다. 입밖으로 낼 수 없는 말이었다. 남자의 침묵을 평범한 긍정으로 받아들인 주정재는 발작처럼 웃었다.

카테고리
#2차창작
페어
#BL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