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를 떠나는 사람들 - 08

모티브는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

"먼저,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구나."

양시백은 대답하지 않았다. 예상한 바였다.

"내가 누릴 수 없었던 44살의 시간을 누리게 해 준 것, 내가 다시는 볼 수 없었던 소중한 사람들을 다시 만나게 해 준 것. 그들과 내가 불행하지 않은 서울을 소망해 준 것까지 모두."

짜릿할 만큼 싸늘한 바람이 불어와 체온을 삽시간에 야금야금 앗아가기 시작했다. 바람의 기세에 영향을 받는 것인지 양시백의 머리카락이나 외투 가장자리의 털이 조금씩 흔들렸다. 마치 반투명한 그를 완전히 갈기갈기 흐트릴 것만 같은 바람이었다.

"너와 만나고 내가 잊었던 기억들을 떠올려낸 뒤, 너의 바람, 그리고 나의 바람으로 거둬진 불행의 씨앗이 잔재라도 남아있을까 싶어 곁에 있는 사람들을 흔드는 질문을 던지곤 했단다. 그 속에는 양시백이라는 사람에 대한 질문과 암시도 포함되어 있었고. 당연하지만 그 누구도 명쾌히 답해주지 못 했어. 조금도. 너의 자취, 너의 추억, 너의 생김새, 너의 성격, 너의 희생, 너라는 사람.."

-..이 서울이 아니면, 경감님은 돌아가시게 되잖아요.

"......"

-권혜연 씨를 홀로 남겨두고 싶지 않아 했잖아요. 유상일의 결백을 밝혀내고, 박근태가 타락했음을 밝혀내고! 재호 아저씨와 준혁 선생님, 오미정, 유상일과 함께 있고 싶어했잖아요! 여긴 그렇지 않아요. 경감님은 살아있고, 박근태는 타락하지 않았어요. 유상일도, 유아연도, 관장님도, 준혁 선생님도...아빠도, 살아 있다고요!

"이 서울은 네 희생을 바탕으로 행복으로 가득차 불행과는 동떨어진 곳이지. 모든 것을 기억하는 내게는..너무나 행복해서 깨고 싶지 않지만 깨어나야만 하는 꿈처럼 느껴졌단다."

-모르겠어요. 아니, 이해하고 싶지도 않아요!

"그건, 내가 이 서울에서 너를 인식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기에 느낄 수 있는 감정이란다. 만약 너와 내 처지가 반대였다면 어땠을까, 생각해 봤니?"

-.......

양시백은 울 것만 같은 얼굴이었다.

나 또한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만일 나 한 사람이 희생함으로서 내가 아는 모든 사람들이 평화롭고 행복한 일상을 오래오래 누릴 수 있게 된다면, 기꺼이 희생할지도 모른다고. 누군가 간곡히 붙잡는다고 해도 부드럽게 거절했을 것이다.

"이대로 현상을 유지시키는 게 네 바람이니? 이 서울을 완전히 벗어나지도 못 하고, 끝없이 맴돌며 그들을 지켜보는 것이?"

-그래요. 난...그걸로 괜찮아요. 아무리 절 설득하려고 해도 소용없어요.

"..그렇구나."

다시금 바람이 휙 불었다.

역시 설득하는 것은 무리인가.

"그럼, 너만이 희생하는 것은 부당하구나."

-...무슨 뜻이에요?

"이 서울이 너와 나의 바람대로 만들어진 도시라면, 너뿐만 아니라 나 역시 희생을 감수해야 한다는 거지. 단순히 모든 것을 기억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잖아?"

-경감님은 주변 사람들의 행복의 기준 같은 사람이니까 그런 게 있을 리가 없어요. 바라지도 않았고.

"너를 찾아다니며 한 가지 깨닫게 된 점이 있어. 바로..내가 이 서울을 떠날 수 있다는 점이지."

생각지도 못 하게 허를 찔린 양, 양시백이 눈을 부릅 떴다. 그 사실을 전혀 몰랐던 모양이다.

과거에도 휴가 철에 피서가는 일이 없었고, 고향에도 내려갈 일이 없었기에 나 또한 서울을 벗어난다는 선택지를 떠올릴 가능성이 없었지만 이번에 양시백을 찾아다니면서 확인한 참이었다.

"그래서 결심했어. 우리의 의견이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지지 않고 평행선을 그린다면, 그 때는 네가 모두를 지켜보는 것처럼 나 역시 모두의 곁을, 이 서울을 떠나겠다고. 그게 내가 치러야 할 진정한 대가라고."

-안 돼요. 그건, 안 돼요..왜, 어째서..!

"우리의 바람은 불행을 거두고 행복만을 가득 채웠지만 상처로 비롯되는 변화와 깨달음, 그 가능성도 함께 앗아갔지. 사실 그 누구에게도 멋대로 희생을 강요하고, 멋대로 불행을 거세할 권리는 없었는데."

양시백은 이제 울고 있었다.

자신의 의지를 굽힐 수도 없고, 나를 설득할 수도 없어서. 어느 쪽이든 고통스럽기 때문인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오랫동안 결심하고 다짐한 것이어서, 이전처럼 눈물을 보이거나 슬퍼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을 수 있었다. 애써 연민이 드는 것을 자제할 수 있었다. 겨우 웃어보일 수 있었다.

"'..나는 달라요. 끝까지 지킬 겁니다.', 그렇게 말하던 네 모습을 다시 찾게 되는 날까지 기다릴게."

안녕.

나는 고개 숙여 인사하고 먼저 등을 돌렸다. 양시백은 내 뒤를 쫓아오지 않았다. -사실 쫓아온다고 해도 내가 서울을 완전히 벗어나면 그걸로 끝이었다- 밤은 어느새 깊어 도시 위로 둥근 달이 걸려 있었다. 회사며 가정집이며 자동차까지 가리지 않고 붉고 노랗고 하얀 불빛을 발하는 옥상을 등진 채 계단과 엘리베이터를 이용해 빌딩 밖으로 나왔다.

주차장에 임시로 세워 둔 자동차마저 그냥 내버려 둔 채로 온갖 불빛이 형형한 거리를 향해 걸었다. 다리가 아파와 중간에 쉬어간다 해도, 목이 말라 물 한 잔을 청하는 일이 있어도 그저 걸어갈 것이었다. 서울 이외에서도 수많은 사람들이 행복을 누리고 있을지, 그 사람들이 일상을 제대로 이어나가고 있는지 정확히 확인한 적이 없었고, 어쩌면 정말로 다시는 돌아올 수 없게 되어버릴지 모르지만 그렇게 되어도 후회는 없었다. 그것만이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자, 또 마지막 일이었다.

나는 소중한 사람들이 웃고 떠들며 살아 숨쉬는 서울을 떠나는 발걸음을 때로는 천천히, 때로는 빠르게 옮겼다.

양시백이 언젠가 깨달아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이런 서울은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하나 둘 있었으나 그들 모두 종내엔 자신과 같은 선택을 했다고.

그들은 어딘지도 모르나 자신이 가야 하는 곳만큼은 알고 있어 그곳에 도달하기 위해 떠나갔다고.

나와 나 이전에 도시를 떠나는 사람들 모두 그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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