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색도시

[상일재호준혁] 사랑한다고 말해줘요

거짓이어도 좋으니까

짝사랑이란 꿀과 같은 존재여서, 숨이 막히는 것을 알지만 지독히도 달콤한 맛을 잊을 수 없기에 손을 놓을 수 없게 된다. 질척하게 달라붙어오는 사랑하는 사람의 존재가 심장을 죄어 눈물을 흘리게 되어도 결국 놓지 못하는 건, 단 하나, 잊을 수 없는 달콤한 그 맛 하나 때문이다. 달콤한 맛. 예를 들면 가끔씩 쓰다듬어지는 머리, 부드럽게 불리는 이름, 어쩌다가 스친 손, 장난으로 불려지는 사랑한다는 말, 그런 것들. 

언제부터였는지는 생각나지 않는다. 사랑하게 된 계기도 아주 사소한 것이어서 잊어버린 지 오래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것이다. 당신을 만나, 사랑에 빠져, 늘 비어있던 곳을 당신이라는 존재로 채우며 하루 하루를 살아가게 되었다는 것이 분명하고 확실한 사실이다.

답지 않게 환상을 품은 적이 있었다. 혹시라는 수식어에 희망을 심어 제멋대로인 미래를 꿈꾼 것이다. 계절에 상관없이, 그저 날이 좋은 날, 당신에게 사랑한다고 고백하면, 당신은 고개를 끄덕여주는. 둘만이 아는 대화를 나누고, 둘만의 시간을 보내며, 그 시간 속에서 사랑을 나누는. 그런 제멋대로인 미래를 꿈꾸며 잠 못 이루던 나날들이 있었다. 

"나...상일 형님을....좋아하는 것 같아..."

그런 날들은 길지 않게 끝이 났지만.

왜 일찍 눈치채지 못했을까. 나는 지난 날들의 당신을 천천히 떠올렸다. 과거의 장면들은 하나의 영화필름처럼 되감겨 머릿 속에서 재생되었다. 그 모든 장면들을 보고나서야 나는 우리의 시선이 어긋났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내가 늘 당신만 보았듯, 당신은 늘 그 사람만 보았었다. 나를 봐주지 않아도 내가 당신를 보면 되고, 나를 사랑해주지 않아도 내가 당신을 사랑하면 된다는, 그런 안일한 생각이 나의 시야를 차단 시켰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제야 알게 되었다. 내가 또 늦었다는 것을. 후회하기엔 이미 너무 늦은 것이다.

사랑한다고 말해줘요

W.T.HA_RUT_

어둠이 깔린 골목 안. 당신은 술에 잔뜩 취해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미안해. 내가 미안해 준혁이. 나는 그런 당신에게 괜찮다는 말만 오십 번은 넘게 했으나 소용없는 짓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술을 많이 먹이지 않는 것인데. 어쩌다가 이 지경까지 오게 되었나를 생각해보면 기억은 오늘 아침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아침부터 당신은 기분이 몹시 좋아보였다. 평소보다 더 가벼운 몸짓과 더 풀어진 얼굴로 다니는 것이 퍽 귀엽다가도 그러는 이유가 궁금해졌다. 그래서 옥상의 자판기 커피 한 잔으로 시간을 마련해 물어봤다. 오늘따라 기분이 좋아보이십니다, 라고. 그것이 쓸데없는 호기심이었다는 것을 알게된 건 당신의 대답을 듣고 난 후였다.

"그, 그렇게 티가 나? 아, 하하하...아니...그...오늘 아침에 상일 형님이랑 같이 현장근무를 갔는데..."

아. 그래서. 그래서였구나.

뒷이야기는 들을 필요도 없었다. 오히려 듣고싶지 않았다. 하지만 당신은 이런 내 마음을 알 리 없었고 결국 현장에서 있었던 일들에 대해 들뜬 목소리로 얘기해 주었다. 암호를 단번에 풀어서 칭찬을 받았다던가, 신뢰가 간다는 말을 들었다던가, 넘어질 뻔한 걸 막아줬다던가 등등. 그런 일상적이고 사소한 일에 당신은 무엇이 그리도 설레는지 두 뺨이 붉으스레 달아올라 있었다. 만일 당신이 한 그루의 나무고 지금의 기분을 꽃으로 피워낸다면 그 꽃은 분명 취할정도로 달콤한 향을 낼 거라는, 지금 이 순간 당신만큼은 봄이라는 생각이 들만큼 당신은 행복해보였다. 그러나 그런 당신을 보는 나의 계절은 겨울이었고 잔가지에 달린 낙엽마저 떨궈질 정도로 비참해져갔다. 당신이 행복할 수 있어 기쁘면서도 그 상대가 내가 아니라는 것에 그만큼 슬퍼지는 것이다. 그렇다고 눈물을 보일 수는 없으니 결국 나는 그 모든 슬픔과 고통을 삼켜내야했고, 속에서 차오르는 눈물이 발목을 삼키고 허리 아래에서 출렁일 때 비로서 당신의 이야기는 끝이 났다. 

일종의 연애상담이었다. 날이 좋았던 어느 날 작은 목소리로 당신은 내게 고백했다. 상일 선배를 좋아하는 것 같다고. 그 말을 들은 순간 호흡이 멈추고 세상이 하얗게 변하면서 무슨 말을 해야할 지,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 지 몰랐다. 그저 떨리는 목소리를 애써 침착시키며, 좋아한다는 의미를 알고 있음에도 모르는 척 말했다. 상일 선배는 좋은 사람이죠, 라고. 

그래. 그는 좋은 사람이었다. 직급이 높다 하여 그것을 남용하지 않았고 조직에서 생활했어도 살인 한 번 저지르지 않았다. 그는 매시간 생사가 나뉘는 그 지옥같은 곳에서 오직 자신의 딸만을 생각하며 살아남았다. 그리고 마침내 목숨보다 소중한 딸을 품에 안았다. 누구보다 가족을 생각하고 아끼는 사람. 그래서 선배의 자격이 있다 생각했고 그 생각은 지금도 변치 않는다. 그러나 그런 사람이기에 마음대로 탓할 수 없어서, 결국 이 모든 것은 나의 죄라는 생각에 울적한 기분이 좀처럼 나아지지 않는 것이다. 

이제 내려가자. 다 먹은 커피컵을 쓰레기통에 버리던 당신이 말했다. 나는 벤치 위에 올려둔 내 커피를 보았다. 차갑게 식은 커피 안에는 언제 들어가 있었는지 모를 파리 한 마리가 빠져 그대로 익사해 있었다. 날개가 젖어 날지 못한 것인가 아님 커피의 단 맛에 헤어나오지 못한 것인가. 어느 쪽이든 이미 죽어버렸으니 상관없지만. 나는 당신이 보지 않을 때 그 커피를 컵과 함께 그대로 쓰레기통에 버렸다. 속에서 거세게 파도치는 감정들도 함께. 계단을 내려가는 길에 당신이 가볍게 물었다. 다 마셨어? 나도 가볍게 답했다. 네. 파도치던 감정들은 조금씩 잔잔해져 조용한 적막만을 이루었다. 

잔잔했던 수면이 다시 일렁인 것은 점심 시간 직후였다. 

상일 선배는 생각보다 장난끼가 많은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런 선배에게 매번 당하는 건 당신이었다. 당신은 늘 어리숙했으니까. 선배는 그런 당신에게 장난 치는 것을 좋아했다. 

점심 시간 직후에도 그랬다. 선배는 당신에게 장난을 쳤고 당신은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선배가 한 장난은 굉장히 사소하고 동시에 누구에게나 했던 것이었다. 머리를 쓰다듬거나 볼을 잡아당기는, 뭐 그런, 일상적인 행동들이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당신에게 그런 행동들은 결코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들이 아니었고 당신은 당하는 족족 얼굴을 붉히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선배를 말렸다. 그런 모습들을 보고있으니 질척하게 심장을 죄던 감각이 더욱 세지면서 허리 아래서 출렁이던 것이 목 아래까지 차올랐다. 일종의, 질투였다. 그리고 그런 상태인 나를 당신이 건들였다.

평소였으면 그냥 넘겼을 일이었다. 하지만 나는 아침부터 울적한 기분에 빠져 익사하기 직전의 상태였다. 예를 들어, 커피에 빠져있던 파리처럼. 그래서 평소보다 더 예민해져 있었고 당신의 행동 하나하나가 신경쓰였다. 그러던 와중에 당신이 내게 말한 것이다. 내가 준혁이를 사랑해서 그러지. 사랑해서. 사랑. 그 망할 사랑. 당신이 사랑하는 건 상일 선배이면서.

"...거짓말로도 그런 말...제게 말하지 마십시오."

"어, 어?"

"그게 얼마나 사람을 비참하게 하는지 누구보다 잘 아시면서...!!!!"

순간적인 정적. 서 안의 사람들의 시선이 따가웠다. 눈 앞의 당신은 당황한 기색이 여력했다. 흔들리는 눈동자와 함께 갈 곳을 잃은 손이 내 앞에서 멈춰있었다. 놀란 당신은 작은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준혁이...? 그제서야 나는 내가 선을 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 컵이 비었다 한들 다시 담을 수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나는 그 자리에서 바로 가방을 싸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먼저 연락을 취한 건 당신이었다.

[술 한 잔 살게]

딱 그 한 문장이 담긴 메세지를 보고 나니 머릿 속이 복잡하게 얽혔다. 무슨 답장을 보내야 하나. 만나면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하지? 무슨 말을 해야 우린 다시 예전처럼 인사할 수 있는 것일까? 마치 시스템이 고장난 기계가 된 것처럼 나는 한참을 방황하다 겨우 답장을 넣을 수 있었다.

[좋습니다]

[맨날 마시던 가게로 와]

[먼저 드시고 계십시오]

[알았어. 준혁이는 계란찜이지?]

[네]

그리하여 지금 술에 잔뜩 취해선 나를 붙잡고 미안하다고 소리치는 상황에 도달하게 된 것이다. 사실 당신이 미안해할 일은 없었다. 당신은 평소대로 장난을 쳤을 뿐이고 내 쪽에서 멋대로 설레다 지쳐 화가 난 것뿐이었다. 그러니 잘못한 것은 나였다. 생사람에게 화풀이를 한 것이다.

  

"준혁이는 나한테...나한테 얼~~마나!! 잘해줬는데!!! 나는...나는 준혁이를 화나게 만들고...!!!"

잘해줬다고 해봤자 해준 것이라곤 연애상담뿐이었다. 나에게 상일 선배를 좋아한다고 고백한 그 날 이후로 당신은 내게 감정이 복받쳐오르는 날이면 아낌없이 다가와 상담을 받곤 했다. 말이 상담이지 당신의 얘기를 들어준 게 다였다. 아마 당신도 이것을 예상 못했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당신이 그런 이야기를 하는 상대로 날 고른 이유는 단순했다. 입이 무거웠으니까. 단지 그 이유 하나로 나에게 상담을 부탁한 것이다. 나는 거절할 수 있었지만 하지 않았다. 나에게는 당신과 함께 있을 수 있는 시간이 필요했고 당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알고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런 내 판단은 결국 오늘날 이런 상황을 초래했으니 어리석었다고 표현할 수밖에.

골목들을 빠져나와 익숙한 길을 걸으면 가로등 하나가 비춰진 작은 집 대문이 눈에 보였다. 당신의 집이었다. 재호 씨. 도착했습니다. 내 말에 당신은 고개를 들어 집을 확인하고는 방긋 웃어보였다. 역시 준혁이! 이러니까 내가 준혁이를...

"...아. 말하면 안 되지. 응...안 되지..."

저 정신에서도 기억이 나는 것인가. 당신은 검지를 세워 입에 가져다 대었다. 나 이제 진짜 말조심할게. 준혁이 화 안 나게. 그러고 당신은 씨익 웃어보였다. 정말 당신같은 행동이라고 생각했다. 늘 주변에 맞춰주는 사람. 모르고 따르는 나와 다르게 다 알면서도 속으로 삼켜 버티는 사람. 당신은 그런 사람이었고 그래서 늘 그렇게 행동했다. 난 그런 당신이 좋았다. 좋아서, 눈길이 갔고, 계속 보다보니 어느 새 당신을 사랑하고 있었다. 

"...말씀하셔도 상관없습니다."

"어엉?"

"아까는 제가 잘못한 일이었습니다. 재호 씨의 잘못이 아니예요. 그러니까......말해주십시오."

어깨에 걸친 팔이 내려갔다. 당신은 동그랗게 뜬 눈으로 나를 보았다. 노란 가로등 불빛을 받아 밝게 빛나는 두 눈. 그 눈에 늘 내가 담겨있기를 원했었다. 하지만 그럴 일은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있다. 그 눈에 담길 사람은 오직 단 한 사람, 상일 선배 뿐이라는 것도. 내가 오직 당신만을 눈에 담는 것처럼.

짝사랑이란 꿀과 같은 존재여서, 숨이 막히는 것을 알지만 지독히도 달콤한 맛을 잊을 수 없기에 손을 놓을 수 없게 된다. 질척하게 달라붙어오는 사랑하는 사람의 존재가 심장을 죄어 눈물을 흘리게 되어도 결국 놓지 못하는 건, 단 하나, 잊을 수 없는 달콤한 그 맛 하나 때문이다. 예를 들면 장난으로 불려지는 사랑한다는 말같은, 그런 것.

그러니 더욱 집착할 수밖에 없다. 

"......사랑한다고 말해주세요"

그것이 거짓임을 알고 있음에도.

당신은 웃었다. 나와 화해했다고 생각한 것이다. 저 말이, 사랑한다고 말해달라는 그 말이 당신과 나 사이에선 그저 싸우다 화해하는 과정으로밖에 쓰이지 않는 것이 우리 사이가 어떤 것이지 다시금 말해주는 것 같았다. 결국 우리는 어쩔 수 없는 거구나.

당신은 내 손을 잡고 말했다. 사랑해, 준혁이. 천진하고, 투명한 말이었다. 그 속에 담긴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단지 지독히도 단 맛을 낼 뿐이었다. 속에서 아찔하게 울리는 그 맛에 천천히 눈을 감았다 다시 뜨면서 나는 당신의 손을 마주잡았다. 그리고 답했다. 

"저도...사랑합니다, 재호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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