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1212

양시백 생축글

양시백의 수면시간은 대개 10시에서 그 이후로 그 사이에 자기는 하지만 불규칙한 구석이 있었다. 대체로 그렇게 늦게까지 깨어있다 보면 최재석과 야식이나 간식을 주워먹기도 했고 그러다 보면 소화 시킨다고 텔레비전을 보거나 얼마 없는 책을 뒤적여 읽거나 하는 일로 더 늦은 잠을 자곤 했다. 양시백의 경우 이번에는 후자였는데, 조용하던 두 사람이 -최재석은 책상에 앉아있었고, 양태수는 화장실을 막 갔다온 참이었다- 갑자기 도장 밖으로 나갔다 오더니 양시백을 불렀다. 양시백은 화장실 불이라도 깨졌나 싶어 도장 밖으로 나갔다. 도장 불은 켜져있었다.

"어라.."

"시백아, 생일 축하한다."

"아, 내가 날 밝고 나서 하자니까 아저씨가 자정에 따아악 하고 싶다고 조른 거 있지? 자, 어여 와라. 양시. 생일 축하한다!"

양태수가 종이 박스를 하나 들고 있었고 불이 붙은 초가 넘실거렸다.

주변에는 풍선 몇 개가 있었는데, 아이들의 생일을 축하할 때도 쓰이던 바로 그 풍선들이었다.

"아..."

"얌마, 울지 말고."

"아, 안 울었거든요?! 나이가 몇인데.."

"매번 부족함 없이 챙겨주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아빠는 언제나 늘 부족하다는 생각만 했었단다."

"아냐, 매번 너무 고마웠어, 아빠."

"그렇다면 다행이구나."

양태수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고 최재석은 어유, 이거 부자 사이에서 부대끼기 닭살 돋네~ 하며 너스레를 떨었다. 양시백은 너무 애 취급하는 거 아니냐며 농담을 던졌고 곧 훅 불어 초의 불을 모두 껐다. 최재석이 언제 들고 있었는지 폭죽을 펑펑 터트려댔다.

"이거 먹고 자면 밤을 새야할 것 같은데.."

"그렇지. 그러니까 케이크는 아침에 먹자."

"그나저나 제가 일찍 잤으면 어쩌려고 이렇게 준비해놨대요?"

"나도 그 생각을 안 해 본 건 아닌데, 재석이가 그러니까 만반의 준비로 배를 빵빵하게 해 놨다고 자신있게 말하더라고."

"어쩐지 간식 맘껏 먹어도 된다고 하더라니.."

"뭐, 좋은 게 좋은 거지."

"자, 내일 일정은 아침에 생각하고, 일단은 좀 잘까."

"응, 그래."

"양시가 따뜻하게 뎁혀놓은 전기장판 위로들 가자고."

세 사람은 킥킥 웃으며 관장실 안으로 차곡차곡 들어갔다.

***

최근 날씨가 한파 특보가 발령될 만큼 추워졌기 때문에 -난방을 가동하긴 하지만!- 아동반이고 성인반이고 출석률이 낮아서 아예 봄까지 푹 쉬기로 한 참에 올해 양시백의 생일은 아이들과 함께 보내는 것도 아니었고, 성인반 준비를 위해 끼니를 얼른 때우고 부랴부랴 준비하는 그런 바쁜 나날에 속하지도 않았다. 별 할일이 없으면 셋이서 시간 보내는 거야 두말할 것 없었지만 꽤 좀이 쑤셔온 양시백은 한 번 기지개를 켜고는 날씨를 확인했다. 영하 1, 2도 쯤이면 그나마 요즘 날씨 중 그럭저럭으로 푹한 셈이었다.

"아빠, 관장님! 저 잠깐 동네 좀 둘러보고 올게요!"

"저녁 먹을 때까지는 돌아와라, 시백아. 다같이 저녁 먹을 거니까."

"그 때까지 밖에서 무얼 하려고요."

"잘 다녀와라, 양시!"

밥 먹고 디저트로 케이크까지 먹은 양시백은 든든한 배를 툭툭 두드리며 새로이 마련한 겨울 점퍼에 목도리까지 두르고 도장을 나왔다.

***

"욥, 권혜연 씨!"

"양시백 씨, 어쩐 일이에요?"

"별일 있는 건 아니고..그냥 도장 일도 쉬고 하니까 영 지루하고 좀이 쑤셔서 나와봤어요. 일하는데 방해한 건 아니죠?"

"그럼요. 아, 맞다."

권혜연은 잠시만 기다리라고 말하며 경찰서 안으로 들어가더니 몇 분 지나지 않아 무언가를 들고 나왔다.

포장된 작은 상자였다. 그것을 살짝 내려다보다가 양시백에게 내밀었다.

"웬 거래요?"

"웬 거긴요, 오늘 양시백 씨 생일이잖아요."

"마, 말하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그야, 최재석이한테서 들었으니까 그렇지."

언제 나온 것인지, 주정재가 옆에서 말했다.

양시백은 권혜연과 사소한 대화만 해도 따뜻한 눈빛으로 바라보던 주정재가 말을 걸어오니 살짝 긴장했다. 주정재는 쯧 하고 혀를 차더니 습관적으로 담배를 꺼내 피우려다가 권혜연이 있는 것에 다시 집어넣었다. 나중에 주정재가 최재석의 친구라는 사실을 알았지만 -주정재는 극구 부인했다- 영 대하기 어려웠다.

"뭐 그래도 모르는 놈 생일도 아니니 봐 줬다. 양시백이 너 담배는 안 피우냐?"

"저랑 관장님이랑 둘 다 비흡연자인 걸요."

"둘 다 그렇게 안 생겨서 바르게도 사는구만. 아무튼, 나도 딱지 앉게 들어서 오다 주워봤다. 최재석이한테 안부 전해줘라."

"어..감사합니다."

"양시백 씨, 나중에 시간 내서 다른 사람들하고 저녁 같이 먹어요. 오늘은 안 되겠지만..하태성 경위님이 안부 전해달래요."

"하태성이요? 무슨 일이래지..그보다, 선물 고마워요. 생각도 못 했어요."

"다른 사람들 생일은 철썩같이 챙기면서 자기 생일은 허술한 거 알아요?"

"뭐..그럴수도 있죠. 연말이기도 하고."

"나중에 연락할게요!"

"들어가세요, 두 분 다."

둘 다 어떤 것을 선물했는지는 상자의 부피가 작아 알기 어려웠으나 넉넉한 점퍼 주머니에 쏙 들어갔다. 참으로 다행이었다.

***

"안녕하세요...어라, 재호 아저씨도 있네."

"얌마, 양시백이. 아저씨도 있네는 뭐냐?"

"그야, 보통은 준혁 선생님만 계셨는 걸요."

"어서오십시오. 날씨가 추운데 좀 앉았다 가세요."

"헤헤, 감사합니다."

배준혁은 양시백에게 자리에 앉기를 권했고, 양시백은 거절하지 않고 소파에 앉았다.

배준혁이 코코아를 한 잔 타러 가는 동안 양시백은 책상에 놓인 이런저런 종이들을 보았다. 자세히는 알 수 없었지만 대강 누군가의 뒷조사며 의혹이 불거지고 있는 지점에 대한 것들이었다. 흥신소장과 기자의 조합. 정보를 취급한다는 데에선 그리 드문 일도 아니었다. 두 사람이 종종 협력하는 것도 이제는 드물지도 않은 일이었다.

"시백 씨, 달콤한 거 좋아하시면 케이크 같은 것 좀 드시겠습니까?"

"아, 그래도 돼요?"

"저 친구나 나나 단 거 안 좋아하는데 잘 됐지 뭐."

"의뢰인이 감사의 표시로 준 건데, 재호 씨 말대로 저나 재호 씨나 단 걸 잘 안 먹으니까요."

사실은 아침에 이미 생크림 케이크를 한 조각 먹고 왔지만 지금 눈앞에 놓인 건 진한 초콜릿 무스 케이크였다. 맛이 달라서일까, 양시백은 케이크가 잘도 넘어간다고 생각했다. 볼이 동그래지도록 케이크를 얌냠거리고 있는데 서재호가 말을 걸었다.

"그래서, 우리 양시백이는 너구리처럼 케이크만 먹고 있다 가나?"

"뭐, 도와드릴 거 있어요? 저 요즘 도장 일 쉬고 있어서 뭐 시키실 거 있으면 말씀하세요. 저녁 전까지는 돌아갈 거지만.."

"저희끼리 해도 되잖습니까."

"에이, 돕고 싶다잖아, 준혁이. 빨리 다 하고 나서 얘기도 하면 얼마나 좋아."

"그래요, 준혁 선생님. 도와드릴게요."

"음..."

배준혁은 왜 애꿎은 사람에게 떠넘기냐는 듯 서재호를 흘깃 째려보다가 곧 표정을 바꾸었다.

서재호는 휘파람을 불며 딴청을 피웠다.

"알겠습니다. 그거 다 먹으면 말씀하십시오."

***

"..어째 짐이 묘하게 많아지는 기분이.."

점심시간이 되었을 즈음 일이 거진 마무리 되었다. 점심이라도 같이 먹지 않겠냐고 권했지만 양시백은 양심이 있지 어떻게 점심까지 얻어먹느냐며 사양했다. 허나 배준혁은 빈손으로 보내긴 그렇다며 양시백에게 조각 케이크가 든 종이 상자를 들려보냈다.

'아, 생일 축하합니다, 시백 씨.'

'뭐? 양시백이, 오늘이 생일이었어?'

"아니 그보다 나 선생님한테 생일이라고 말 안 했는데..."

서재호는 모르는 것으로 봐서 배준혁이 최재석이나 다른 사람들에게 들은 건 아닌 것 같았다. 양시백은 혹시나 제 점퍼에 화살표로 이 녀석 오늘 생일! 이라고 쓰인 종이가 붙어있는 게 아니라 잠시 확인했다. 물론 없었다. 얼결에 선물을 받고 터덜터덜 도장으로 다시 돌아갔다. 도장 안에는 안을 치우고 닦는 양태수만 있었다.

"다녀왔습니다."

"일찍 왔구나, 밥은?"

"음..준혁 선생님이 이거 주셔서 얻어먹고 왔어. 아빠는?"

"나도 따로 먹었어."

"그나저나 관장님은 어디 외출이라도 한 거야?"

양태수가 막 대답하려는데, 문을 열리더니 냉기와 함께 사람 셋이 나란히 걸어들어왔다.

양시백이 찾던 최재석과 그의 친구 유상일, 손을 잡고 있는 박설희였다.

"어..안녕하세요, 아저씨."

"그래, 안녕."

"설희도 안녕."

"안녕하세요, 시백 오빠, 할...아니, 아저씨도 안녕하세요."

할아버지!

박설희의 말 뒤에 생략된 호칭에 양시백과 양태수는 잠시 쓴웃음을 띄웠다가 곧 표정을 바꾸었다.

"아이고, 우리 설희 왜 이렇게 오랜만에 왔어?"

"헤헤..오빠 생일이라고 해서 놀러오자고 상일 삼촌한테 그랬어요!"

"그랬어? 오빠 생일 축하해주려고? 고마워라, 아, 우리 설희 밥은 먹었어?"

"삼촌이랑 같이 먹었어요."

"그래그래, 아, 도장 추우니까 관장실에 잠깐 들어가 있어."

"네!"

양시백은 박설희를 들여보낸 뒤 최재석에게 눈짓을 줬다.

"관장님, 다른 사람들한테 생일이라고 동네방네 얘기하고 다니면 어떡해요. 부끄럽게시리."

"모르고 지나쳐서 뻘쭘해지는 거보다 미리 알려주는 게 낫지 뭘 그래."

"제가 내년 관장님 생일에 똑같이 해 줄 거에요."

"그래라~"

최재석이 이거저거 사 온 것을 냉장고에 정리하러 간 사이 유상일이 말을 붙였다.

"생일 축하한다. 언제 재석이랑 아버님이랑 같이 놀러와. 아연이가 안부 전해달라고 했어."

"아, 그래요? 하긴 아연이 얼굴 못 본지도 꽤 됐네..언제 시간 되면 같이 밥이라도 먹어요."

"그래서 이렇게 먹으러 왔지. 하교 시간 되면 아연이도 이쪽으로 오라고 하려고."

"이야, 간만에 아연이 얼굴 보겠네. 누구 닮아서 그리 예쁜지.."

"당연히 나지, 누구겠어."

"아이고, 유상일 씨 또 시작했네."

저만치에서 최재석이 대답했다. 양시백과 유상일은 참 귀도 밝지, 하는 눈빛을 주고받았다.

양시백은 유상일이 앉을 만한 자리를 마련하면서 오늘 저녁은 꽤 복작복작하겠거니 생각했다.

***

저녁에는 또 언제 누가 불렀는지 배준혁과 서재호가 유아연과 함께 왔다. 아이들 생일 파티처럼 페트병에 담긴 수많은 음료수들과 과자가 수북했고, 이야기를 좀 나누다가 금세 출출해져서 인원수 따져서 중국집 음식을 잔뜩 시켰다. 양시백의 생일을 위하여! 라는 이상한 건배사가 훅 지나갔다.

"뭔가 생일 별로 진지하게 생각 안 했는데 그래도 생일이라고 여러 사람들이랑 북적북적하게 있는 거 좋네요."

"그치? 잘했지? 자, 양시, 뽀뽀!"

"...관장님, 애도 아니고..."

킥킥 웃던 설희가 쪼르르 달려가 쪽! 하고 최재석의 볼에 뽀뽀를 했다.

최재석은 박설희를 꼭 안고 양시가 다 무어야, 우리 설희가 최고지! 하고 말했다.

"다들 그래도 이렇게 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시백 오빠는 참 안 그럴 것 같으면서도 소심하단 말이에요."

"그게 양시의 매력이지."

"맞아요. 전 그런 오빠가 좋아요."

유아연의 두둔에 유상일이 양시백을 흘끗 보았으나 (양시백은 그것이 권혜연과 같이 있을 때 유독 쌍심지를 켜던 주정재의 모습을 연상케 한다고 생각했다.) 곧 웃어보였다. 그야, 당연히 오랜만에 만난 아는 오빠니까 당연하지. 라고 생각하면서도 양시백은 휴, 하고 짧게 한숨을 쉬었다.

"크리스마스 전이니까 이렇게 모일 수나 있지. 내 다음부터는 안 잊어버리게 주의하지. 양시백이~"

"전 아저씨 생일 외웠는데요."

"어흠, 흠."

서재호가 찡긋 하며 작은 종이 봉투를 내밀었다. 있다가 풀어봐! 하고 슬쩍 안겨주는 게 영락없이 선물의 이름을 뒤집어 쓴 뇌물이다. 하지만 그마저도 즐거웠다. 도장 안은 여러 사람들이 빚어내는 훈훈한 감으로 가득차 있었다. 양태수와 최재석과 함께 셋이서 보내는 것도 좋았지만, 이렇게나 축하받고 이야기 하는 것은 즐거운 일이었다.

"분위기 좋을 때 한 번 더 건배해요, 건배!"

"이번엔 시백이가 건배사 하는 건가?"

"뭘지 궁금하네."

"잘 해봐라, 양시!"

"그, 저...에라이, 모르겠다..모두의 행복을 위하여!"

주스 잔을 들어올리며 외치자 센스 없다! 하지만 너답다! 는 따스한 혹평과 함께 위하여! 라는 소리가 울려퍼졌고 각자 든 잔이 째쟁, 부딪혔다.

축하받고 또 축하받는, 몇 번째인가의 생일날. 양시백은 조금 전 말했던 것처럼 모두가 행복하기를 바라며 제 잔에 담긴 주스를 입으로 가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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