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329

서재호 생축글

원래도 업무 메모는 잘 해두는 편이었지만 (존경하던 상관이었던 형님이 세월의 흐름을 삼킨 수첩을 늘 지니고 다니며 자주 메모하는 것에 영향을 받았다) 서재호가 본격적으로 메모하는 습관을 들이게 된 건 천직이라고 생각했던 경찰을 그만두고 기자로 이직했을 때였다. 어느 것이 옥석인지 가릴 수 있는 눈썰미가 길러지지 않은 상태이기도 해서 제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모조리 메모해야 했고, 추후에 메모한 내용을 찬찬히 체크하며 중요도를 매기곤 했다. 개인차는 있을 수 있지만 그런 메모가 적힌 종이들을 겹겹이 쌓아나가다 보면 어느 순간엔가 자신만을 위한 메모법을 체득하게 된다. 서재호가 찾은 방법은...

***

"재호 씨도 수첩을 갖고 있네요. 어떻게 메모하세요?"

"흠, 맨입으로?"

"저도 아빠 따라서 수첩에 자주 메모하고 있기는 한데 현직 기자 재호 씨만의 유용한 메모 팁이 있을까 해서요."

"현석 형님 이야기가 나오면 또 이야기 하지 않을 수가 없지."

알고서 그런 거야? 장난스레 묻는가 하더니, 서재호는 점퍼 안주머니에서 수첩 하나를 꺼냈다. 그리고 점퍼의 바깥쪽에 달려있는 주머니와 가방속에서도 각각 수첩을 하나씩 꺼냈다. 안주머니에 나온 첫 번째 수첩은 한손에 꼭 쥘 수 있을 만큼 작은 사이즈였고, 바깥쪽 주머니에서 나온 두 번째 수첩은 처음 것보다 조금 컸지만 딱 주머니에 들어갈 만한 크기의 스프링이 달린 수첩이었다. 가장 큰 것은 가방에서 나온 A5 사이즈 수첩이 제일 컸다.

"수첩이 여러 개인 건 적어둘 게 많아서인가요?"

"그렇지 않아. 다들 비슷한 내용을 담고 있지."

"그럼 굳이 여러 개 나눠서 할 필요는 없지 않아요? 분실 대비용인가."

어느새 양시백이 훌쩍 다가와 물었다.

권혜연도 아직까지는 용도가 조금씩 달라 보이는 수첩들을 보고 의아한 듯했다.

"자자, 일단 들어보라고. 이 스프링 달린 수첩에는 1차적으로 메모할 내용을 죽 적는 거야. 사소한 것 가리지 않고, 자기가 적을 수 있을 만큼. 평문, 즉 보통의 글을 적는 용이지. 이 큼직한 수첩에는 처음 메모했던 내용을 제각각으로 정리해보는 거고. 처음에 두서없이 메모하는 데 집중했다면 중요한 정보와 그렇지 않은 정보가 마구 뒤섞여 있을 거 아냐. 안 그래?"

"그렇죠."

"네. 그 다음은요?"

서재호는 스프링이 달린 수첩과 A5 사이즈의 수첩의 중간을 펼쳐 보였다. 전자의 경우 글씨체를 알아보기 힘든 구간도 있었고, 재차 밑줄을 긋거나 동그라미나 별표한 부분이 어지러이 보였는데, 후자 쪽으로 시선을 돌리니 비교적 반듯한 글씨체와 중요하다고 체크한 부분이 깔끔하게 메모되어 있었다. 알아보기 쉬운 건 물론이었다.

"처음 내용을 요약하는 건 물론, 어떻게 요약할 지가 중요하겠지. 시간이 명확하다면 시간순으로 단순 나열해도 좋고, 순서도-플로우 차트를 작성해봐도 좋아. 누가 봐도 한 눈에 알 수 있게 말이지. 메모하면서 드는 생각이나 의문점을 같이 적어두면 추후에 좋은 단서가 될 수도 있지. 난 그걸 마인드맵처럼 그리기도 해."

"흠...시험 공부 할 때 단어장에 요약 정리할 때의 느낌이네요."

"비슷한 구석이 있지. 둘 다 암기해 둬야 한다는 것도 그렇고. 단순 베끼기라면 상관 없지만 그런 요약 정리는 내 방식과 친구의 방식이 다를 수 있잖아? 자기에게 어떤 방식이 잘 맞는지는 메모를 계속 해봐야 알 수 있겠지."

"끙, 전 휴대폰 메모도 잘 안 써서 좀 어렵네요."

"양시백이도 이번 기회에 메모하는 습관을 들이라고."

"3개 중에 2개에 대해서 설명하셨는데, 그럼 저 제일 작은 수첩은 뭔가요?"

권혜연의 질문에 양시백도 그러고보니, 하며 안주머니에서 나온 제일 작은 수첩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느 정도 서재호의 옷차림에, 정확히는 서재호에게 익숙해졌다고 생각했음에도 가슴에 닿는 안주머니가 있는 줄도, 그 안주머니에 작은 수첩이 들어있다는 사실도 몰랐었다. 무엇이 적혀있을까.

"별거 아냐. 3개 모두 본질적으로 내용은 같거든."

"같다고요? 그럼 단순히 분실 대비 예비용이라는 건가요?"

"아니. 1차 메모, 2차 요약이 있었지. 마지막 단계는 뭘까?"

"최종 정리요?"

"어렵다면서 이런 쪽은 또 직감이 빠르고만. 정답이야."

"2차로 요약을 깔끔하게 했는데도 또 정리할 게 남은 건가요?"

"앞의 2개는 이른바 '남이 봐도 알아볼 수 있는' 내용이야. 처음 것도 악필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내가 휘갈겨 쓴 것도 얼추 알아낼 수 있겠지. 이 마지막 수첩에는 앞서 요약한 내용들을 토대로 '나만 알아볼 수 있도록' 정리하는 거야. 암호를 쓰던지 기호로만 표시해 놓는지는 자유고. 그 과정에서 추가로 보강된 내용이나, 상황이 달라지면서 쓸모없어진 정보도 있을 수 있으니 열심히 더하고 뺴기를 하면 끝. 그 외에도 메모를 도와줄 만한 보조기구는 많지. 휴대폰 메모도 있고, 녹음기도 있고, 정리한 내용을 암호 지정해서 클라우드에 업로드 해두면 아날로그 방식 증거가 사라져도 아주 조금은 안심할 수 있지. 백업이란 건 본래 많으면 많을수록 좋거든."

양시백과 권혜연은 서재호가 내민 작은 수첩을 살펴보았다. 빽빽하게 정리되어 있지만 알아볼 수 있는 내용은 몇 없었다. 두 사람이 원천이었던 정보와 그것을 요약한 내용을 보지 않았더라면 무엇을 어떻게 정리한 것인지 짐작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명확하게 알아볼 수 있는 내용은 딱 하나였다. 삼각형 안에 이, 고, 조라고 적혀있는 것이었는데, 두 사람 모두 직접 겪은 바가 있기에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유상일에게 누명을 씌운 자들, 이경환과 고상만, 조용호에 대해 메모해 둔 것이었다.

"알아보겠어?"

두 사람은 서재호에게 그 작은 수첩을 돌려주었다.

서재호는 3개의 수첩을 원래 들어있던 곳에 도로 넣어두었다.

"사실 내가 무엇 때문에 기자가 되었는지 안다면, 그리고 그 일에 깊이 관련된 사람일수록 암호 방식을 취해도 내용을 알아보기 어렵진 않을 거야. 내용을 알아차리는데 다소의 시간은 걸릴지 몰라도."

"그럼...그래서 아빠의 수첩도...?"

"아직까지 내막을 모름에도 우리라면, 계속해서 현석 형님의 죽음을 쫓는 사람들에게는 큰 단서가 될 수 있었을 지도 모르지. 그러니 그렇게 훼손되어 돌아온 걸 거고."

"그렇군요...."

"여튼, 메모하는 방법에 대해서 답 좀 얻었나?"

"네. 큰 도움이 됐어요."

"뭐..전 써먹으려면 시간 좀 필요하겠지만요. 그, 아저씨. 이런 질문 좀 이상하게 들릴 지도 모르겠는데. 궁금한 거 하나만 물어봐도 돼요?"

"말해봐."

"만약에, 그렇게 열심히 정리한 수첩들을 잃어버리게 되면 어떡해요?"

"그럼,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지...이럴 줄 알았어?"

다소의 상심을 담은 대답에 양시백은 엑. 하는 소리를 소리를 감추지 못했으나 말끝을 흐리던 서재호의 말에 동그래진 눈으로 바라보았다. 권혜연도 궁금하다는 듯 시선을 집중했다. 서재호는 픽 웃으며 제 관자놀이를 검지로 톡톡 두드렸다.

"-여기 다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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