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색도시

[누아재인] 새겨진다는 건

그 흔적에 그리움을 안고 산다는 것

한겨울임에도 밖에는 비가 억수같이 내리고 있었다. 여름에 장마기간이 짧다 싶더니 겨울에서야 미처 다 쏟아내지 못한 비를 내리는 것 같아 미련해보이기까지 하다. 강재인은 창틀에 어깨를 기대고서 비가 내리는 도시의 야경을 내려다보았다. 먹구름에 하늘은 별 한점 빛나지 않건늘 도시엔 집집의 불빛들이 밝아 나름의 절경을 이루고 있었다. 고층에서 보는 도시는 무척이나 작았다. 손을 뻗어 그대로 쥐면 아스라히 부서져 그 파편들이 손바닥에 남아있을 것 같았다. 권력은 이렇듯 이런 소소한 곳에서 문득 훅하고 다가왔다. 강재인은 숨을 조여오는 권력의 도취감에 잠시 눈을 감다 자조적이게 웃었다. 이런 작은 것을 위해 자신은 얼마나 큰 것들을 포기해왔던가. 강재인은 눈을 가늘게 떠 창문 유리 너머로 비춰지는 남자를 보았다. 남자는 방에 들어온 순간부터 지금까지 단 한마디도 말하지 않았다. 그저 서서 강재인의 곁에 서 있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뿐임에도 남자는 어딘가 위태로울 정도로 처량해보였다. 유리창에 비춰진 남자의 모습이 실재인 것처럼 비를 맞으며 도시 위를 걸어다니는 망령같기도 했다. 남자는 분명 강재인 뒤에 서 있을 터인데도 말이다.

강재인은 뒤를 돌아 남자를 보았다. 길고 덥수룩한, 진한 남색의 머리카락은 얼굴의 반을 덮고 있었다. 한쪽 뺨에는 칼에 그인 듯한 흉터가 있었는데 그것은 남자의 인상을 흉악하게 만들기보단 안타까움을 자아내었다. 키는 그렇게 크지 않았지만 체격이 건장하여 나름의 위압감을 풍겼다. 강재인은 남자의 앞머리를 조금 흐트렸다. 그러자 그 안쪽에는 깊게 침체되어 먹구름이 낀 하늘마냥 어둡게 빛나는 보라빛의 눈동자가 강재인을 보고 있었다. 강재인은 남자의 이런 눈이 마음에 들었다. 텅빈 눈에 오직 자신만이 가득찬 것 같은 것도 좋았고 다른 사람과는 다른 눈빛으로 저를 보는 것도 마음에 들었다. 강재인은 작게 웃으며 다시 남자의 앞머리를 정돈해주곤 그의 어깨를 두어 번 가볍게 톡톡 두드렸다. 남자는 여전히 아무 대답도, 어떠한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묵묵히 서서 강재인의 손길을 얌전히 받을 뿐이었다.

새겨진다는 건

W.T. HA_RUT_

출생지, 나이, 심지어 이름조차 알 수 없는 남자. 알 수 있는 거라곤 주정재라는 남자의 오른팔같았던 존재라는 사실 하나 뿐, 그 외의 정보는 남자 그 자신조차 알고 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아무것도 없었다. 심지어 말수도 극단적으로 적어서 묻는 말에 대답하는 것조차 하지 않아 심심하기 짝이 없는 남자라고 강재인은 평했다. 하지만 강재인은 그런 남자를 자신의 곁에 두었다. 많은 이들이 반대했음에도 강재인은 그들의 말을 흘려넘겼다. 언젠가 남자가 드물게 강재인에게 물었었다. 어째서 자신을 곁에 두었냐고. 강재인은 남자가 자신에게 말을 걸었다는 사실에 짐짓 놀라다가도 곧 웃으며 답했다. 주인 잃은 개를 줍는 것도 가끔은 나쁘지 않을 것 같아서. 거기까지 말하고 그의 입술은 몇번 옴싹달짝 못하다가 이내 굳게 닫혀버렸다. 남자도 굳이 그 이상을 캐묻지 않았다. 강재인과 남자의 거리감은 딱 그정도였으니까.

강재인에겐 자신의 사람이 필요했다. 한때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 강하고 무서운 존재라 여겼던 장희준은 이제 죽을 때를 앞둔 노망 난 노인에 불과했으나 그가 쳤던 거미줄에 옭아매어진 인간들은 아직 내부에서 활개하고 다녔기 때문이었다. 강재인도 한땐 그들과 같은 처지의 인간이었다. 그러나 그들과 달리 절대적 강자의 위치를 향해 발버둥쳤었다. 불안해하면서도 채워진 목줄에 살아있음을 안도하는 미련한 인간이 아닌 그들의 목줄을 쥐고 흔드는 위치를 탐했었다. 그랬기에 지금 그녀는 백석의 실세를 장악하며 장희준의 명성과 권력에 자신의 이름을 새로 새겨나갈 수 있었지만 주인이 바뀐다는 것에 불안감을 느끼고 발악하는 자들을 그냥 넘길 순 없었다. 그래서 그들로부터 자신의 위치를 굳건히 다잡을 수 있도록, 원하는 것을 쉽게 손에 넣을 수 있도록 자신의 명령에만 움직여줄 사람을 찾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마침 그때 그 남자가 강재인에 눈에 들어왔었다. 주인을 잃고 떠도는, 목줄조차 감히 채울 수 없을 것같은 안개같은 남자가.

강재인은 술병이 빽빽하게 들어찬 진열대에서 한참을 서성이다 안쪽에 놓여있던 술병을 하나 꺼내들었다. 이미 앞전에 몇번정도 마셨던 건지 진한 호박색의 액체가 병의 반쯤에서 찰랑거렸다. 그는 비가 오는 날이면 종종 이 술을 찾았다. 아주 독하지만 그만큼 달달하기 짝이 없는 이 고급술은 축축해지는 마음이 더 깊은 곳으로 가라앉는 것을 막아주었다. 끈적이는 술에 그대로 빠져버릴 것처럼 술병 가득히 술을 따르고는 한 번 입술을 가볍게 적셨다가 그대로 목구멍 너머로 쭈욱 들이켰다. 알싸한 알코올의 내음이 입안 가득히 퍼지고 무리하게 넘어가는 술의 칼칼함에 잔기침을 두어 번 작게 콜록였다. 후욱 달아오르는 열기에 그것을 내보낼려는 듯 고개를 뒤로 젖히면 뒤에서 경호를 서고 있던 남자의 상이 거꾸로 시선에 맺혔다. 심심하기 짝이 없는 남자. 그러나 그런 그는 술친구로선 나쁘지 않은 편이었다. 무엇을 말해도 들어주고, 들은 것은 어디에도, 어쩌면 자기 자신에게조차 되새기지 않을 것 같기 때문이다.

강재인은 자신의 얘기를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남자에게는 얘기했다. 특히 비가 오고 술을 깐 날에는 잠금장치가 풀린 것마냥 자신의 얘기를 술술 불었다. 좋아하는 것이나 싫어하는 것, 취미는 무엇인지, 이상형은 어떻게 되는 지와 같은 사소한 것부터 어릴 적 얘기나 부모님 얘기, 그리고 사랑했던 이에 대한 것도 서슴치 않고 얘기했다. 강재인이 남자에게 자주 얘기해줬던 주제는 사랑했던 이에 관한 얘기였다. 그가 사랑했던 이는 무척이나 조심스러운 사람이었다. 다가오는 것도, 물러서는 것도 모두 조심스러웠지만 그렇기에 다정한 사람이었다. 강재인은 그 사람을 사랑했다고 말했다. 이젠 목소리조차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희미해진 사람임에도 이름 석자를 떠올리면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이 치솟을만큼 사랑했다고 했다. 

"……당신은, 그 사람과 참 많이 닮았어."

오늘도 비가 왔고 술을 깠기에 강재인은 어김없이 자신의 얘기를 꺼냈다. 술에 취한 그녀는 나른해진 눈길로 남자의 가려진 눈매를 찬찬히 쓸었다. 남자는 빈 술잔과 강재인을 번갈아 보다 이내 빈 술잔에 다시 술을 채웠다. 강재인은 천천히 채워지는 술을 뚫어지게 쳐다보다 곧 남자의 손목을 움켜잡았다. 손목을 잡고서, 술병을 내리고, 몸을 돌려 그대로 남자를 끌어다 당겼다. 남자는 저항하지 않았다. 애초에 그는 강재인을 거스른 적이 없었다. 강재인의 충견이 되기 전부터, 되고 난 후까지. 마치 처음부터 그의 주인은 강재인이었던 것마냥 굴었지만 거기에 보이는 감정은 충성심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게 정확히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강재인은 그저 그가 자신을 볼 때, 무엇도 들어있지 않은 그 텅 빈 눈에 자신만이 들어찰 때 지독히도 슬픈 빛을 띄고 있다는 것만큼은 알았다. 

강재인은 남자의 넥타이를 끌어다 당겨 고개를 내려맞췄다. 달짝지근한 술내음이 두 사람 사이로 농후하게 퍼져나갔다. 가벼운 호흡마저 과할 정도로 공기의 압박이 무거워졌다. 그러나 내뱉는 숨엔 열기가 담기고 들이킨 숨엔 애절함이 묻어났다. 강재인은 손을 뻗어 남자의 뺨에 얹었다. 푸석함 사이로 느껴지는 약간의 꾸덕함이 인간의 피부와는 거리가 먼 것 같아 괴리감을 주면서도 그 너머로 전해오는 온기에 쉽게 손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 사람도 나를 그렇게 봤거든. 뭐가 슬픈 지 모를 그런 눈으로 말이야. 왜 그렇게 봤던 걸까."

"…………."

"…저기, 당신은 왜 그렇게 나를 보는 거예요? 혹시, 내가 불쌍한가? 그건 아닐텐데"

강재인이 자신의 얘기를 꺼내는 걸 싫어하는 이유는 딱 하나였다. 동정받기 싫어서. 아무것도 모르는 타인이 눈에 보이는 것들로만 자신을 동정하는 것이 강재인은 끔찍이도 싫었다. 그건 무시당하는 기분이 들어서도, 기만당하는 기분이 들어서도 아니었다. 이미 자기가 자신을 동정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살고자 선택한 일들은 사실 선택이 아니었기에. 생존을 위해 강요받은 삶을 이어가기 위해선 소중한 것들을 꼭 하나씩 손에서 놓아주어야 했다. 그래서 강재인 그는 강자가 되고자 했다. 최고 권력자의 자리를 삼켜 그 무엇도 자신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가지 않게 붙들려 했다. 그러나 막상 그 자리에 올랐을 때 그녀가 잡고 싶어 했던 것들은 이미 모두 자신을 떠나간 후였다. 그녀의 손에 남은 것이라곤 손바닥에 아플 정도로 박혀오는 부서진 도시의 잔해들과 그것들을 부셨던 삭막한 권력 뿐이었다.

그러나 후회는 없다. 후회를 해선 안 되었다. 부셔버렸다면 밟고 가자. 놓아버렸다면 더 큰 것을 쥐리라. 탐한 것을 먹고 자라 다른 이가 탐내지 않게 성장하자. 강재인은 그런 식으로 강인하게 자신을 키워나갔다. 그렇기에 누구도 함부로 그를 동정해서는 안 되었고 누구도 함부로 그를 기만해서도 안 되었다. 오직 그 자기 자신만이, 이렇듯 비가 오는 날, 자신이 놓아버린 것 중에서 가장 소중하다 생각했던 것이 떠오르는 날에, 약간의 후회를 지독한 술에 섞어 마시며 자신을 동정할 수 있었다. 

사랑했던 이가 자신을 볼 때 오직 연인의 눈만으로 본 적이 없음을 강재인은 잘 알고 있었다. 사랑했던 이는 때때로 여동생을 보는 오빠와도 같은 상냥함과 그 상냥함 속에 처절한 아픔을 띄우곤 했었다. 이 남자도 그렇다. 자신을 오직 충성해야하는 주인으로 보지 않는다. 남자의 눈동자가 자신을 비출 때 남자의 눈빛엔 충성이 아닌 누군가를 향한 그리움을 담는다. 그리움에는 축축하게 가라앉은 슬픔이 조용히 아우성을 치고 있었다. 그러나 강재인은 그런 눈이 좋았다. 그런 눈이 자신을 볼때 온전히 자신만을 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어머, 이젠 대답도 안 하네. 상사한테 이래도 되는 거야? 섭섭해질려고 하는데."

"…………."

"음……. 좋아. 이렇게 하자. 내 대답에 질문해주면 당신 질문에도 내가 하나 대답해줄게. 어때? 좋은 제안이지?"

선심쓰듯 말하지만 말이 좋아 제안이지 사실상 일방적인 명령과 다름없었다. 따르지 않으면 따를 때까지 요구할 터였다. 남자는 강재인을 잘 알았다. 원하는 건 반드시 손에 넣는 사람이었다. 지금과 같은 아주 사소한 것에서부터 권력과 생존이라는 아주 거대한 것까지 그는 원하게 되면 무조건 손에 넣어야 했다. 그런 집요함과 강한 쟁취력이 지금의 그를 만들었으리라. 남자는 한참을 버석이는 입술을 문대다 마침내 입을 열었다.

"……동정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그저?"

"……조금, 떠올라버려서……."

남자는 거기까지 말하고 입을 다물었다. 굳게 닫힌 입은 다시 평상시처럼 침묵을 유지했다. 그러나 강재인은 그 이상 캐묻거나 하지 않았다. 남자와 강재인의 거리는 딱 그정도였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한결같은 거리감을 유지했다. 서로에 대해 알고, 서로의 사정에 대해 안다는 건 꽤나 머리 아픈 일임을 잘 알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지금은 약간의 두통을 서로가 서로에게 얹고 있었다. 거리감을 좁히고 있는 것이다. 서로에게 지금의 모습으로 있을 수 있는 거리감을. 

강재인은 빈 술잔에 술을 따랐다. 이번엔 가볍게 반잔만을 담았다. 술이 반만 담긴 술잔은 남자에게로 향했다. 이번엔 당신 차례. 강재인은 재촉하듯 손에 들린 술잔을 남자에게 가볍게 흔들어보였다. 남자는 잠시 머뭇거리다 곧 술잔을 받아들였다. 조심스럽게, 그러나 물러나는 것없이 그대로 한번에 들이키고는 훅 올라오는 열기를 끝끝내 속으로 다시 집어삼키었다. 그렇게 한참을 입 위를 손등으로 짓누르며 숨을 고르고서야 남자는 강재인에게 질문을 할 수 있었다. 남자는 신중하게 입을 열었다.

"……저를……저를 거둔 진짜 이유가 뭡니까."

남자의 질문은 긴 정적으로 이어졌다. 크고 넓은 방에 오직 두 사람만이 들어와있어서 창문을 두드리는 빗소리가 정적의 사이를 더욱 거세게 가로질렀다. 천장에 매달린 샹들리에가 위태롭게 흐르는 공기흐름에 맞춰 작게 흔들렸다. 샹들리에의 빛은 무척이나 옅고 흐릿했다. 눅눅하게 가라앉은 공기에 겨우 뻗어가는 빛은 정적에 오직 시선만을 맞추는 두 사람을 비추었다. 

남자의 시선은 샹들리에같았다.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었고 흔들리는 눈동자엔 작은 빛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 눈동자에 담기는 건 항상 강재인과 강재인을 봄으로서 나오는 지독한 슬픔 뿐이었다. 그러나 그 눈동자가 지금은 다른 것을 담고 있었다. 바로 불안함이었다. 남자는 불안해하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이라면 눈치채지 못했을 것이다. 강재인이었기에 알아볼 수 있었다. 애초에 아무것도 담고 있지 않았던 눈동자에 늘 담겨있던, 그 눈동자에서 지독한 슬픔과 그리움을 끌어내는 강재인이었기에 그의 불안을 눈치챌 수 있었다. 

강재인은 돌연 소리내어 웃었다. 그의 웃음은 그저 재밌는 것을 본 것같은 유쾌한 웃음이기도 했으며 비웃음을 담은 도발의 웃음이기도 했지만 환희에 찬 듯한 기쁨의 웃음같기도 했다. 아. 결국엔 왔구나. 결국엔 왔어. 그렇게 말하며 강재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남자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그의 양뺨을 쥐어내리고서 그의 귓가 아주 가까이에서 속삭였다. 

"……주인을 잃은 이름과 아주 잘 어울릴 것 같아서, 라고 하면 어떡할래?"

이게 무슨 말인지, 이해했어? 강재인의 말에 남자는 눈에 띄게 놀란 표정을 지었다. 단 한번도 감정을 표정에 드러낸 적 없던 남자였으나 자신이 생각한 것이 맞는지에 대한 불확실성과 함께 심히 흔들리고 있었다. 강재인은 그런 남자가 재밌었다. 모든 것이 바뀌었다고 생각했으나 눈만큼은 바뀌지 않은 남자가, 배려에서 무의식적으로 조심스러움을 드러내는 남자가, 도수가 센 술에 약하면서 물러서지 않는 남자가, 결국 정에 약해 자신을 볼때 더없이 다정해지는 눈동자를 지닌 남자가 강재인은 무척이나 재밌었고, 그리웠고, 사랑했었다. 

혼란스러워하는 남자를 쓰다듬는 강재인의 손길은 사랑스러운 것을 쓰다듬듯 부드러웠으나 이별을 아는 자의 애처로움 또한 담겨있었다. 강재인은 남자의 손을 잡았다.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굳은살이 많이 베긴 단단하고 큰 손이었다. 굵지는 않지만 심지가 굳은 손. 그 손을 잡으며 생각했다. 역시 주인을 잃은 개를 줍는 건 가끔은 나쁘지 않다고. 그날, 그 순간, 우연이었지만 필연처럼 남자를 주워 자신의 곁에 두었다. 수많은 이들의 반대가 있었지만 강재인은 그들을 모두 무시했다. 얻고자 했던 것을 얻을 수 있는 위치에 올라서기까지 자신은 얼마나 크고 많은 것들을 손에서 놓았었나. 그러나 지금 그 위치에 선 그에게 옛날, 이제는 목소리마저 잊어버린, 그러나 가장 소중하게 여겼던 것이 누구도 아닌 남자가 되어 자신의 앞에 나타났었다. 얻고자 하는 것은 반드시 얻어야 하는 사람이었기에 강재인은 남자를 반드시 제 곁에 두었다. 언젠가 저 남자가 자신과의 거리를 좁혀올 때, 그 때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 그때가 됐을 때 남자에게 제안과도 같은 명령을 내리기 위해서. 강재인은 승자의 표정으로 남자에게 명했다.

"누군가에 대해 안다는 건 머리 아픈 일이지만, 당신에 대해선 머리 좀 아파볼까 하는데, 어때? 알려줄 거지?"

그렇게 말하며 강재인은 웃었다. 연한 핑크색의 머리카락 사이로 흰 머리가 희끗하게 보이는 중년의 여성인 그였지만 그가 짓는 웃음에는 한때의 젊은 날이 비춰보였다. 어둑한 골목 안, 노란 가로등 불빛 아래서, 술에 취한 듯 옅게 달아오른 두 뺨을 상기시키며 호감을 느낀 상대에게 적극적으로 다가가는 젊은 여성의 모습이 언뜻 보였다. 그 모습에 남자는 저도 모르게 작은 탄식을 내뱉으며 깨달았다. 자신은 처음부터 그에게 완전히 길들여졌음을. 우연을 핑계삼아 그의 옆자리를 지키며 자신은 그 생활에 안주해가고 있었음을. 명령이 아니더라도 언젠가 그에게 자신은 모든 것을 말하게 되었을 지도 모른다. 그가 자신에게 모든 것을 말해줬던 지난 수십, 수백번의 술자리에서처럼 말이다. 그렇게 되도록 강재인은 큰 판을 짰고, 남자는 보기 좋게 넘어간 것이다. 

남자는 입을 열었다. 막혔던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자신이 듣기에도 너무나 낯선 목소리에 점차 줄어든 말수였다. 그러나 지금은 어째서인지 낯설지 않았다. 원래 그의 목소리였던 것처럼 익숙했다. 남자는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긴 얘기가 될텐데, 괜찮으시겠습니까?"

"상관없어. 내 곁에서 그 긴 얘기를 오래오래 풀어주길 바랄게, 정은창 씨."

남자는 신원불명의 사람이었다. 출생지, 나이, 심지어 이름조차 알 수 없는 사람. 자신에 대해 아는 것이 없고 아는 사람도 없어서 누구도 될 수 없던, 누구도 아니었던 남자. 그러나 그런 그를, 강재인이 불렀다. 정은창이라는 이름으로 남자를 자신의 곁에 세운 것이다. 

이름을 안다는 건 그 이름의 주인을 자신의 안에 새긴다는 뜻이다. 스쳐가는 인연들의 이름들은 금방 지워지지만, 인연을 깊게 맺을수록 심장 한 구석엔 인연의 깊이만큼 이름이 새겨진다. 그리하여 새겨진 공간엔 이름의 주인과 나누었던 추억들이 기쁨이나 슬픔과 같은 감정들이 담겨져 자신의 마음 한 구석을 채워나가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름의 주인이 사라지면 그 빈 공간만큼의 그리움이 쌓이게 된다. 새겨진다는 건, 그런 것이다. 언젠가 다가올 그리움을 안고 산다는 것이다.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떠안고 살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강재인은 남자를 자신에게 새겼다. 흐릿해져가는 흔적 위로 다시 새로이 정은창이라는 이름 석자를 새겨나갔다. 남자는 그렇게 강재인에게 정은창이 되었다. 누구도 아닌 남자였으나 강재인이 그를 부르고, 그에게 이름을 주고, 자신의 안에 새김으로서 남자는 정은창이 되어 벅차오르는 슬픔과 기쁨을 느낄 수 있는 존재가 되었다. 

비는 어느 새 그치고서 먹구름 사이로 은은한 달빛이 창문 틈으로 비춰들어왔다. 이젠 빈병이 되어버린 술병이 달빛을 받아 반짝이고 진한 호박색의 술이 술잔에서 찰랑였다. 그러나 그 술을 마실 사람은 이제 어디에도 없었다. 두 사람은 술보다 더욱 서로에게 취해 있었기 때문이다. 강재인은 정은창의 손을 잡았다. 정은창은 강재인의 손을 덮어주었다. 그리고서 두 사람은 조근조근, 서로만이 알고 서로만이 몰랐던 이야기를 달이 기우는 밤동안 이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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