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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호시백
서재호는 가끔 도장 근처를 들를 때면 먹을 걸 사다가 양시백에게 챙겨주곤 했다. 식성도 좋은데 식사를 제대로 챙기지 못 할 것 같다는 생각이 종종 들어서였다. 어느 날 여덟시를 막 넘긴 즈음 이것저것 사서 받아둔 보조 열쇠로 잠긴 도장 문을 열고 들어온 것도 같은 이유였다. 도장 안은 적막한데다 싸늘했고, 불까지 꺼져있어서 도무지 사람 머무는 곳으론 보이지 않았다. 당장은 어디 나갈 곳이 없을 텐데, 하며 한 손에 간식거리가 든 봉투를 들고 관장실 앞에 다가선 서재호는 낮은 목소리, 물기에 젖어 끌리는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관장님..난 대체 왜 이럴까요?"
반보다는 적게 열린 문 안에서 들리는 그 목소리는 누구랄 것도 없이, 양시백의 것이었다. 서재호는 뻣뻣하게 굳어진 양 그저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난..난 그냥, 그냥..관장님이랑 이대로 쭉 살면 괜찮다고 생각했어요. 발전이 없는 거 아니냐고 말한들 괜찮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을 정도로요. 정말, 그거면 됐는데. 나는, 그거면."
어슴푸레한 어둠속에서도 양시백의 어깨가 들썩이며 잘게 떨리는 게 보였다. 울고 있었던 것이다. 욱, 하고 빈틈 투성이인 양손 사이로 틀어막히다 만 북받친 감정이 조각조각 떨어져 관장실 바닥을 때렸다. 감당하기 힘든 슬픔이 기어코 금간 둑처럼 무너지고 터지듯 쏟아졌다. 숨 가쁜 울음소리, 거칠어지다 목이 메어와 으흑, 하는 소리가 이어졌다.
"..언제까지 이래야 돼요?"
눈물 젖은 목소리 속에 가시처럼, 날 선 뼈처럼 박힌 무언가가 서재호를 통째로 꿰뚫었다.
"..언제까지, 나만 이렇게!!"
푹.
무언가 하나 더 그를 비스듬히 꿰뚫을 즈음 서재호는 손에 든 것을 모조리 내팽개치며 관장실 안에 들어섰다. 적잖은 무게를 지닌 것이 바닥에 둔탁하게 떨어지며 마찬가지로 적잖은 소리를 냈다. 양시백은 어둠속에서 양손에 묻었던 얼굴을 들었고, 창백하게 질린 것처럼 희게 보이는 얼굴에 떠오른 감정은 화들짝 놀란 쪽에 가까웠다.
"..양시백이."
서재호가 목소리를 낸 다음에야 상대가 누군지 안 양시백이 입을 열었다.
"가, 가세요."
불도 켜지지 않은 상태에서 양시백은 한사코 손사레를 쳤다.
"보지 마세요. 남 탓 하는 모습 보이고 싶지 않아요. 공감해달라고 하고 싶지도 않아요. 내가 이러는 게, 꼴사납다는 것도 안다고요. 그러니까, 제발 좀!"
서재호는 허공을 수차례 휘젓던 양시백의 손을 잡았다. 잡고는 거기에 끌리기라도 한 것처럼 풀썩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양시백은 손을 뿌리치고는 눈물범벅인 얼굴을 양손으로 몇 번이고 훔쳤다. 하지만 양시백의 마음과는 달리 눈은 고장난 것처럼 새로운 눈물을 죽죽 쏟아내기만 했다. 그 뒤로도 수분이 지난 뒤에야 양시백은 떨리는 한숨을 뱉어내며 긴 눈물의 종지부를 겨우 찍을 수 있었다. 서재호는 여전히 말없이 그 곁에 있어주었다. 그러다 벽에 등을 기대고 웅크리듯 무릎을 감싸고 앉은 양시백의 머리를 짧게 쓰다듬어 주고는 관장실을 나갔다.
가는 건가.
양시백은 그렇게 생각했으나 관장실 밖으로 나갔던 서재호는 바스락 거리는 비닐봉지 -아까 내던졌던 것- 를 들고 다시 들어왔다. 딸깍, 하는 소리와 함께 관장실의 불이 켜졌다. 퉁퉁 부은 게 느껴지는 눈에 양시백은 인상을 찡그렸고, 그 틈에 맺혀있던 작은 물기가 또륵 흘러내리는 것에 눈가를 다시 훔쳤다. 다행히 터진 건 없군. 그렇게 중얼거린 서재호는 관장실 한쪽에 놓인 담요를 바로 펴고 그 위에 앉아 봉투에 담긴 것을 하나하나 꺼냈다.
"..뭐해요?"
"간식 꺼내지."
양시백이 코맹맹이 소리로 묻는 것에 서재호는 짧게 대답했다. 자신이 냉장고에 처박아 둔 캔맥주도 늘어놓고, 과자와 구운 소시지, 삶은 달걀, 떡볶이, 육포 같은 것을 늘어놓는 것이 꼭 집에 자기 혼자 있으니 왕창 군것질 하고야 말겠다는 아이 같았다.
"이리와. 나 혼자 다 못 먹는 거 알잖나."
"제가 먹는 거 좋아하니까 먹는 걸로 꾀는 거에요?"
"비꼬지 말라고. 나도 울어봐서 아는데, 우는 것도 보통 힘드는 일이야. 조금이라도 안 먹어두면 오늘 잠 못 잘 걸. 아니면 내가 가서 먹여줘, 양시백이?"
양시백은 퉁퉁 부은 눈가로 못 들은 척 딴청을 부렸고, 서재호는 자리에서 일어나 담요를 질질 끌어 양시백의 앞에 놓고는 새로운 담요를 꺼내 양시백의 머리와 어깨를 덮었다.
"뭐에요?"
"물 빼고 가만히 있으면 감기 들어."
서재호는 그렇게 말하고 제가 먼저 땅콩을 한 줌 쥐어 아작아작 씹어먹다가 캔맥주를 따서 양시백에게 건넸으나 양시백은 받지 않았다. 콧방귀를 살짝 뀐 서재호는 양시백의 앞에 두고는 새로 캔을 따서 벌컥벌컥 마셨다.
"스스로를 꼴사나워하지 말아."
"......"
"마냥 남 탓하는 것도 좋지 않지만 자기 탓해봤자 자기 마음만 쓰라릴 뿐이라고. 어느 쪽을 택하든 속이 풀린다면 모를까 풀리지도 않잖아."
"..투정 부리는 것 같잖아요."
"왜, 나이 먹을 만큼 먹어서 투정 부리는 것 같은 게 부끄러워?"
"나보다 더 힘든 사람은 곁에도 있잖아요. 설희라거나, 권혜연 씨라거나, 아저씨라거나.."
"누군 가벼운 불행, 누군 무거운 불행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어. 힘든 거 다 아는데 꼭꼭 싸매봤자 오히려 보는 사람들이 더 마음 아파한다는 걸 왜 몰라줘 그래."
"....."
서재호는 과자의 포장지를 양쪽으로 북 찢어 펼친 뒤 집어먹었다. 양시백은 조용히 주전부리에 손을 뻗었다.
***
"잘 자, 양시백이. 앞뜰과 뒷동산에 꿈도 꾸지 말고."
"아직 안 자는데요."
"그럼 깨 있는 거지."
"그런데, 왜 집에 안 가고 여기서 자고 가세요?"
"그렇게 날 내쫓고 싶어하다니 너무하잖아. 뭐, 오늘따라 고슴도치 같은 건 넓은 마음으로 이해해주지. 양고슴도치."
양시백과 서재호는 저녁 식사 겸 야식을 해치우고 이야기를 나누다 -서재호가 여러 말들을 하면 양시백이 침묵하거나 약간 욱한 듯 대답하거나 둘 중 하나였다- 이부자리를 깔았고, 전기 난로를 켠 뒤 나란히 누웠다. 그 뒤로 쭉 서로 한 마디도 안 지려고 투닥거렸지만 분위기는 조용조용했다. 어느 순간 대화가 뚝 끊어졌고, 먼저 등을 돌려 벽을 바라본 건 양시백이었다. 잘 자요. 짧은 인사를 던진 양시백의 팔 위로 서재호의 팔이 조심스레 얹어졌다.
"뭐에요?"
"추워서."
"아저씨가 난로에 더 가깝거든요."
"마음이 추워서 그러지."
"...사람이 가래도 그렇게 안 가고."
"내 마음 뒤숭숭할까 그랬지."
"바보 아저씨."
"그렇게 말하는 자네는 왕 바보게."
"쳇."
그렇게 말하면서도 양시백은 피곤이 몰려와 노곤해지면서 잠이 쏟아지는 것을 느껴 눈을 감았다. 서재호는 몸을 바싹 붙여와 양시백의 등 뒤에서부터 단단히 안았고, 잘 자게, 하고 인사했다. 양시백은 눈을 감고 등을 진 채로 잘게 고개만 끄덕였다. 두 사람은 서로 넉넉찮은 온기를 나누며 천천히 잠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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