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호미정] 바다를 보러가자
내년에도, 내후년에도. 둘이서 함께 보러가자.
봄이 온다지만 3월의 밤은 여전히 차가웠다. 금방 내린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면 뜨거운 커피가 따갑게 혀를 자극하고 이에 숨을 내뱉으면 하이얀 김이 입에서 모락모락 피어났다. 봄은 무슨. 아직 겨울이야, 겨울. 재호는 입고 있던 점퍼를 세게 끌어당겼다. 그러면서 흘끗, 옆으로 시선을 흘리면 춥지도 않은지 얇은 가디건 한 장을 걸치고선 한 손으로 자신이 사준 커피를 쥐고 있는 미정이 보였다. 미정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서 그저 가만히 서서 천천히 들어오는 기차를 바라볼 뿐이었다.
기차는 시끄러운 마찰음을 내며 속도를 멈추었다. 이윽고 완전히 멈추고선 대량의 햐안 김을 내뿜으며 문을 열었다. 안의 공기는 무척이나 따뜻했다. 밖이 추워서 유독 그렇게 느껴진 걸수도 있다. 다소 불편한 의자를 뒤로 젖혀 불편함을 다소 줄여본다. 뒤에 사람이 있으면 젖히기 힘들지만 다행이도 막차에는 사람이 많이 없었을 뿐더러 이를 위해 맨 뒷좌석을 예약한 재호였다. 미정은 딱히 의자를 맞추거나 하지 않았다. 창가에 앉아 출발하는 기차의 바깥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배고프지 않아?"
"별로요."
"기차는 다 좋은데 의자가 불편해."
"서재호 씨가 나이가 들어서 그래요."
"참나, 오미정이랑 나랑 나이차이가 뭐 얼마나 난다고…."
대화는 소소하게 이어졌다. 소소한 만큼 길게 가지 않았다. 침묵은 어색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불편하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재호는 무겁게 가라앉는 마음에 허리를 다소 뒤로 눕혔다. 눕고서 미정을 보았다. 미정은 창문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것이 빠르게 지나가는 풍경을 보는 것인지, 아니면 창문에 비춰지는 자신을 보는 것인지 재호는 알 수 없었다.
바다를 보러가자
W.T. HA_RUT_
바다에 가자고 제안한 건 재호였다. 어느 바다에 갈 것인지를 정한 건 미정이었다. 사람이 많은 곳도, 해가 중천에 떠있을 때 가는 것도 싫었던 미정이 택한 바다는 재호도 알고 있는 곳이었다. 흘러가는 추억들 속에서 섬마냥 홀로 떠다니는 그런 곳. 그 바다에는 정확한 이름이 없었지만 어쩐지 그리운 자의 소식을 들은 것처럼 그리움이 몽글몽글 피어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 바다는 해벽이 많았다. 사람 자체가 잘 다니지 않는 곳이기에 바닷가 근처에 있던 큰 바위산들이 깎이고 깎이다 해벽이 된 것같다고 흘러가는 말로 들었었던 기억이 났다. 높고 가파른 해벽들이 줄지어 있었기 때문에 낮이 아니면 햇빛이 들어오지 않아 언제나 어둡고 삭막한 그런 곳이었다. 그렇기에 관광객은 물론이요 피서를 즐기러 오는 사람들조차 오지 않아 아는 사람은 극히 적었는데 그들이 이곳을 알게 된 경위는 정확히 두 부류로 나뉘었다. 첫째는 길을 잘못들어 우연히 찾게 된 경우이고 둘째는 현장조사를 위해 파견을 나온 경우였다. 미정과 재호는 당연하게도 후자였다. 수사 당시 올해 피서는 여기서 하게 생겼다며 몇몇 형사들이 툴툴거렸었다. 그들과 조금 떨어진 곳에서 음습한 것이 살인이 일어나기 아주 좋네, 라고 누군가가 말했었다. 그 옆에서 하지만 저 해벽 위에서 보는 바다는 정말 예뻐요, 라고 다른 누군가가 답했었다. 그랬었던 한때가 이젠 그 바다의 가장 깊숙한 곳에 잠겨있다.
10년이 지났지만 그곳은 여전히 해벽이 많았다. 개발이 되지 않아 빛이라곤 하늘에 무수히 펼쳐진 별빛들과 유독 밝게 빛나는 달빛이 전부였다. 미정은 해벽을 잡고 조그만한게 난 길을 따라 조심스럽게 아래로 내려갔다. 재호는 그런 미정을 붙잡았다. 내려갈 셈이야? 이렇게나 어두운데? 미정은 아무말없이 재호를 바라보다 고개를 한번 끄덕이고는 마저 내려가기 시작했다. 재호는 마저 붙잡을려는 손을 거두고는 한숨을 쉬며 미정을 따라 내려갔다.
10년 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이제 이곳엔 모래사장보단 작은 조개껍질이 더 많아졌다는 점이다. 마지막 한 발을 내딛어 바닥에 닿으면 아즈라히 부서지는 조개껍질들의 소리가 들려왔다. 미정은 처음 걸음마를 떼는 아이마냥 한 걸음, 한 걸음을 신중하게 걸었다. 조개껍질들이 부서질 때마다 바다의 비릿내가 더욱 농후하게 퍼지는 것같은 착각이 들었다. 부드러운 모래는 지금보다 한참을 더 걸어서야 모습을 드러냈다. 딱딱한 소리가 아닌 건조하게 말라 서걱이는 소리가 발밑에서 들리고 나서야 미정은 자신이 기억 속에 있는 모래사장에 도착했음을 알았다. 쭈그리고 앉아 모래에 손가락을 가져다대면 부드러운 모래알들이 손가락 사이를 가볍게 스치고 지나갔다. 미정은 곧바로 신발을 벗었다. 그리고 맨발을 그곳에 조심스럽게 가져다 대었다. 차갑게 얼린 이불에 발을 들여넣는 느낌이었다. 모래는 묵직하게 발을 내려누르지만 그 안은 습하지 않았다. 미정은 푹푹 가라앉는 발을 옮겨 파도가 치는 경계선까지 걸어갔다. 힘차게 바다 저 끝에서부터 달려와 끝에 다다라선 허무할 정도로 거품이 되어 사그라드는 파도는 미정의 발을 보듬듯이 촉촉하게 적셨다. 바닷물은 무척이나 차가웠으나 미정이 차갑다고 느낀 것은 옆에서 힉, 하는 샛된 소리를 듣고 난 후였다. 나이에 맞지 않게 방정을 떠는 모습이 퍽 우스워서 미정은 한심에게 재호를 쳐다봤다. 재호는 멋쩍게 웃었다. 그러다 곧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바뀌었다.
"설마 바닷물에 발을 담글 줄은 몰랐는데……. 알았다면 수건이라도 가져왔을 거야."
"서재호 씨한테 그런 섬세함이 있었을 줄은 몰랐네요. 아니지. 말해주지 않으면 모르니까 여전히 둔한 게 맞나?"
"말해주지 않는데 어떻게 아나. 알면 내가 기자를 왜 해. 때려치고 점쟁이로 사는 게 훨 편할텐데."
"기자 안 때려칠 거잖아요. 무슨 일이 있어도, 계속 할 거잖아요, 서재호 씨는."
진실인지 뭔지 그런 허황된 것들을 위해서. 미정은 뒤로 한 걸음 발을 내뺐다. 파도가 철썩이며 발목에 부딪혔다. 미정의 걸음에 맞춰 재호가 앞으로 걸어갔다. 그의 발이 바닷물에 얕게 잠기었다. 미정은 이번에 두 걸음을 더 뒤로 내뺐고 재호는 그녀를 따라 앞으로 두 걸음을 옮겼다. 발목까지 완전히 잠긴 발이 차갑게 얼어붙는 감각이 들었으나 썩 나쁘지만은 않았다. 그러나 재호는 달랐다. 바닷물은 그에게 너무 차가웠고 그래서 그만큼 미정을 걱정했다.
"미정이."
"서재호 씨는 어디까지 따라올 수 있어요?"
"미정이, 그만 가."
"제가 여기서 더 가도, 얼마를 더 가도 계속 따라올 건가요?"
"춥다. 감기 걸려."
"따라오지 마요. 거기 서 있어."
미정이 걸음을 멈춘 것은 바닷물이 그녀의 종아리를 완전히 삼키고 난 후였다. 바람에 맞춰 출렁이는 파도에 힘없이 흔들리는 몸은 어둠에 완전히 잠식된 다리로 인해 바다 위에 떠있는 망령과도 같아 보였다. 망령은 남자를 봤다. 바보같이 되려 울 것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걱정스러움 사이로 약간의 슬픔마저 새어나오는 남자를.
"나, 죽고 싶다고 생각한 적 없어요. 왜냐면…사는 게 매일 지옥이었으니까요. 그런 지옥에서 죽는 건 사는 것보다 더 끔찍했어요."
미정은 한때 정의를 꿈꾸며, 정의를 위해 몸을 불사질렀던 과거의 자신이 낯설게만 느껴졌다. 매일 자기 자신이 자랑스러웠고 경찰제복을 입으면 그 누구보다 멋져보였다. 동경하던 모습 그대로를 따라가며 언젠가, 모든 걸 불태워도 좋을만큼의 열정적인 사랑을 해서, 절대 자기 부모와 같은 길을 걷지 않겠다고 다짐했었다. 그러나 현실은 어떠했는가. 자신이 꿈꾸던 정의를 위해 직장을 그만두고 나온 그녀를 반긴 것은 달래지지 않는 공허함이었다. 진실은 밝혀지지 않았고 돈과 권력에 굶주려진 놈들만 배불리먹는 비틀려진 정의가 그녀의 공허함을 채울 수 없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억지로 빈 공간을 채우기 위해 서두른 결혼은 그녀의 삶을 지옥으로 이끄는 데 충분했다. 꿈과 현실은 다르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며 약없이는 삶을 이어가는 것도 지쳐가는 나날이었다. 옛날 동료들과 함께 찍은 사진은 날이 갈수록 현실과의 괴리감이 느껴져 점점 보지 않게 되었다.
미정이 그 사진을 다시 보게 된 건 상일의 전화가 온 후였다. 삶에 지치고 죽음을 맞지 못하는 미정에게 상일이 다가온 것이다.
"상일 경위님이 전화해줬을 때……그때와 달리 서재호 씨나 배준혁이 아닌 나를 선택해줬을 때……죽어도 좋다고 생각했어요. 복수를 향해 달려가는 그와 함께 파멸해가는 것도 좋다고 생각했다고요."
"……미정이…."
"설령 이용당하고 있다고 하더라도……내가 사랑하고 있으니까 괜찮다고 생각했어요. 상일 경위님의 삶을 지탱해주는 게 복수라면, 내 삶을 지탱해주는 건 상일 경위님이니까 그분과 함께 복수를 이뤄내는 게 맞다고 생각했죠."
자신이 헛된 망상에 빠져 있었다는 걸 안 건 수감이 된 후였다. 철장 안으로 범죄자를 넣었었던 과거의 자신이 보면 경멸할 짓을 했다며 자학적인 웃음을 짓다 이내 울었다. 몸도 마음도 모두 불태운 결과가 이거라면, 사랑을 이루지도 못하고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어버린 지금, 잿더미에 불과한 자신에게 남은 건 대체 무엇인가. 빛을 잡기 위해 가로등에 다가갔다 그대로 죽어버린 나방과도 같은 자신은 차가운 아스팔트에 차갑게 식어가고 있을 뿐이었다.
"……망상에서 깨어나 현실에 돌아왔을 때, 내게 남은 건 아무것도 없었어요. 복수도 이루지 못했고 사랑도 해내지 못했어요. 나름 잘 살아보겠다고 차린 미용실도 이젠 다른 사람의 것이 되었죠. 주위에 나를 이해해 줄 사람이라곤 어디에도 남아있지 않았어요. 정말……말 그대로 아무것도 없었다고요."
미정은 손에 바닷물을 담아 들어올렸다. 손가락을 꽈악 오므렸으나 바닷물은 손가락틈 사이로 주르륵 흘러 다시 거대한 바다의 흐름에 흘러들어갔다. 이 손에 잡힌 것들은 다들 이랬다. 있어줄 것처럼 굴고선 자신들이 가고자하는 곳으로 금방 빠져나가 자신을 두고 흘러가버렸다. 자신은 그저 서서 그들을 보내줄 수밖에 없었다. 따라가도, 또 이렇게 놓쳐버릴테니까.
"……이런 나를 이 세상에 붙들 수 있는 것따위, 존재할 리가 없죠."
밤은 어느 때보다 어두워서 주변의 것들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달빛이 밝지 않았더라면 미정의 모습조차 보이지 않았을 그런 어둠 속에서 별빛들이 은은하게 제자리에서 빛나고 있었다. 바다는 푸른색을 잃고 밤의 어둠에 물들여졌고 그 위로 위태로이 빛나는 별들을 박아넣었다. 거대한 검은 융단에 별무늬가 박힌 듯했으며 무한히 펼쳐진 어둠 속에서 바다와 하늘은 하나가 된 그곳은 마치 우주와도 같았다. 오직 달과 별만이 있는 우주. 그 우주의 중심에 미정이 있었다. 망령처럼, 갈 곳을 잃고 헤메이는 미정이 그곳에 서 있었다. 그대로 어둠에 묻혀 깊숙한 곳에 잠겨버릴 것만 같았다.
재호는 달렸다. 바지가 젖어갔지만 상관없었다. 그는 자신의 몸을 모두 적셔버린다고 해도 괜찮았다. 어느 한때 골목을 누비며 달렸던 때보다 더 힘차게 달렸다. 참방이는 소리가 격하게 울리고 사방으로 바닷물이 튀었다. 뼛속까지 시릴만큼 차가웠으나 그걸 신경쓸 여유가 없었다. 재호는 손을 뻗었다. 그리고 세게 미정의 손을 붙잡았다. 어디에도 흘려보내지 않을 것처럼. 동시에 자신이 이곳에 있음을 알려주기 위해서. 재호는 양손으로 미정의 손을 단단히 붙잡고는 외쳤다.
"여기 있잖나! 내가……내가 있어! 자네 곁에 내가 있다고!"
그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재호는 잡은 손을 끌어 자신의 이마에 가져다 대었다. 그 행동은 마치 기도하는 것같았다. 경건히, 그러면서 애절하게, 온기를 나누듯 손을 마주하며 재호는 벅차오르는 숨을 찬찬히 내뱉었다.
"…이대로 사라지면, 너무 무책임하잖아. 자네가 저지른 죄는 어쩔려고 이래. 설희한테 사과해야지. 자네 잘못을 사과하고, 또 사과하면서, 그 아이의 상처가 아물 때까지 옆에 있어줘야지. 그게 우리들이 한때 바랬었던 모습 아니었나? 그게 우리들이 한때 원했었던 어른의 모습이었잖아."
"서재호 씨…."
"그러다가 힘들어지면, 사는 것이 지칠 때가 오면 나한테 와. 난……언제나 자네 곁에 있을 걸세. 이번에야말로 자네 곁에 남아서 함께 웃고, 울고, 그러면서 살아갈 거라고. 그러니까……그러니까 제발……제발……떠나지 말아줘. 내가, 자네가 원치 않는 순간에서조차 곁에 남아 있을 테니까. 자네가 날 보지 않았던 순간들에서 내가 자네를 계속 봐왔던 것처럼. 계속, 그렇게……!"
재호는 알고 있었다. 자신은 미정이 바라는 대로 살아가 줄 수 없음을. 홀딱 빠져서 홀라당 타버리는 사랑이라고 했던가. 재호는 그런 사랑이 싫었다. 재호는 서로를 뎁혀줄 수 있는 정도를 좋아했다. 그러나 미정이 바란다면 천천히 태워지는 것 정도는 가능했다. 지금처럼 바다에 잠기고 싶어한다면 몸을 적실 정도는 함께 해줄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이상은, 해줄 수 없었고 하게 냅둘 수도 없었다. 최선을 다해 불을 끌 것이며 있는 힘껏 바다에서 건져올리는 것이 서재호라는 남자였고 그가 오미정에게 주는 사랑이었다.
바다가 울었다. 우웅, 우웅하며 소리높혀 울던 바다는 곧이어 눈물을 토해내듯 붉고 강렬한 것을 바다 저 아래에서부터 띄워냈다. 어둠이 점차 사그라들고 주위가 밝아질 쯤, 재호는 10년 전 어느 날을 떠올렸다. 그때는 여름이었다. 사건이 터져 여름 휴가도 가지 못한 채 바닷가에 현장수사를 와버린 형사들의 원성이 이곳저곳에서 들려오던 날이었다. 그때는 지금보다 모래가 많았고 해벽이 더 가파르게 깎여있었다. 동료 형사들과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재호가 미정에게 말했다. 음습한 것이 살인이 일어나기 아주 좋네. 이에 미정이 답했다. 하지만 저 해벽 위에서 보는 바다는 정말 예뻐요. 한번에 이해하지 못한 얼굴로 재호가 미정을 보면 미정은 한숨을 내쉬었다. 직접 보면 알겠죠, 라며 그의 손을 이끌고 사람들의 눈을 피해 조그만하게 난 길을 따라 해벽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마주한 풍경은 재호가 지금까지도 잊지 못할 정도로 강렬했다.
"……있잖아, 미정이…. 저 해벽 위에서 보는 바다는 정말 예뻐."
과거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그것은 작고 동그란 은방울이 비오는 날 툇마루에서 작게 울리는 것처럼 참으로 밝고 맑은 목소리였다. 봐요, 정말 예쁘죠? 그렇게 말하며 웃는 얼굴은 해를 띄워 세상을 널리 비추는 바다와 하늘을 압도하여서 무심코 숨을 멈췄었다. 이글거리는 태양에 그대로 녹아내릴 것같은 미소를 재호는 절대 잊을 수 없었다. 자신이 살아왔던 모든 순간들을 통틀어 그때가 가장 아름다웠기 때문이었다.
해가 점차 떠오르기 시작했다. 밤의 별을 새겨넣은 검은 융단은 태양에 붉게 물들어져 왕도에 펼쳐지는 붉은 카펫보다 정열적이었다. 바람에 파도가 세차게 일렁이고 차가운 바닷물이 두 사람의 발을 끌고갈 것처럼 강하게 바닷가를 휩쓸었다. 태양은 묵직하게 빛을 비췄다. 그리고 그 빛은 바다를, 마을을, 도시를, 그리고 세상을 향해 나아갔다. 두 사람의 그림자가 빛을 따라 길게 늘어지고 익숙한 이의 얼굴이 조금씩 드러났다. 참으로 많이 변한 얼굴이었다. 그러나 한결같이 사랑스러웠다.
"그렇지만, 여기서 보는 바다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
왜냐하면, 이곳에 자네가 있으니까.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는 완전히 잠겨선 심하게 떨리고 있었지만 그만큼 애절하게 다가왔다. 바로 여기에, 자신의 앞에 있으니까. 그는 바다에 발을 담궜던 그 순간부터 간절하게 빌었었다. 부디 이 망령을 끌고 가지 말아달라고. 죄의 업화에 태워져 재밖에 남지않을 그곳에 아직 이 망령을, 그녀를 끌고 가지 말아달라고 이미 떠나간 이에게 빌었었다.
미정은 재호를 보았다. 생각해보면 자신은 재호를 다시 만난 이후 그의 눈을 제대로 본 적이 없었다. 한결같이 올곧은 그의 눈은 미정을 불편하게 했다. 미정이 감추고 싶어하는 부분들을, 감춰야 된다고 생각하는 부분들을 그대로 들춰낼 것만 같았다. 진한 호박색의 눈동자가 자신을 바라봤다. 그 눈동자 속엔 자신이 있었다. 머리를 한쪽으로 묶어 내린 중년을 앞둔 자신이. 모든 것을 잃었다며 울부짖었던 자신이. 공허함에 금방이라도 삼켜질 것만 같던 자신이 그 안에 담겨있었다. 그 안에 담겨진 자신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멋지고 강인한 여성이었다. 그것이 그저 재호의 소망이 담긴 헛된 망상에 불과한 모습인지, 아니면 있는 그대로의 자신인지 미정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미정은 눈을 돌리지 않았다. 그녀의 깊은 보라빛의 눈동자로 똑바로 직시했다. 실로 오랜만에 시선이 맞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서재호 씨 당신, 한결같네요."
"뭐?"
"한결같이 바보고 한결같이 눈치도 없어. 둔한 점도 하나도 안 변했고 변한 거라곤 다 늙어버린 얼굴 뿐이잖아요."
"관록이라니까 정말……. 에고고, 됐다, 됐어. 계속 말해봐."
미정은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뒤로 넘겼다. 그리고 마주하는 시선 너머의 그의 눈동자를 찬히 바라보았다. 실은 오래 전부터 생각했었다. 진한 호박색의 눈동자가 정의나 진실과 같은 것들을 마주했을 때 붉게 타오르는 것이 마치 태양과 닮았다고. 태양을 눈에 박아 넣을 수 있다면 분명 저런 눈일 거라고 생각해왔었다. 그래서 피했었다. 어느 어두운 부분이든 태양은 그곳을 환하게 밝혀주니까.
하지만 이젠 괜찮다. 자신은 어둠에 안주하며 떠도는 망령이 아니므로. 자신은 오미정이라는 사람이었다. 빛을 원했던 사람이었다. 행복이라는 빛을 원했던 것이다. 그 과정이 크게 비틀려 큰 죄를 지었지만 미정은 행복을 바라고 있었다. 오랫동안 공허했던 이 마음을 달래주고 싶었다. 어쩌면, 쉬고 싶었던 걸지도 모른다. 무리하게 이상적인 삶을 맞춰나간 자신의 눈을 감게 해주고 싶었던 걸수도 있다.
분명 자신은 바라고 있었던 거다. 상일이 자신한테 전화했을 땐 그가 모든 사건을 받아들이고 나름대로의 정리를 끝낸 후, 마치 10년 전처럼의 관계로 전화해줬을 거라고. 복수를 그만두고 예전처럼 웃으며 지낼 수 있을 거라고. 그게 아니어도 좋았지만 그거였으면 하고 바라고 있었다. 빛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그 무엇도 아닌 것을 잡았다는 걸 알았을 때의 절망은 수감되어 있던 나날동안 사무치게 다가와 자신의 목을 죄어왔었다.
그러나 미정은 깨달았다. 부담스러워서, 실망시킬까봐, 이해하지 못할 거니까, 책망받을 게 뻔해서, 그런 이유들을 늘어놓으며 피했던 태양은 단 하루도 빠지지 않고 하늘 위로 떠올라 어둠과도 같은 자신을 비추고 있었음을. 아주 가까이에, 그 태양이 존재하고 있었음을.
아. 이 얼마나 작고 소중한 빛인가. 미정은 재호의 손에서 자신의 손을 빼어 그의 뺨을 가볍게 쓸었다. 깎지 않은 수염이 까끌까끌하게 느껴졌고 젊은 시절 나름 윤기있던 피부는 푸석해져있었다. 완전한 아저씨. 하지만 그렇게 될 동안에도, 그렇게 되고 나서도 자신에게 온 한결같은 사람.
"……당신의 그런 점, 꽤 좋아하는 것 같아요."
미정은 말이 끝남과 동시에 웃었다. 그 미소는 두 사람을 비추는 빛에 동화되어 그대로 사그라들 것같았다.
해는 완전히 떠올랐고 붉은 빛에 집어삼켜질 것같던 하늘에는 광활한 푸른색이 펼쳐졌다. 바다에 반사된 햇빛은 모래알마냥 알알히 부서지며 반짝였고 잔잔히 부는 바람에 파도가 거품을 일며 출렁였다. 어디선가 날아든 새 두마리가 나란히 흐르는 바람결에 날개를 펼치며 자유로이 그 위를 날았다. 무척이나 조용하고, 평화로운, 그런 풍경이 담겨지고 있었다.
기차역으로 돌아갔을 땐 느즈막한 오후였다. 갓내린 커피는 과분할 정도로 뜨거워서 덥기까지 했다. 호호 불어 한모금 들이키면 뜨거운 액체가 목구멍을 자극했다. 이야, 이제 완전 봄이네. 봄. 재호의 말에 미정이 웃었다. 3월인데 당연한 거 아냐? 재호는 툴툴거리며 걸치고 있던 점퍼를 벗었다. 동시에 기차가 들어왔다. 기차가 들어옴과 동시에 철도에 아슬하게 피어있던 민들레가 바람에 휘날려 꽃씨들이 하늘로 흩날렸다. 하이얀 눈과 같은 풍경에 잠시 넋을 잃고 바라보노라면 기차는 어느새 정차하여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돌아갈까. 돌아가죠. 두 사람은 나란히 기차에 올랐다. 기차는 다시 빠른 속도로 철도를 따라 두 사람을 태우고 달리기 시작했다. 창문 밖 풍경을 보던 미정은 그 너머에 비춰진 재호를 발견했다. 뭘 그렇게 봐요? 미정이 물으면 재호는 짐짓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선 그녀를 쳐다봤다. 그러다 대답을 생각하는지 시선을 좌우로 움직이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아냐, 그냥. 응. 그냥. 미정은 재호의 대답에 싱겁다는 듯 고개를 돌려 마저 창문 밖 풍경으로 시선을 옮겼다. 재호는 그런 미정을 보았다. 그리곤 웃었다. 그 미소는 행복이 새어나오는 듯한 미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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