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를 떠나는 사람들 - 07

모티브는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

"모처럼 홀가분해 보이는 얼굴인 거 알아, 아빠?"

"응?"

"요즘 내내 시무룩하거나 우울해보였는 걸."

"걱정 끼쳐서 미안해."

"미안해 하라는 게 아니라..."

"그래. 무슨 일 없냐는 거지?"

확인은 했다. 그 때문에 오늘 밤으로 내 추격은 끝을 맞이할 수도 있고, 좀 더 계속될 수도 있다. 그 기간은 길지 않았지만 흔들리지 않겠다 결심했고, 또 결정했다. 그것을 선언하고 현재로 맞이할 때가 온다는 것은 뒤섞인 온갖 감정들을 홀가분함으로 조금씩 바꾸어갔다. 멈추었던 숟가락질을 다시 재개했다.

"혜연아."

"응."

"잘 자라줘서 고마워."

"갑자기 왜 그런 말을 하고 그래, 또."

"네 말처럼 홀가분한 느낌이라 그런가. 어느 날 갑자기 남자친구를 딱! 데려와도 진지하게 맞아줄 수 있을 것 같아서."

"아이 참, 난 남자친구 생각 없다니까!"

"알았어. 알았어."

조사하고, 발로 뛰어 확인하기까지 시간이 계속 흐르면서 다시 주말이 되었다. 아무 것도 몰랐던 그 날의 주말처럼 날은 몹시 맑고 따스했다.

식사를 마친 뒤 주방과 거실, 내 침실, 혜연이의 방까지 쭉 둘러보다가 나갈 채비를 했다.

"어디 나가게?"

"응. 약속이 있어서."

"약속? 은창 오빠?"

"이제 오빠라고 부르기엔 나이차가 난다니까..뭐, 아는 사람 보러가는 길이지."

"누구인지 말 안 하는 거 보면 수상한데.."

"혜연아."

"응?"

"미안해."

"또 뭐가, 아빠. 오늘 술 잔뜩 마시려고 그래?"

"아빠가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아도 혼자서 잘 해나갈 수 있지?"

"으이구, 애도 아니고! 괜찮으니까, 어서 가."

다녀온다는 말 대신 혜연이를 꼭 안아보고는, 손을 흔들며 집을 나왔다. 어떤 선택을 하든, 다시 돌아올 일은 없다. 참 못된 아빠였다.

집을 나온 뒤 근처 공원 벤치에 앉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구름 한 점 없는 짙푸른 색이었다. 한가로이 시간을 놀렸던 지난번과는 달리 오늘 하루는 무엇을 할 것인지 정해져 있었다. 그 3일간 양시백이 거쳤던 곳을 확인차 돌아보는 것이었다. 대부분 종로구와 중구에 집중되어 있었는데, 수첩을 꺼내 마지막 목적지를 큼지막하게 쓰고 그 아래의 나머지 지점들을 나열하며 경로 계획을 짰다. 종로구 이외인 지점까지 생각한다면 꽤 시간을 잡아먹을 것 같았다.

***

버스를 타고, 택시를 타고. 걷고, 뛰고.

양시백이 3일 동안 거쳐갔던 곳에 잠시 멈추어 서서 그 기억을 떠올렸다.

눈빛 검은 상일이가 설희의 손을 잡고 나타나 양시백과 대치했던 것.

병색 짙은 준혁이가 수정이를 구하기 위해 움직인 것.

못 알아볼 만큼 변한 재호가 진실을 밝히겠다며 기자가 된 것.

상일이를 막겠다던 재석이와 상일이를 돕겠다던 미정 형사.

...내가 호소했던 때보다 훨씬 더 변해버린 근태 형.

그 서울 속에 정은창은 보이지 않았고, 정재는 혜연이의 곁에 있었으며, 혜연이는 사건의 끝에서 자신이 추구하던 답을 찾은 듯 결연한 얼굴을 하고 살아가고 있었다.

중간중간 쉬거나 끼니를 때우며 지나쳐 온 곳에 가위표를 그리곤 했는데, 지금이 바로 잠깐의 휴식 시간이었다. 당연하게도 양시백은 지나온 어느 곳에도 없었다. 의도적으로 남겨둔 장소가 하나 있었고, 나는 그 목적지에 양시백이 있을 것이라고 반쯤 확신하고 있었다. 그 확신이 빗나가면 한참 헤매겠지만. 벤치에 앉아 한숨 돌리는데 손끝에 실날같은 겨울 바람이 휙 스쳤다. 바람결의 느낌은 아주 기묘해서, 나도 모르게 바람을 불어온 곳을 보며 중얼거렸다.

"등잔 밑이 어둡다고..혹시, 지금 근처에 있다면 나와줄래?"

앙상한 가지 사이로 지나가는 바람에 마른 소리가 잘게 들릴 뿐, 특유의 기척 같은 것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나도 참."

어쩐지 헛웃음이 나왔다.

***

"권현석 경감이라고 합니다. 이 빌딩 옥상에서 구조신호가 접수되어서 잠시 확인해보고 싶은데, 잠시 출입을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CCTV상에 수상한 사람이 출입하거나 한 건 없는데..혹 범죄자가 숨어들어왔다거나 한 건 이니겠지요?"

"그런 거면 체포 영장을 보여드렸을 겁니다. 이 곳의 회사...동주 물산에서 근무하고 있는 사람이니까요. 수상한 사람일 리 없지요. 마음에 걸리시면 같이 동행이라도..?"

"됐소. 그럼 볼일 보고 빨리 가시오."

순경이었던 혜연이와는 달리 직급이 높았기 때문일까. 데스크 쪽에서 조금만 알아보아도 -이를 테면 방문객을 가장해 둘러보거나 하는 것- 어느 회사가 있는지는 알 수가 있어서 고층부에 있는 한 회사의 이름을 주워섬기긴 했지만, 혹여 경비원이 끝까지 동행하겠다고 하거나 정확히 그 회사의 어떤 사람을 찾아왔는지 캐물었더라면 조금 곤란한 처지에 빠질 뻔 했다. 다행히 일이 쉽게 풀려 인사하고는 동훈 빌딩 안으로 들어섰다. 힘들여 CCTV를 의식할 필요가 없어서 엘리베이터를 이용해 10층까지 쾌적하게 올라갈 수 있었다. 혜연이와 양시백이 고생고생하며 올라온 것이 생각나 작은 웃음이 입술을 비집고 새어나왔다.

띵-

10층에 도달한 엘리베이터가 소리를 내며 열렸다. 여기까지는 당당하게, 빠르게 왔지만 만약 옥상 복도의 문이 잠겨있다면 나 역시 CCTV를 피해 곤돌라를 이용해야 할 것이다. 침을 꿀꺽 삼키며 문고리를 잡았다. 걸리거나 하는 일 없이 문고리가 매끄럽게 돌아가며 문이 열렸다.

"운이 좋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어둑한 계단 복도에 불이 들어왔다. 많이 걸어다녀 슬슬 쑤시기 시작한 다리를 독려하며 옥상과 면한 문 앞에 섰다.

그 문 역시 열려있었다. 문을 열자 동훈 빌딩의 영문 간판과 주변 건물의 야경이 보였다. 좌우를 쭉 둘러보며 중앙으로 걸어가다가, 간판이 늘어선 난간에 앉아있는 양시백의 반투명한 뒷모습이 보여 멈추어 섰다.

"오랜만이지?"

되도록 상냥하게 들리길 바라며 말을 걸었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하지만 양시백은 앉아있던 난간에서 일어났다.

-...찾지 말라고 했잖아요.

"전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찾았지."

-......

"마지막으로, 이야기 해 보지 않을래? 좋아할 만한 이야기는 아니겠지만..널 찾느라 며칠에 걸쳐 발품을 판 내 수고스러움을 봐서라도."

-..그러세요.

"이야기를 하는 도중에는 사라지지 않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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