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색도시

[재호미정] 친애하는 오미정 님께

당신은 그곳에서 잘 지내고 있나요?

친애하는 오미정님께

안녕하세요. 서재호입니다. 이 인사말 하나를 적는데 많은 시간이 걸렸습니다. 38년이라는 세월 동안 써 본 편지라곤 어버이날에 쓴 편지 말고는 처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것마저 최근에는 쓰지 않게 되었으니 손편지는, 그것도 가족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 쓰는 편지는 실로 오랜만입니다. 그러니 이해해주세요. 이런 익숙하지 않은 말투까지도요.

이곳은 봄이 만연한 4월입니다. 당신이 지내고 있는 그곳은 어떤가요? 여기는 길거리를 돌아다니면 벚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있고 따스한 봄바람이 뺨을 간지럽힙니다. 괜스레 마음이 설레어지는 건 제가 아직 철이 덜 들었기 때문일까요. 당신이 곁에 있다면 분명 그렇게 말해줬겠죠. 그렇다면 전 이렇게 답하겠습니다. 아직 젊어서 그래, 라고. 경멸하는 표정을 짓는 당신이 눈에 선하네요. 이 이상의 농담은 적지 않겠습니다.

10년 전, 현석이 형님의 제안으로 다 같이 꽃구경을 갔던 것을 기억하나요? 저는 어제의 일처럼 생생하게 기억납니다. 사람 많은 곳은 별로라며 굽이굽이 산을 넘어갔던 우린 도시가 한눈에 보이는 작은 산에 자리 잡은 거대한 벚꽃나무 한 그루를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그 벚꽃나무는 아주 크고 우람하여 그 어느 나무보다 풍성한 꽃을 피워내고 있었습니다. 그 향이 어찌나 진했던지 술에 취하지도 않았는데 정신이 멍해져선 그대로 굴러 넘어졌던 것도 기억납니다. 당신은 분명 시끄러울 정도로 크게 웃었죠. 바보냐며 놀렸던 것도 기억나네요. 하지만 결국 넘어진 저를 일으켜 세워 준 사람도 당신이었습니다. 지금 와서 말하는 것도 웃기지만, 고마웠습니다. 

우리가 놀러 갔었던 그 벚꽃나무에 지난주, 설희와 다른 사람들을 데리고 다시 놀러 갔었습니다. 그곳은 여전히 조용했고, 아무도 없었으며 꽃은 10년 동안 더욱 풍성하게 자랐더군요. 한 그루의 나무일 뿐인데도 그것이 풍기는 위엄에 넋이 나갔다가 그대로 넘어져 버렸습니다. 설희가 괜찮냐고 물었었는데 솔직히 쪽팔리더군요. 다음에는 조심해야겠습니다. 이제 넘어지면 허리가 아프기도 하고요.

꽤 괜찮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도시락은 다 같이 준비했었는데 혜연이가 만든 밑반찬이 가장 맛있었던 것 같습니다. 전 주먹밥을 만들었었는데 간단한 음식이어서 그런지 맛도 평범했습니다. 양시백이는...글쎄요. 그런 음식이 나올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소중한 경험이었어요. 두 번 다시는 하고 싶지 않습니다. 

모두 그 시간을 정말 좋아했습니다. 양시백이는 가지고 온 도시락을 까먹기 바빴지만 그 나름대로 경치를 즐겼고, 혜연이는 사진 찍기 바빴습니다. 설희는 꽃구경은 처음이라며 어찌나 들떠있던지 여느 아이들처럼 방긋방긋 웃어 보였습니다. 저 작은 아이에겐 그런 표정이 더 어울립니다. 어딘가에 갇혀 벌벌 떠는 것보다 말이죠. 어때요. 양심의 가책이 느껴집니까? 마음 한구석이 찌릿찌릿하게 울리나요? 그러고 계신다면 많이 반성하고 있는 거겠죠. 더 반성하세요. 당신은 설희가 살아가는 그 모든 시간 동안 반성하고 사과해야 했습니다. 지금까지 죽어갔던 사람들이 했어야 했던 행동입니다. 살아서 반성하고 용서를 비는 것. 우리는 그것을 하지 못해 이렇게 되어버렸네요. 당신도 결국 그러지 못했고요.

갑자기 우울하게 진행해서 놀라셨을까 걱정됩니다. 하지만 막 적는 것은 아니니 안심하세요. 저는 지금 기사를 쓰는 것보다 신중히 적어내려가고 있습니다. 제 생각을 똑바르게 전해드리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끝까지 읽어주세요. 

...10년 전 그때, 정말 즐거웠었죠? 술에 곯아떨어진 현석이 형님, 형님을 말리며 모두를 챙겨주던 도세훈 경사님, 조용히 술을 홀짝이며 경치 구경을 하던 준혁이, 그리고 술 더 가져오라며 고래고래 소리를 치던 당신과 옆에서 술에 취해 노래를 불렀던 저까지. 시끄럽고 대책 없던 순간이었지만 그래도 언제 떠올려도 웃음이 나올 만큼 즐거웠던 시간이었습니다. 당신에게도 그랬을까요? 당신도 문득 떠올리면 가볍게 웃음이 나올 정도로 즐거웠습니까? 그랬었으면 좋겠습니다. 저와 함께했던 순간들 중 단 한순간이라도 당신이 웃을 수 있는 순간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당신과 함께 한 모든 순간들이 좋았습니다. 추운 겨울날 몰래 사 먹었던 따뜻한 캔커피도, 잠입 근무 중에 같이 넘어져 서로를 탓했던 것도, 더위가 기승하던 날 아이스크림 내기를 했던 것도, 그리고 당신이 저에게 가짜 애인을 해달라고 졸라 결국 나가서 망쳐버린 일까지 전부. 전부 좋았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당신을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저, 서재호가 당신, 오미정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이 문장을 쓰는 지금 손에 힘이 들어갑니다. 매일 잡던 펜인데도 어색해지고 수없이 보냈던 나날의 밤 동안 속으로 되새겼던 문장이건늘 긴장되고 두렵습니다. 하지만 전합니다. 당신에게 정확하게 전합니다. 제가 당신을 사랑했다는걸요. 그리고 지금도 당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요.

언제부터였는지는 기억나지 않습니다. 사랑이란 건 생각했던 것보다 복잡한 놈이어서 어느새 정신을 차리고 보니 당신만 보면 심장이 주책없이 뛰었다는 사실만을 보게 만들었습니다. 처음에는 이 감정이 뭔지 몰라 헤매었고 깨닫고 나서는 믿을 수 없어 혼란스러웠습니다. 혼자 술을 먹다 문득 억울해져서 울다가도 저를 데리러 온 당신을 보고 기뻐지는 것을 알게 된 후엔 받아들였습니다. 제가 지독히도 바보 같은 사랑에 빠졌다는 사실을요. 그렇지만 전 당신에게 고백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당신이 바라는 사람이 아니었으니까요. 당신이 바라는 사람과 전 꽤 거리가 멀었고 그런 제가 당신을 행복하게 해줄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미뤘습니다. 그런 사람이 되고 나서 고백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 시기가 왔을 땐 이미 당신은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있더군요. 제가 당신을 사랑했듯 당신은 상일 형님을 사랑했습니다. 왜 눈치채지 못했을까요. 아니. 눈치를 챘었다고 한들 바뀐 것이 있었을까요? 아마 없었을 겁니다. 전 겁쟁이에 주변인이었을 뿐이니까요. 

그래서 당신을 놓쳤나 봅니다. 자신은 그런 사람이라 선을 그어놓고 다가가지 못해 당신을 놓쳤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당신을 버렸습니다. 모두가 떠났을 때 저만큼은 당신을 떠나지 말았어야 했는데 저 자신 하나 챙기는 것도 급급하여 사랑해 마지않는 당신을 고독 속에 가둬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니 저는 당신을 이해합니다. 상일 형님의 연락을 받고 그의 요구를 모두 들어준 당신을 이해합니다. 당신에게 사랑은 그런 것이니까요. 뜨겁다 못해 홀라당 타버리는 사랑을 한다던 당신다운 결정이었습니다. 저는 당신의 선택을 질책하되 당신을 질책하지는 않겠습니다. 당신을 그렇게 만든 것에 저 또한 일조했기 때문입니다. 당신만의 죄라고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전 당신을 이해하고, 또 이해합니다. 이런 제가 당신에게 감히 한 가지 묻고싶은 게 있다면,

당신. 오미정 씨. 

어째서 저를 버리고 떠났나요.

어째서인가요. 당신을 버렸던 것에 대한 복수입니까? 그런 거라면 차라리 억울하지는 않겠습니다. 하지만 아니잖아요. 당신은 그 정도로 저에게 관심이 많지 않았잖아요. 이제 와서 이런 관심, 부담스럽습니다. 도로 가져가세요. 

당신이 저를 버리고 떠난 후 첫날은, 울었습니다. 우는 감각이 생소해 뚝 멈추다가도 밀려오는 슬픔에 결국 다시 울었습니다. 당신만을 위해 울지는 않았습니다만 그래도 당신 때문에 울었습니다. 지칠 때까지 울다 잠들고서 다시 일어나 제가 한 것은 당신에게 전화를 거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역시 신호음만 이어질 뿐 당신은 받지 않았습니다. 늘 있던 일이었는데, 주체할 수 없을 만큼 슬퍼지는 느낌. 당신이 받지 않는 것이 아니라 이젠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알고 싶지 않았는데 알아버렸습니다. 양시백이의 도시락처럼 두 번 다시는 겪고 싶지 않습니다. 

일주일이 지나자 어느 정도 안정을 찾아갔습니다. 그때가 돼서야 전 다른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모두가 저를 걱정해주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잘 알지 못할 겁니다. 당신에게 버려진 저의 감정을 말이죠. 왜냐하면 그들에게 당신은 무슨 과거가 있든 설희를 죽이려고 한 사람이니까요. 그래서 전 괜찮다고 했습니다. 그러기를 바라면서 말이에요. 

한 달이 지났을 땐, 당신의 집에 찾아갔습니다. 임대 중이던 미용실은 작은 옷 가게가 되기 위해 리모델링 중이어서 바로 당신의 집으로 갔습니다. 당신의 집은 생각했던 것만큼 단조로웠습니다. 제 집엔 책이라도 있지 당신의 집엔 정말 필요한 가구들만 있을 뿐 유흥거리가 하나도 없더군요. 그래서 우리들이 찍혀있던 낡은 사진을 발견하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낡은 책상 서랍 안쪽에 있던 사진은 꽤 보존이 잘 되어있었습니다. 당신은, 이 사진 속 시절에 얽매여 있었나요? 어쩐지 씁쓸해지는 기분에 다시 서랍 안쪽에 넣어두었습니다. 그 사진은 얼마 전 집이 팔렸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급하게 가지고 나왔습니다. 편지와 함께 보내드리겠습니다.

다섯 달이 지난 후에야 전 고독이 주는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당신보다는 짧은 시간이었습니다. 저에게는 당신과 다르게 주변 사람들이 많았거든요. 당신에게도 누군가가 있었다면 이렇게까지는 안 되었겠죠. 적어도 함께 파멸을 가고자 하는 마음은 안 들었을 겁니다. 당신이 벼랑 끝까지 내몰렸을 때 곁에 있어주지 못한 점 다시 사과드립니다. 저의 무능함을 용서해주세요. 

그로부터 한 달이라는 시간이 더 지나자 전 제 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었습니다. 저의 슬픔도 마주했고, 당신을 향해있는 제 마음도 다시 확인했습니다. 당신에게 버려져 슬퍼하는 저에게 계속해서 물었습니다. 이제 괜찮냐고 말이에요. 대답은 당연히 아니,입니다. 전혀 괜찮지 않습니다. 누군가를 잃는 슬픔은 그렇게 쉽게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괜찮아지기를 바라고, 그렇다고 주변 사람들에게 말했었기에 이제 전 당신을 보내주려고 합니다. 지독히도 슬픈 제 마음에서 당신을 꺼내주려고 합니다. 저를 버린 당신을 용서하고, 자신의 삶을 버린 당신을 이해하고, 얽매어져 있는 과거에서 보내주려고 합니다. 그래서 전 펜을 들었습니다. 여러 장의 편지지를 샀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편지를 씁니다. 

친애하는 오미정씨. 당신의 모든 삶에 행복이 깃들기를.


  살아가는 모든 시간동안 당신을 사랑할 서재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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