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617
자축글/재호+시백
자네, 루프라는 말을 알고 있는가?
루프요?
계속해서 반복된다는 뜻이지.
1
마지막 날에는 비가 세차게 내렸다. 서재호도, 양시백도 침묵한 채 내리는 비를 우산도 없이 맞고 있었다. 백석 빌딩 앞이었다. 그들은 자신이 듣고 만 소리에 못 박힌 것처럼 허망한 눈으로 가만히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눈을 찔러드는 빗방울에 때때로 시야가 가려지고 바로 옆이 아니면 소리조차 파묻혀버릴 것 같은 빗발 사이, 아니 그보다 더 높고 먼 너머에서 총성이 두 번, 터져나왔다. 번개가 친들 그렇게 세차게 울릴 수 있었을까, 번개라 한들 시간을 앞다투어 달리던 두 사람을 가만히 붙잡아 놓을 수 있었을까.
실패다. 펜트하우스 진입이라는 그들의 목표는 두 번의 총성 아래 모래성처럼 스러졌다. 총성이 터진 이상 애써 경비원을 따돌리고 펜트하우스로 돌입해봤자 산 사람은 한 명도 없다는 것을 두 사람 모두 알고 있었다. 그렇다. 둘 모두, 알고 있었다.
"실패했군."
서재호의 목소리는 덤덤했으나, 그 눈빛과 표정에서 묻어나오는 허망함은 감출 수가 없었다. 그 얼굴을 바라보는 양시백 역시 비슷한 얼굴을 하고 있을 것이다. 양시백은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렸다. 빗물에 젖고 엉키어 마구잡이로 들러붙은 제 머리카락 때문에 이미 시야는 반쯤 가려져 있었다. 뜨거운 눈물이 눈꺼풀을 비집고 나와 손바닥을 적셨다. 이미 젖은 빗물이 섞여 눈물은 빠르게 식었다.
"예...실패했어요."
...이번에도.
두 사람에게 이번 경우는 처음이 아니었음에도, 양시백은 이번 경우와 같은 끝을 맞이할 때마다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2
처음은 양시백이었다.
그 저주스러운 두 번의 총성. 그 총성이 터짐과 동시에 정신을 잃었던 양시백은 다소의 시간이 흐른 뒤에야 눈을 겨우 뜰 수 있었다. 그리고 눈을 다시 떴을 때 펜트하우스에 살아있는 사람이 오로지 자신뿐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조금 전까지 언성을 높이며 이야기를 나눴던 자들이었다. 이제는 조금의 생기도 느껴지지 않는 조용하고 창백한 얼굴들.
"으윽...!!"
욱신거리는 다리의 통증이 하염없이 멍해지려는 양시백의 정신을 일깨웠다.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자 펜트하우스의 창 너머로 세찬 비가 내리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그 중 단 하나. 단 하나의 유리창이 새하얗게 빛나고 있는 것도 볼 수 있었다. 마치 전혀 다른 곳으로 갈 수 있는 문처럼, 조악한 비유이자 바람이었지만 저 너머로 향한다면 천국에 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가 됐든 지금의 이 상황보다는 훨씬 나을지 모른다. 양시백은 그 빛나는 곳으로 발을 내디뎠다.
당연하게도, 천국은 없었다. 오직 3일 전의 도시가 양시백을 맞이해줬을 뿐이었다.
보증 빚에 쫓기고 쫓겨 공사현장까지 몰리다 3일 안에 일을 해결하라 강요 받고, 밤이 지나고 날이 밝아 아이와 손을 잡은 깊은 눈의 유괴범과 다시 한번 마주쳤다. 되돌릴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게 아닐까. 어쩌면 누구도 죽지 않을 수 있었던 게 아닐까. 그러지 않고서야. 양시백은 제가 어떻게 3일 전으로 돌아온 거냐는 의문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저 정말 되돌아왔고 일이 제가 아는 대로 흘러간다면 최대한 사람이 죽어나가는 일만큼은 막고 싶었다.
그러나 어딘가 이상했다.
권혜연, 배준혁과 처음 마주쳤던 임대 건물 안. 이경환은 다시금 죽어있었고, 양시백은 자신의 결백을 주장해야 했다. 양시백은 배준혁을 흘끗 보았으나, 배준혁은 자신을 두둔해주지 않았다. 양시백은 일주일 남짓 보호소에 붙들려 있어야 했고, 첫 기회는 손가락 사이로 모래 빠져나가듯 허망하게 실패하고 말았다.
3
처음 3일 전의 도시로 되돌아갔을 때 배준혁이 자신을 구해주지 않은 것은 약과였다. 양시백은 도장 근처에서 기절했다가 꺠어난 자신을 붙잡고 서에 동행해달라고 요청한 권혜연과, 백석 빌딩에 잠입한다는 연락 하나 없이 그날부로 사라져버린 권혜연의 끝을 보았다. 때로는 김주황과 몸싸움을 하다가, 때로는 허건오의 칼날에 눈 먼 듯 목숨을 잃기도 했었다. 큰 줄기는 비슷했으나 되돌아가기를 거듭할수록 양시백이 세세히 알고 있던 3일을 벗어나고 있었다.
"....자네!"
"왁!"
공장에서 다같이 연행된 뒤 겨우 빠져나온 참이었다. 뒤이어 나온 서재호가 언성을 양시백의 손목을 휙 움켜잡았다. 이 아저씨가 또 왜 이래?! 놀라워할 새 없이 배준혁이 성중경찰서를 나왔다. 또 무슨 일이냐는 배준혁의 물음이 입 밖으로 나오기도 전에 서재호가 먼저 선수를 쳤다.
"아, 기자일 하면서 아는 얼굴이라. 미안하지만 잠시 빌려가겠네."
서재호는 대답을 듣지도 않고 양시백의 손목을 잡은 팔을 끌어당겨 성중경찰서 정문에서 멀찍히 떨어진 담으로 향했다.
"뭐, 뭐예요, 아저씨!"
"양시백이. 나야."
"...어떻게 제 이름을..?"
"내가 '왜 나는 아저씨고 준혁이는 선생님이냐.' 고 따졌던 거, 기억 나?"
"....재호, 아저씨?"
"그래. 나야. 같이 조용호네 간 적 있잖아?"
"어. 어떻게 된 거예요? 내가 난줄은 어떻게 알았고요?"
"자네 하는 폼이 영 이상해서 찔러본 거야. 내가 왜, 어떻게 며칠 전으로 돌아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양시백은 저뿐만 아니라 서재호도 3일 전으로 되돌아왔다고 생각하니 정문 안에서 기다리고 있을 배준혁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일이 있었다.
"..일단은, 조용호에게 가봐야 해요."
"그래. 그 일이 있었지."
"..재호 아저씨가 선생님이 단독으로 나서지 않게 잘 좀 나서주세요."
"무슨 뜻이지?"
"여기서 말하긴 그래요. 선생님도 기다리고 있고."
"좋아, 일단 나가자고."
서재호와 양시백은 기다리던 배준혁과 합류해 기자 일하다가 인연이 생겨났다고 대강 둘러댔다. 배준혁은 더 묻지 않고 앞으로 어떻게 행동할 지 이야기를 나눴고, 세 사람은 조용호의 집으로 향했다.
***
똑똑똑.
"아무도 안 계십니까?"
목소리를 돋워 문을 두드리면서도 양시백은 침을 삼켰다. 세 사람이 집에 방문하는 족족, 조용호는 목숨을 잃었다. 범인은 늘 한결같았다. 한결같이 집을 불바다로 만들고, 단시간 내 급소를 찔러 조용호의 목숨을 앗아갔다.
"..틀렸어요. 아무도 없는 것 같습니다."
"이 자식, 이경환과 고상만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건가..."
"..락픽으로도 열 수 없는 문이군요. 어디로 갔는지 단서 하나 없는 이상 지금 바로 움직이는 건 무리입니다."
"시간도 늦었고..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날이 밝고 움직이는 게 좋겠어요."
"그게 낫겠습니다. 저도 지병 때문에 시간마다 먹어야 하는 약이 조금..필요해서요."
"연락처 교환들은 아까 했으니 각자 집에서 휴식 취하고 날이 밝고 모이자고."
"좋습니다."
세 사람은 큰 길가에서 각각 헤어졌다. 정확히는 배준혁이 지하철 역사 안으로 들어가고 얼마 정도의 시간이 지난 뒤 양시백과 서재호는 서로 다른 출구에서 나와서 마주했다.
4
서재호는 집문이 열려있지는 않은지, 누군가 침입해 들어온 흔적이 없는지 재차 살핀 뒤 양시백과 집안으로 들어갔다. 서재호는 제 옷을 걸어놓고 늘 앉던 제 자리에 않아 양시백에게 자초지종 설명을 요구했다. 양시백도 옷을 잠시 벗어두고 빈 자리에 앉았다.
"...그렇게 된 거예요."
살인 사건의 범인. 범인으로서의 행적. 그 이유. 결과.
양시백이 어떤 결말을 맞이했고 어떻게 이 3일 전의 도시로 돌아올 수 있는지, 그리고 지금까지 몇 번을 반복했고 몇 번의 끝이 있었는지 모조리 이야기했다.
"양시백이는 7번째라고 했나?"
"네."
"..나는 이번이 첫 번째야. 내 기억은...범인인 준혁이가 내 뒤통수를 갈겼을 때가 마지막이어서 자네가 보았다는 하얗게 빛나는 문 같은 건 본 적 없어."
"어떻게 하면 선생님을 막을 수 있을지...잘 모르겠어요. 수정이는 유상일의 목표가 아니라고, 진짜 목표는 따로 있다고 말해줘도 믿질 않았어요."
"..죽었나?"
"..네."
살인사건을 저지른 배준혁을 막으려면 공권력 또는 그에 준하는 힘 -그를 억누르기 위해서- 또는 그 자신의 자발적인 단념이 필요했다. 경찰도, 태흥용역도 결국 박근태와 이어져 있으므로 양시백이 선택할 수 있는 건 후자밖에 없었다. 유상일의 진짜 목표는 박수정이 아닌 홍설희다. 양시백이 아닌 유상일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면 믿어줬을 것이다. 그때처럼. 하지만 그리되면 겪은 바 있는 비극이 재현될 뿐이었다. 두 번째일까, 세 번째일까, 금기임을 알면서도 그 사실을 직접 발설했고, 발설 후 시작점이자 반환점으로 되돌아왔을 뿐이었다.
"조용호가 한 발 일찍 떠난 게 다행일지도 모르지."
"선생님이라면..자신의 힘 닿는 곳까지 알아내서 해하려 들지도 몰라요."
"그럴지도 모르지..하지만 상일 형님을 쫓지 않을 수도 없잖은가."
"......"
"양시백이는, 일단 관장님만 생각하라고."
"...하핫, 아저씨가 있어서 다행이에요. 이렇게 머리 맞대고 같이 고민할 수 있어서 얼마나..."
양시백은 말을 잇지 못하고 눈물을 쏟고 말았다.
제발 믿어달라고. 회한에 잠겨 죽음을 맞이했던 당신을 위한 거라고, 더 돌이킬 수 없게 되지 않도록 지금의 말을 들어달라고. 솔직하게도 말해보고, 돌려서도 권해보고, 암악하며 애를 쓰고 부던히 노력을 해도 수포로 돌아갔던 노력들이었다. 더는 이해받길 원하지도 않게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옆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함께 대책을 생각하는 사람의 존재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간의 노고가 아주 조금은 보상받은 듯한 기분을 느꼈다. 이제는 혼자가 아니라 서재호도 곁에 있으니 어쩌면, 정말로 무언가를 크게 바꿀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느꼈다.
1
마지막 날에는 비가 세차게 내렸다. 서재호도, 양시백도 침묵한 채 내리는 비를 우산도 없이 맞고 있었다. 백석 빌딩 앞이었다. 그들은 자신이 듣고 만 소리에 못 박힌 것처럼 허망한 눈으로 가만히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눈을 찔러드는 빗방울에 때때로 시야가 가려지고 바로 옆이 아니면 소리조차 파묻혀버릴 것 같은 빗발 사이, 아니 그보다 더 높고 먼 너머에서 총성이 두 번, 터져나왔다. 번개가 친들 그렇게 세차게 울릴 수 있었을까, 번개라 한들 시간을 앞다투어 달리던 두 사람을 가만히 붙잡아 놓을 수 있었을까.
실패다. 펜트하우스 진입이라는 그들의 목표는 두 번의 총성 아래 모래성처럼 스러졌다. 총성이 터진 이상 애써 경비원을 따돌리고 펜트하우스로 돌입해봤자 산 사람은 한 명도 없다는 것을 두 사람 모두 알고 있었다. 그렇다. 둘 모두, 알고 있었다.
"실패했군."
서재호의 목소리는 덤덤했으나, 그 눈빛과 표정에서 묻어나오는 허망함은 감출 수가 없었다. 그 얼굴을 바라보는 양시백 역시 비슷한 얼굴을 하고 있을 것이다. 양시백은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렸다. 빗물에 젖고 엉키어 마구잡이로 들러붙은 제 머리카락 때문에 이미 시야는 반쯤 가려져 있었다. 뜨거운 눈물이 눈꺼풀을 비집고 나와 손바닥을 적셨다. 이미 젖은 빗물이 섞여 눈물은 빠르게 식었다.
"예...실패했어요."
...이번에도.
두 사람에게 이번 경우는 처음이 아니었음에도, 양시백은 이번 경우와 같은 끝을 맞이할 때마다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양시백이 소리 죽여 흐느끼는 것을 들으며, 서재호는 어쩌면 저 가엾은 양시백을 혼자 놓아두지 않기 위해 추가로 휘말리게 된 게 아닐까 생각했다. 그러지 않고서야- 시선을 멀리 둘 필요도 없었다. 먼발치에서 끊임없이 불타는 듯 새하얗게 빛나는 문이 보였다. 서재호는 본 적 없던, 3일 전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해준다는 그 문이었다. 양시백은 서럽게 울었다. 다시 처음부터 노력해야 한다는 절망이 아니었다. 고작 그런 절망 따위가 아니었다. 서재호는 양시백에게 다가가 그 등을 토닥이며 위로를 건넸다.
"...다음에는 분명 잘 할 수 있을 거야. 나도 있으니까."
이미 실패한 주제에 부질없는 말이었다.
양시백에게는 8번째, 서재호에게는 2번째가 될 3일 전의 도시가 문 너머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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