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도 업무 메모는 잘 해두는 편이었지만 (존경하던 상관이었던 형님이 세월의 흐름을 삼킨 수첩을 늘 지니고 다니며 자주 메모하는 것에 영향을 받았다) 서재호가 본격적으로 메모하는 습관을 들이게 된 건 천직이라고 생각했던 경찰을 그만두고 기자로 이직했을 때였다. 어느 것이 옥석인지 가릴 수 있는 눈썰미가 길러지지 않은 상태이기도 해서 제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시작은 아주 작은 초인종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그냥 무시했어야 했는데! 조용호는 문을 열자마자 지독하게 후회했다. "이야~! 오늘 이 친구 생일이라지 뭐야? 다 같이 축하해주자고!" "안녕하세요. 홍설희에요." "아유, 거 생일 축하드립니다 아저씨!" "아저씨라고 부르지 마!" "조용호 씨라고 하셨죠? 권혜연이라고 해요. 재호 씨에게서 이야기 많이 들었습니
경찰을 그만 두고 기자가 된 뒤로 이토록 완연한 봄을 느낀 적이 또 있었을까. 나 생일이요, 하고 자랑하는 일은 없지만 한 번 알려주고 난 뒤 달력에 적어두기라도 하는지 12시 땡하자마자 예약이라도 해놓은 듯 문자로 생일 축하한다는 문자가 도착했다. 생일날 시간 비어있으면 저녁이나 같이 먹자는 말에 고맙다고 인사하고 너무 늦게 자지 말라며 답장을 보내
죽다 살아난 이후 종종 복권을 샀던 서재호는 거짓말처럼 간소한 금액에 당첨됐다. "체, 저도 아저씨 따라서 복권 사볼 걸." "헹, 자동으로 뽑힌 거라 안 됐을 걸?" "당첨금으론 뭐하실 거예요? 컴퓨터 바꾸시나?" 당첨금 수령하지도 않았건만 권혜연과 양시백의 두 눈이 반짝거렸다. 세금 떼고 나면 실수령액이 줄어든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랬다. 아직까지는
양시백이 태권도장 일을 오랫동안 하면서 태권도 이외에 는 게 있다면 종이 공작 실력이었다. 자르고, 접고, 붙이고. 성인반이나 특기생들의 비중도 꽤 있었지만 아이들이 제일 많았기 때문에 어린이날이나 크리스마스 같은 날이면 일찍 마치고 먹고 마시는 시간을 갖곤 했다. 작은 트리와 꼬마전구뿐만으론 다소 휑한 구석이 있어서 반짝반짝 빛나는 (일반 색종이에 비해
"좋아할까요?" "좋아하겠지." "오빠 생일이 12월이었구나..." "재호 씨는 어떻게 알았어요?" "언론계의 황야에서 살아남은 기자에게 못 알아낼 것이란 없지." 권혜연 뿐만 아니라 홍설희 역시 빤히 바라보는 바람에 서재호는 허세 부리던 것을 그만두고 사실대로 말했다. "자연스럽게 내 생일 알려주면서 양시백이 생일도 물어봤어." "전 2월 14일이에요
성인이 되고, 일자리를 찾고, 거기에 익숙해져 비로소 정착하고, 또 다시 바뀌고. 스물 남짓, 사회로의 첫 걸음과 함께 철이 들었을 즈음 부모님이 돌아가셨다. 평소에 더 잘해드리지 못 한 것이 슬펐지만 산 목숨, 마냥 울기만 할 순 없었다. 시간이 지나자 삐걱거리던 몸과 마음을 수습할 수 있었다. 부모님이 그리워지는 날이면, 더없이 생각나는 날이면 종종 찾
-여, 시백이랑 혜연이. 같이 있어? "네. 설희랑 도장에서 놀아주고 있어요. 이쪽으로 오시게요?" -아니. 지금 가봤자 거기서 자고 올 거 아니면 왕복이 피장파장이라서. 주말 동안은 설희와 보내기로 했을 테니 내일까지 쭉 있을 테고... "무슨 일이라도 있어요?" -아, 아니, 괜찮으면 다 같이 맛있는 거 싸들고 꽃놀이 가자는 거지. 다들 가고 싶어했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