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태현은 커피 향을 맡는다. 은은한 원두 향이 천천히 퍼지고, 카페 내부에 흐르는 클래식은 거슬리지도 않고 부드럽다. 커피잔을 쥔 손을 내려다본다. 계절감에 어울리지 않는 검은 장갑의 움직임은 꽤 자연스럽다. 어색하고 삐그덕거리던 것은 어느 거짓보다 더 진실하도록 보일 정도로 류태현의 시간은 '그날'로부터 끊임없이 멈춤 없이 계속 흘러갔음을 이야기한다. 유
주정재는 쉴 틈이 없었다. 경찰일을 할 때도, 표면적인 업무가 끝나고 나서도 일, 일, 일. 계속 일이었다. 누군가는 저 놈만큼 느긋하고 뻔뻔하게 일하는 놈도 없을 거라는 평가를 내리기도 했지만 본인 앞에서는 말하지 않았고, 그럼에도 주정재의 귀에 그런 말이 들어오는 날이면 네까짓 놈이 내가 하는 일들을 다 아느냐고 속으로 욕을 퍼부어주는 게 일상이었다.
서재호는 삼복을 잘 챙기는 편이 아니었으나 올해는 달랐다. 초복에는 옛 친구 오미정과 함께 들깨삼계탕을 먹었는데, 엊그제 같았던 초복이 지나더니 중복이란다. 양시백이나 권혜연, 홍설희와 함께 몸보신 음식이라도 먹으러 갈까 했는데 다들 시간이 되지 않았다. 삼계탕을 또 먹긴 뭐하고 감자탕 같은 거라도 먹으러 가볼까. 할 참이었다. 집앞에서 가까운 감자탕집에
양시백은 가끔씩 서울을 배회했다. 도장은 여전히 폐업 신세여서 먹고 사는데 지장이 있었지만 그동안 먹어온 세상 물정이 있어서 입 하나 정도는 풀칠하며 살 수 있었다. 넉넉하지 않음에도 겨우 쥐어짜낸 여유를 짧게 만끽한 양시백은 따뜻하진 않지만 춥지도 않은 옷차림으로 도장을 나섰다. 날은 햇빛조차 얼음으로 빚어낸 것처럼 싸늘했지만 개의치 않았다. 그렇다고 해
국회의원 살해 사건. 범인은 과거 서대문 인질극 사건의 피해자이자 박 의원의 부하였던 유 모 씨로 밝혀져... 딸을 잃은 슬픔과 자신을 비리 사실을 잡아낸 일로 박 의원에게 앙심을 품고... "멋대로들 말하는군." 남자는 신문을 접었다. 직접 겪지 못했을 뿐 대강의 이야기는 접했기에 더 살펴볼 필요성을 못 느꼈다. 불쾌하기만 했다. 유상일이 10여 년
...상일이가 죽은지도 어느덧 한달이 지났다. 매정한 노릇일지도 모르지만 어느덧 알게 된 사람들 모두 제자리로 조금씩 돌아가고 있었다. 재호 씨와는 앞으로도 백석을 쫓겠다고 했다. 나 역시 꼭꼭 감춰둔 것들을 풀어내야 할 때라고 생각해 서로들 몸이 나아지면 이야기를 해 보고자 약속을 잡았다. 양시 녀석은 자기가 해야만 하는 일을 찾아낸 상태였고, 권혜연 씨
남자는 형사와 함께 종종 밥을 먹곤 했다. 매일 먹는 것은 아니었고, 일이 있을 때만이었다. 그마저도 점심 쯤이었고 형사의 경우 본 업무로 곧장 복귀해야 하곤 했어서 배를 채웠으니 술을 마시자! 는 상황은 두 사람 사이에서 거의 없는 일과 같았다. 밤에 '일' 이 떨어지지 않는 한에는. 하지만 백반집에서 배를 채우고 나오는 길에 담배를 물며 나오는 상황은
남자는 길을 걸었다. 한없이 익숙한 서울이었지만 때때로 눈에 익지 않은 상황들을 마주할 때마다 전신을 얼음에 댄 듯한 낯설음을 느끼곤 했다. 그것이 불행을 예비하는 종류의 것이라면 경계하거나 마땅히 몸을 사려야 함이 맞으나 그런 종류의 낯설음은 또 아니었다. "은희 씨. 여보. 우리 설희 동생이 무어가 먹고 싶어하는지 알려주시겠소?" "글쎄요. 새큼한 게
"모두...꼭 이래야만 했던 겁니까?" 으득, 남자가 이를 갈았다. 육신의 상처만이 모든 상처를 대변하지는 않는다. 그 점에 입각한다면 이 사람이고, 저 사람이고, 죄다 엉망진창이었다. 죽어가는 자와, 그의 옆에 선 자. 그 이전에 마주 보았던 자들 모두가. 목숨이 아깝지 않느냐는 중년의 말과 함께 철커덕 하는 쇳소리가 강압적으로 눌린 침묵에 울려퍼졌다.
자박. 복도의 침묵을 깨던 걸음소리가 멎었다. 두 소리가 겹쳐진 걸음소리 중 하나가 멎은 셈이었다. 멈추지 않은 걸음소리가 자박자박자박 중간에서 끝까지 계속되었다. 소리가 멎은 곳에서 걸음이 멈추고 끽 문이 열리는 소리가 작게 울렸다. 중첩된 걸음소리가 그 안으로 스며들듯이 끌려들어갔다. "오랜만이지." "..잘, 지내셨어요?" 안경을 쓴 남자는 옅게
남자는 담배에 불을 붙였다. 남자를 아는 누군가가 그 모습을 봤다 해도 말을 붙이기 힘든 분위기에 눈길을 주거나 다가서지 못 하고 등을 돌렸을 것이다. "야, 오늘이 생일이라고 했지?" 주정재는 일할 때 빼고는 남자와 잘 어울리는 편이 아니었다. 일단 대외적으로 형사였기 때문에 제게 맡겨지는 일을 처리해 나가느라 바빴고, 그 일을 할 때에도 서로 맡겨진
-나는, 권현석 경감님의...친구란다. 여자아이는 눈물을 그득 담은 얼굴로 남자를 보다가 고개를 숙였다. 하얀 빗살 섞인 눈물은 희게 흐드러져 볼을 타고 방울져 떨어졌다. 남자는 다른 사람들처럼 무어라 위로의 말조차 건네지 못 했다. 여자아이에게 위로가 되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그런 위로를 겉치레로도 건넬 자격이 없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