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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랍했던 정재석

찬거리를 사 들고 도장으로 돌아가던 중이었다.

누군가 골목 안쪽에서 이름을 부르며 불러 세우는 것에 멈춰 서서 골목 안을 바라보았다.

안은 가로등의 불빛이 닿지 않아 어둡기 그지없었다.

“최재석.”

잘못 들은 것인지 다시금 고개를 갸우뚱 할 때쯤 다시금 이름이 불린다.

남자의 목소리였다. 발걸음 소리와 함께 천천히 걸어 나온 것은 남자였다. 낯이 익었다.

“깜짝 놀랐어?”

기억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소개하기 전까지는 떠올릴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저 한 마디에 기억이 났다. 하지만 그 때문에 오히려 놀라웠다. 오랜만에 만났다고 반가워할 만한 사이도, 그리움을 느낄 만큼 애틋한 사이도, 하물며 친구라고 스스럼없이 부를 만한 사이도 아니었으니까.

***

“야, 엉님한테 술 좀 꽉꽉 눌러 따라봐.”

왁자지껄하게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주정재, 라고 했던 거 같다. 황도준 사건 때 마주쳤다가 다리 부상으로 한동안 침대 신세를 면치 못 할 거라고 들었는데 이번 회식자리에는 용케 얼굴을 비췄다. 기절했던 정은창에게 감사 인사를 건넸던 거에 비해서 저 녀석에게는 감사의 말을 한 톨도 건네지 못 했다. 마음에 걸리는 건 내버려 두지 않는 성격이라 채워져 있던 잔을 비우고 주정재가 있는 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여, 다 나았어?”

“앙?”

“다리 말야. 다쳤었잖아?”

“다 나았으니까 술 마시러 왔지. 왜, 두드려 보기라도 하게?”

“두드릴 생각은 없고, 한 잔 주려고 왔으니까 날 좀 그만 세워.”

날을 세운다는 것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한 잔 주려고 왔다는 거? 녹색 띤 눈이 살짝 가늘어졌다가 씩 웃었다.

그리곤 제 옆에 있던 녀석을 슬쩍 손짓해 밀어내곤 자리를 만들어냈다. 눈짓 하는 폼이 옆에 앉으라는 의미였다.

사양 않고 옆에 앉아서 가까이에 닿는 맥주병을 집어 들었다.

“그거 말고, 저거.”

“네, 네.”

안 가릴 거 같이 생겼으면서 맥주 말고 소주 달라는 녀석에게 얌전히 소주병을 집어 잔에 따랐다. 한 잔 시원하게 원샷을 한 녀석이 크아, 하는 소리를 내곤 빈 잔을 흔들었다. 잘도 마신다며 한 잔 더 따라주는데 내 손에 들린 걸 슥 빼내더니 말했다.

“따라주는 사람 내비두고 혼자 마시는 건 예의가 아니지.”

“호, 따라주게?”

“그럼 얼굴에 퍼부으리?”

“…말 참 예쁘게 한다.”

“그게 내 아이덴티티지. 잘 안 따라주니까 흘리지 말고 받아.”

애들한테 잘만 따라주더만. 새 잔을 가져다가 내 앞에 두고 소주를 따라주더니 건배하자는 시늉을 해서 꿍얼거리는 걸 멈추고 잔을 부딪쳤다.

눈앞에 소주병들이 나뒹굴고 있기 때문인지 그걸 반사하는 녀석의 눈이 한층 더 진하게 반짝이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러려니 하고 넘겼다.

“저기.”

“뭐, 술 달라고?”

“아니, 그, 지난번 황도준이 왔을 때 너한테도 고맙다고 말했어야 했는데…타이밍이 영 안 좋아서 말을 못 했다.”

“구구절절한 앞뒤 자르고 본론만. 그래서?”

“…고맙다고.”

“그래? 그 감사한 마음, 술 한 잔 따라줬다고 끝낼 건 아니지?”

“뭐, 일단은…?”

밥이라도 사란 건가. 그 뒤로는 별 말이 없었다.

주위의 다른 녀석들과 말이며 술이며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는데, 옆에 있던 녀석이 갑작스레 말을 붙였다.

얼굴이 낯설지 않았다. 왜 선진화파에 들어왔나 알 수 없을 정도로 붙임성 있게 구는 녀석이었다.

“재석 형님, 많이 드셔도 괜찮으십니까? 술도 못 하시면서…….”

“괜찮아, 괜찮아~! 나 아직 안 취했어!”

“숙소까지 부축해 드리는 건 저희잖습니까. 지난번에도…….”

얼마 전에 상일이에게 부축 받아서 온 거 때문에 그런가. 아니, 그 전에 회식 장소에서 이 녀석한테 부축을 많이 받았던 거 같기도 하고. 답지 않게 울상인 녀석의 반응에 어쩐지 멋쩍어 얼굴을 긁적이는데 옆에 있던 주정재 녀석이 깨끗이 비운 잔을 쿵 소리 나게 내려놓으며 한 마디 툭 던졌다.

“야, 본인이 마신다는데 술맛 떨어지게 이래라 저래라야?”

“그…기분 상하셨다면 죄송합니다, 정재 형님.”

“야, 애가 걱정해 주는데 말을 그런 식으로 하냐? 감정 있냐?”

“애 같은 소리 하네. 이렇게 큰 애 본 적 있냐?”

“내 발로 잘 들어가면 되는 내 문제 가지고 애꿎은 사람한테 뭐라고 하잖아, 지금.”

“아, 그러셔. 네 발로 들어간다고? 사족보행 한다는 건 아니지?”

“농담 되게 재미없네. 됐으니까 마저 마시자고. 그럼 됐지?”

술이 들어가서 그런가, 말투가 영 거슬리게 비꼬아대는 거 같아서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지만 어떻게 유야무야 됐다. 언성 조금 높였다고 자리를 옮기는 건 어쩐지 지는 것 같은 기분이라 고개를 돌리지 않고 앞만 봤다. 속에서 막 부글거리는 것 마냥 끓어서 슬슬 양을 줄일까 생각하던 참이었다. 소주 몇 잔을 입에다 털어 넣다가 어느 순간부터 뚝 하고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정신이 들었다.

아니, 눈은 감긴 채로 정신만 얼다 녹은 것 마냥 몽롱했으니 정신이 들었다고 하기엔 무리가 있을지 모른다. 사방이 조용하고 어둡다는 것은 닫힌 눈꺼풀로도 알 수 있었다. 내 발로 간다고 했었는데 결국 누가 데려다 줬나 보다. 미안해서 어쩐다. 조용한 가운데 귀만이 트여서 부스럭거리는 소리, 삐걱거리는 소리가 바로 앞과 옆에서 들렸다.

침대에 누군가 올라와 있다.

매트릭스의 한 부분이 푹 패이듯 눌렸다가 텅 하는 소리를 내며 원래대로 돌아오기를 반복하는 것이 선명하게도 느껴져 소스라치게 놀랐지만 입 밖으로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당연히 사람이겠지만 숙소는 개인실이었고, 자기 방으로 착각하지 않은 이상 침대에 올라오지 않을 터였다. 가위라도 눌린 거라면 이 순간 제발 깨어달라고 간절히 바랐다. 어깨를 짓누르는 손의 느낌에 침대에 사람이 있음을 알았으니 흔들어 깨우던, 태연히 옆에서 자건 뾰족한 방도가 나오리라고 생각했다.

“흠…….”

생각보다도 목소리가 가까이에서 들렸다.

달칵하고 눌리는 소리와 함께 시야의 한 구석이 밝아졌다. 협탁 위에 놓인 등을 켠 모양이었다. 약한 빛에 노출된 눈꺼풀이 저절로 파들거렸다. 슬슬 정신이 완전히 들려는지 끙끙거리는 소리가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어깨를 짓누르던 손은 그대로 떨어지지 않고 한층 더 꾹 짓눌렀다. 누르는 힘보다도 손톱이 박힐 듯 파고드는 것에 욱 소리가 절로 나왔다. 몽롱한 정신임에도 일단 일어나면 한 방 먹일 거라고 이를 북북 가는데 숨소리가 바로 앞에서 들렸다. 곧 미지근한 숨이, 축축한 것이 입술에 닿았다. 닫힌 눈꺼풀은 열리지 않았지만 내 눈동자는 안에서 흔들리고 있을 게 분명했다. 열기를 담은 삐죽한 살덩어리가 입술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는 것에 입을 막은 것이 또 다른 입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선진화파에 여자는 없다.

아니, 여자 남자 가리기 전에 잠자는 사람 침대에 올라와 입 맞추는 사람은 백 퍼센트 이상한 게 당연하지 않나. 당황스러움과 더불어 온갖 불평불만이 튀어나갈 입은 여전히 덮어온 입으로 꾹 막힌 상태였고 침입한 혀가 기분 나쁠 정도로 끈적이며 입 안을 건드려댔고 아래에 깔린 혓바닥을 세우듯 얽어댔다. 물기 어린 것이 닿았다가 떨어지는 소리에 디 부끄러울 정도였다. 한계까지 차오른 숨에 비로소 몸이 적신호를 울리며 눈을 번쩍 뜨게 했다. 눈뜨자마자 제대로 힘이 들어가지도 않은 손을 반사적으로 움직여 눈앞에 있을 누군가를 밀어냈다.

“…….”

잠시 후 시야가 온전히 잡히자 내 위에 올라타 태연하게 제 입가를 훔치는 놈이 보였다. 낯설지 않았다. 당연했다. 평소와 달리 반쯤 풀이 죽은 머리, 은은한 조명 불빛을 받아 어두운 녹색을 띠는 눈. 의식이 끊기기 직전까지 바로 옆에서 술잔을 기울이던 녀석이었으니 말이다.

“주…정재?”

녀석은 뭐가 그리 대수롭냐는 듯 고개를 까딱이며 나를 내려다보았고, 입을 열었다.

***

-깜짝 놀랐어?

썩 유쾌하거나 작은 일이 아니었기에, 과거의 기억이 그 한 마디로 단편적으로 떠오르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했다. 골목길에서 천천히 걸어 나오는 남자, 주정재는 여전히 낯설지 않았다. 얼굴이며 덩치며 전과 다름없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전체적인 분위기는 과거와 거의 흡사했다. 그러나 그런 것과는 별개로 경계심이 들끓어 올랐다. 선진화파 진압작전 당시 체포되었을 녀석이 아닌가.

“오랜 친구인데 아예 모른다면 모를까, 가까이 산다는 걸 안다면 소식정돈 알고 싶어질 만도 하잖아?”

“…10년이나 흐른 뒤에도 갑자기 불쑥 찾아올 만큼 친근한 사이는 아니었던 거 같은데. 그보다, 어떻게…….”

“아, 모르나?”

주정재는 품에 손을 집어넣었다. 혹시 몰라 긴장을 늦추지 않는데, 녀석이 내보인 것은 나도 익히 잘 아는 것이었다. 경찰 공무원증. 사진과 함께 아래에 쓰여 있는 주정재의 이름 석 자가 가로등의 불빛에 또렷하게 보였다.

“너도, 경찰…이었냐?”

“그렇지. 왜, 의심스러워? 어디서 증 하나 그럴 듯하게 뽀려 왔을까봐?”

“…그다지. 이 근처에는 무슨 일로?”

“너랑 같이 사는 그 인상 사나운 녀석이 전에 시비에 휘말려서 경찰서에 왔을 때,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이다 싶어 종이 좀 떼어봤지. 근처기도 하고 말이야.”

고개를 건성으로 주억거렸다. 가까이 다가온 얼굴은 빙글거리고 있지만 그 아래 깔린 생각을 종잡을 수 없는 건 시간이 아무리 지나도 마찬가지였다. 멀거니 서서 영양가 없는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지만 그렇게 오랫동안 붙잡혀 있을 생각은 없었다.

“나중에 근처 또 오면 술이라도 같이 하던가.”

마음에도 없는 소리였다.

“나중으로 끌 거 있어?”

“뭐?”

“지금 해.”

그걸 간파해 낸 것인지. 아닌지.

갈퀴처럼 손을 세워 양 어깨를 잡아온 녀석이 제가 있는 골목으로 나를 끌어당겼다. 얼결에 이끌려 길에 나직하게 깔린 그늘 안에 완전히 파묻혔다. 뒤에 닿은 벽돌담의 냉기가 등이며 뒤통수를 타고 올라왔다. 그 상태로 몸을 밀착해 오며 얼굴을 가까이 하는 주정재의 눈동자가 녹색의 도깨비불 마냥 빛나는 것처럼 보였다.

“안 뿌리쳐? 이번엔 정신도 멀쩡한데.”

“비키라고 하면-”

“순순히 안 비키지. 잘 아네. 가르친 보람이 있어.”

말을 자르고 고개를 들어 입술을 덮어온 녀석은 여전히 제멋대로였고, 여전히 손아귀 힘은 억셌다. 이번엔, 이라는 부분이 거슬렸지만 눈을 감았다. 노골적으로 비웃는 어투며, 가르쳤다는 표현하며, 지적하고 싶은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지만 잠자코 녀석이 만족해 떨어져 나가기를 기다렸다. 상대가 어떻게 나오건 상관없다는 듯 제 기분에 따라 행동하는 게 여전한 것에 대한 반사적인 체념이었다. 짧지도 길지도 않은 기간에 쌓았던 것들은 녹지 않고 앙금으로 남아있었던 모양이다.

짧은 입맞춤이 끝나고 너무 순순해서 김 빠졌다는 녀석의 얼굴에 짜증 섞인 한숨을 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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