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617

생일 자축

양시백이 자고 가는 날이면 서재호는 그렇잖아도 좁은 제 침대를 양시백과 같이 쓰곤 했는데 -절대 내려가서 자는 일은 없었다- 잘 자다가 난데없이 떨어지지 않으려면 틈 없이 꼭 붙어서 자야 했다. 아침 잠 없는 서재호가 이른 아침 눈을 뜨자 덥수룩한 머리카락이 잠결에 뒤엉켜 얼굴을 푹 가린 양시백의 모습이 보였다. 이젠 놀랍지도 않을 만큼 익숙했다. 서재호는 저러다 눈 뜨면 왕창 찔려서 눈이 시뻘개질 거라고 생각하며 중얼거렸다.

"이 가공할 앞머리 어떻게 좀 하자니까는."

'됐어요. 그럼 눈을 가릴 수 없다고요.'

서재호가 함께 머리를 자르러 가자고 했을 때 양시백은 아주 강경히 대답했다.

눈매가 사납기 때문에 시비가 걸리고 거기에 휘말린다. 그것을 조금이나마 방지하기 위해 앞머리를 기른다고 했지만 서재호가 안 얼마 안 되는 시간속에서도 양시백은 잦게 시비에 휘말리곤 했다.

"무엇보다, 가릴 수록 더 사나워 보인다고."

최재석과 함께 찍은 사진 속에서도 양시백의 앞머리는 지금과 꼭 같았는데, 그게 10년 전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도저히 꺾을 수 없는 고집임을 알았다. 서재호는 누굴 닮아 쇠고집인지, 하고 중얼거리며 양시백의 엉킨 앞머리칼을 결을 따라 조심스럽게 넘겼다. 살짝 벌어진 입과 고른 숨소리, 번듯하게 감은 눈은 깨어있을 때와는 또 다른 의미로 반듯했다. 고작 인상이 날카롭다는 점으로 지나쳐 버리기엔 양시백의 됨됨이가 좋았다.

"..하지만 몰라줘도 어쩔 수 없지."

서재호는 상체를 일으킨 뒤 잠든 양시백의 볼에 두어번 입술을 맞췄다.

먼저 깨어 양시백의 얼굴을 찬찬히 살펴보다가 모닝 키스를 하는 건 서재호의 새로운 버릇이 되어가고 있었다. 걷어차이고 젖혀진 이불을 잘 덮어준 뒤 서재호는 부엌으로 나왔다.

"그럼 양시백이가 자는 동안 아침 준비를 해 볼까."

따끈한 밥에, 스팸 한 조각!

별 거 아닌 광고 문구를 중얼거리며 프라이팬을 올리고 가스레인지 불을 땡긴 서재호는 냉장고를 뒤적거렸다. 계란, 스팸, 파, 당근, 양파. 다섯 가지 재료를 모두 잘게 썰어둔 뒤 기름 두른 프라이팬에 양파와 당근, 파부터 볶다가 거의 익을 때쯤 밥과 함께 나머지 재료를 전부 넣고 소금과 후추를 친 뒤 마저 볶았다. 익은 계란이 야들야들하게 일어있고, 냄새도 그럴 듯 했다. 한 숟가락 맛보기로 먹어본 서재호는 냉정하게 볶음밥을 평가했다.

"먹을만 하구만."

서재호는 설거지를 하나라도 줄이기 위해 프라이팬을 그대로 상에 내려놓고는 다른 반찬들을 꺼낸 뒤 양시백을 깨웠다.

"양시백이. 시백이. 밥 먹자. 아저씨가 준비 다 해놨나."

"아우....흠, 깨우지 그랬어요. 준비하는 거 다 들리더만."

"깨우기 미안할 정도로 곤히 자던데 뭘. 여튼, 밥 먹자."

"알았어요."

양시백은 졸린 눈을 깜빡이다가 머리카락에 찔렸는지 앞머리를 한쪽으로 정리하고서야 서재호를 따라나왔다.

"으, 맛있는 냄새."

"아무렴. 누가 했는데."

"잘 먹겠습니다."

프라이팬에 흠집나지 않을 정도로만 가장자리를 긁는 양시백을 본 서재호가 물었다.

"우리 양시백이. 누굴 닮아 이렇게 잘 먹는지 몰라."

"재호 아저씨 닮았나보죠."

"어이쿠, 다른 걸 닮아주지 그래?"

"담배는 무리고, 밤새는 건 더 무리에요. 그냥 아저씨가 제 식성을 닮아주지 그래요?"

"어차피 밥 먹는 총량은 같을 텐데 귀찮게 뭘 나눠."

능청스러운 대화들이 오가고 프라이팬 안의 볶음밥이 거의 사라졌을 때쯤 양시백이 물었다.

"아저씨, 오늘 뭐 특별한 일정 있어요?"

"딱히 없어."

"그럼 저..그..데이트 하러 가요."

"좋아."

"왠일이래요? 이렇게 빨리 결정하시고."

"둘이서 느~긋하게 방바닥을 긁는 것도 나쁘진 않지만 사람이 바깥바람도 좀 쐬고 그래야지."

이 아저씨가 무슨 바람이 불었지? 마감 후 해탈의 영향인가? 양시백은 제가 제안했음에도 즉답해 받아들인 서재호의 신기해 고개를 갸우뚱했으나 봄바람 부는 듯 기분 좋아 보이는 서재호의 속내를 알 길이 없었다.

***

때 빼고 광 낸 뒤 -별로 달라진 건 없었지만- 집을 나온 서재호와 양시백은 근처 지하상가로 향했다.

계절도 바뀌었겠다 적당히 입을 만한 옷들을 살 요량으로 들른 것이었다.

"어때요?"

"내가 보기엔 괜찮은데. 자넨 어때?"

"불편하지도 않고 감촉도 좋고, 그래요."

"그럼 그걸로 하지. 아, 그냥 그거 입고 가자고."

"그럴까요?"

"그래."

양시백은 새 옷으로 갈아입고 원래 입었던 옷은 점원에게 받은 종이봉투에 담았다.

갈아입는 도중에 눈이 숱하게 찔렸던지라 옷가게 직원으로부터 실삔 두 개를 받아 머리를 넘기지는 않고, 한쪽으로 잘 모아 삔으로 고정해서 눈을 찌르는 일은 막았다.

"새 옷 입으니 거짓말 조금 보태서 사춘기 소년 같네, 양시백이, 옷이 날개야."

"누가 믿는다고 그래요, 허참."

"좋으면서."

"물론, 당연히 좋죠."

"못 말려, 못 말려."

"이렇게 된 거 저도 나중에 아저씨 옷 한 벌 사 드려야지. 그 왜, 늘 입는 점퍼요."

"뭐야, 당장 사 주고 싶을 만큼 낡아보여?"

"저도 한 벌 해 드리고 싶은 거지 그닥 낡아보이진 않는데요. 꽤 세월 물 먹었나 보죠?"

"언론의 황야를 함께해 온 유서 깊은 점퍼지."

"그 점퍼도 10년을 묵었다는 건가요?"

"못 된 말 하는 게 요 입이야, 요 볼이야, 응?"

서재호는 장난스레 양시백의 볼을 꼬집었고 쫀쫀히 늘어난 양시백은 볼이 잡아당겨지면서도 킥킥 웃었다. 양시백은 다른 손에 입고 있었던 옷이 든 종이봉투를 들고 한두 걸음 앞서고 있었는데, 서재호는 그 뒤를 따라붙으며 몇 사람의 시선이 양시백에게 머무르는 것을 느꼈다. 평소보다 기분 좋아보이는 웃음에 새 옷을 입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날카로워보이는 인상보다 물렁하고, 생각 이상으로 사람이 좋다. 또, 그 이면으론 상상하기 어려울 만큼 상처도 많이 지니고 있다. 처음 보는 사람들로서는 그런 사실들을 알 수 없겠지. 당연하다고 생각해 씁쓸하면서도 저와 권혜연, 홍설희는 그런 사실들을 알고 있다는 것에 다행이라는 마음이 들었다. 위로하지 못 해도, 알아주는 것만으로도 위로받는 양시백이기에.

지하상가를 빠져나오니 시간이 낮에 가까워지면서 햇살이 여름에 무르익고 있었다. 선선한 바람이 훅 지나가는 것에 양시백은 손등으로 이마를 작게 훔친 뒤 서재호를 바라보았다. 입구 앞 아이스크림 집을 발견한 양시백이 눈짓했다.

"저기 아이스크림 어때요? 제가 살게요."

"좋아."

양시백은 초코칩 박힌 딸기맛에 녹차맛, 서재호는 바닐라에 아몬드 박힌 커피맛 아이스크림 콘을 먹으며 산책 겸 시간 죽이기 좋은 공원을 향해 걸었다. 제 옆을 둘러보던 양시백이 뾰로통하게 말했다.

"아저씨, 왜 그렇게 떨어져 걸어요. 같이 걸어요, 같이."

"우리 시백이가 빨리 걸었지. 이 아저씨를 두고. 젊은 사람 걸음걸이를 어떻게 따라잡겠어."

"크흠, 그럼 손 잡을래요?"

"손이 안 비었는데?"

서재호는 장난스레 아이스크림 하나를 베어물며 말했고 양시백은 제가 아이스크림과 종이봉투를 양손에 나눠쥐고 있다는 걸 깨닫고는 흠, 하다가 아이스크림을 입으로 살짝 물고 종이봉투를 오른팔 아래로 끼운 뒤 도로 아이스크림을 쥐고 왼손을 내밀었다.

"됐죠?"

"너무 귀여우면 아저씨 가슴에 안 좋다, 양시백이."

"으, 닭살!"

부끄러워하는 표정이 닭살 돋아도 좋기는 좋다는 표정이라, 서재호는 놀리면서도 내심 기분이 좋았다.

***

두 사람은 아이스크림을 다 먹고도 한참 뒤에야 목적지로 삼았던 공원에 도착했다. 예상했던 것보다 공원 내에 사람은 많지 않았다. 꽃 피는 봄도 아니고, 단풍 지는 가을도 아니라지만 날씨 좋은 여름이니 가족 단위로 나들이 올 법도 한데 아무래도 햇빛이 꽤 따가워 외출을 삼가하기 때문인 것으로 보였다. 서재호는 그 상황을 한 마디로 정리했다.

"공원 전세 낸 기분이구만."

"명쾌한 말씀."

서재호와 양시백은 나무 그늘 진 길을 쭉 걸어보다가 분수대 옆에 앉아 톡톡 튀는 작은 물기를 맞기도 했다. 또 공원 시설 안내 표지판을 따라 자그마한 2층 전망대에 올라가 공원의 트인 경치도 휘 둘러보았다. 양시백은 2층 난간에 팔을 기댄 채로 말했다.

"다음엔 설희랑 권혜연 씨랑도 같이 와 봐요."

"그래야지. 지금보다는 사람이 많겠지만."

"아저씨, 아저씨. 여기 봐봐요. 여기."

양시백이 손짓하는 것에 서재호는 뭐 특별한 게 있나 싶어 그 옆으로 다가가 아래쪽을 내려다보았다.

키들거리는 웃음소리와 함께 양시백이 볼에 작게 뽀뽀하고는 살짝 떨어졌다.

"이런, 얕은 수에 낚였구만."

"저기 보라곤 안 한 걸요. 얕은 수는 뭘."

"볼 뽀뽀로는 아쉬운데."

마주 본 채로 서재호는 고개를 까딱였고, 양시백은 주위를 둘러보다가 눈을 감고 입술을 맞춰왔다. 서재호 역시 양시백을 안아주며 눈을 감았다. 햇빛 맞으며 나누는 입맞춤은 책 냄새와 서로의 체취를 맡으며 나누던 것과는 또 달랐다. 달은 숨소리, 맞닿은 머리카락이 눈가를 살랑거리며 간질이는 것에 서재호는 새삼스레 자기가 두근거리고 있음을 깨달았다. 양시백 또한 저처럼 두근거려할지는 알 수 없었지만. 바람 불어오는 것에 열기가 다소 누그러지며 닿았던 입술이 떨어졌다.

"얼굴 빨개졌다."

"아, 아저씨도 그렇거든요?"

"날씨가 더워서 그래. 날씨가."

서로 딴청부리다가 파핫,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좋아해요."

양시백이 햇빛 머금은 얼굴로 서재호를 보며 말했다.

"응. 나도 좋아해."

서재호 역시 딴청부리지 않고 똑같이 말해주었다.

정말로, 좋은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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