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퀘글
은창현석
"실례합니다."
"아, 은창 오빠, 왔어요?"
"어, 안녕. 혜연아. 아버지...경감님은?"
"아빠라면 잠깐 요 앞에 나갔다 오신다고 했어요. 한 10분 20분 걸린다고 했나?"
"그래..."
정은창은 손을 깨끗이 씻고 옷을 걸어 놓은 뒤 권혜연에게 물었다.
"맨날 얻어먹기도 뭐하니, 오늘은 내가 식사 준비를 해도 될까?"
"오빠가요?"
"걱정마, 뛰어나진 않아도 한 끼 식사 정도는 해낼 수 있다고."
"아뇨, 그냥 놀라워서...전 상관없어요. 아빠도 좋아할 걸요?"
권혜연은 정은창을 데리고 냉장고 앞에 섰다.
"냉장칸엔 계란, 햄, 오뎅, 김치, 멸치볶음, 나물 있고, 냉동실 칸에는 고기가 있는데 해동이 안 되어서 바론 안 될 거에요. 그래도 만두도 있고 튀겨먹을 수 있는 거 많으니까 솜씨 발휘해 주세요~ 아, 정 안 되면 라면도 있으니까 너무 부담 갖지 마시구요."
"..어쩐지 신나보이네."
"저 아니면 아빠가 요리하는 거라...오빠 요리 솜씨가 궁금하기도 하고요."
"너무 기대하진 말라고 하고 싶지만 일단 노력해볼게."
권혜연은 도와줄 것이 없느냐고 추가로 물었지만 정은창은 혼자서도 할 수 있다며 소파가 있는 쪽을 가리켰다. 권혜연은 소파에 앉아 TV를 보다가도 정은창을 흘끗흘끗 보는 듯 했으나 곧 관심을 거두었다. 이제는 정은창의 차례였다. 계란, 햄, 김치, 양파, 대파, 소금, 설탕, 후추. 필요하다면 그때가서 추가해도 충분했다. 햄, 대파, 양파, 김치 순으로 잘게 썰어준 뒤 달궈진 후라이팬에 식용유를 두르고 파를 후추에 살짝 볶았고, 곧 김치를 넣고 볶다가 햄과 양파를 같이 넣었다. 불을 살짝 줄인 뒤 밥 두 그릇 반을 턱 턱 떠 후라이팬에 투하한 뒤 달달달 볶았다. 작은 후라이팬을 하나 더 꺼내 재빨리 달구고 그 위로 계란 3개를 톡톡 까넣었다. 넓적한 접시에 3인분을 옮겨담은 뒤 계란 후라이를 뒤집어서 익히고 반숙으로 익었을 즈음 볶음밥 위에 계란 후라이를 얹은 뒤 참깨 조금으로 마무리!
"다 됐다."
"고생하셨네요."
"볶음밥 하는 거 가지고 뭘..."
"다녀왔습니다~"
"아빠!"
"경감님."
"아, 정은창 왔구나. 음~ 맛있는 냄새. 내가 딱 맞춰왔어."
"이번엔 오빠가 만들었어요."
"그래? 기대되는데. 손 좀 씻을 테니 둘은 먼저 가서 앉아있어."
권현석이 화장실에 들어간 사이 권혜연과 정은창은 수저를 꺼내 식탁 위에 놓고 자리에 앉았다. 손을 씻고 나온 권현석이 앉자 방긋 웃었다. 어떻게 보면 누구라도 할 수 있는 김치볶음밥인데 진수성찬을 앞둔 것처럼 얼굴이 환했다. 정은창은 부녀의 그 환함이 새삼 눈부시기만 했다.
"요리해줘서 정말 고마워, 정은창."
"아니에요. 자주 얻어먹는데 이 정도가 별 거라고 그래요. 빨리 드세요."
"쑥쓰러워하기는...그럼, 잘 먹겠습니다."
"잘 먹겠습니다."
정은창도 가정집에서 볶음밥을 해먹기는 수십년 만에 처음이었다. 어린 시절에 부모님이 가끔 해주셨었고, 부모님이 돌아가신 뒤에는 어설프게 동생에게 해줬던 게 전부였다. 그 전부가, 정은창에게는 아주 길었다.
"음~ 맛있어. 간이 맞는데 짜지 않기 힘든데. 파기름 향도 나고."
"그러게요. 오빠, 요리에 관심 있어요?"
"아니..그, TV 볼 때 요리마당 프로가 하더라고. 김치볶음밥 좋아해서.."
"장차 요리사의 꿈을 키워나가보는 건 어때?"
"비행기 띄워주지 마세요."
"저희 주방에서 그 꿈을 펼쳐보는 건?"
"혜연이 너까지.."
"헤헤, 농담이에요. 근데 생각했던 것보다 맛있어요. 정말요."
"김치볶음밥에 계란을 풀어 섞기만 했는데 이렇게 따로 하는 것도 괜찮은 걸."
"후라이팬을 2개 써야한다는 게 단점이죠."
당연하게도, 김치볶음밥은 만드는 것보다 먹는 게 더 빨랐다.
***
"밥도 먹었겠다 시간도 늦었으니, 자고 가."
"이럴 거면 집은 왜 얻어주신 거에요.."
"집은 집이고 자고 가는 건 자고 가는 거라 그렇지."
"나 참, 못 말려..."
선진화파는 몰락했고, 그 전에 얻어준 집도 있었다. 권현석이라고 모르지 않을 것이다. 말은 못 이기는 척 했지만 싫지 않았다. 왜 그러는 지도 알았다. 제 것 아닌 행복감이 차오를 때마다 마음이 누그러지면서도, 제가 범한 죄와 그 결과가 누그러지고 물렁거리는 마음을 물어뜯어댔다. 권현석만은. 권현석만은.
잠옷으로 갈아입은 권현석에게선 잦아드는 스킨 냄새가 풍겼다. 자고 가는 정은창 역시 같은 스킨을 발랐지만, 막 뿌린 것이 아닌 스킨 냄새가 코끝에 다가와 스칠 때마다 묘한 흥분감이 일었다. 정은창은 향에 홀린 건지 권현석에게 홀린 건지 굳이 구분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나안의 권현석에게 짧게 입맞추었다. 안경으로 가리워진 얼굴이 아닌 맨 얼굴이 닿는다는 사실, 그 얼굴을 매만지고, 쓰다듬고, 제쪽으로 끌어당길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걱정 마. 두려워하지 않아도 돼."
"그렇게 말해줄 걸 알아서, 더 걱정이 돼요."
"누구나 두려워하는 게 있는 법이지...나도 그렇고."
"경감님한테도 두려운 게 있어요?"
"그럼."
"그게 뭔데요?"
"비밀이야."
"체, 전 말해줬는데 경감님만 비밀로 하기 있기에요?"
"내가 정말 두려워하는 때가 온다면, 그 날이 정말로 온다면...그땐 이렇게 침착하게 있지 못할지도 몰라. 그럴 때는 날 꽉 안아줬으면 좋겠어."
"걱정 마세요. 경감님이 걱정하는 일이 안 일어나게 기도라도 해볼 테니까요. 안아주기도 할 거고요."
"약속했다?"
"약속했어요."
"자, 그럼 이만 잘까?"
침대에 막 누우려는 권현석의 등을 보며 정은창은 생각지도 않았던 말을 내뱉었다.
"내일 아침도 제가 만들어 드릴까요?"
"내일도 볶음밥?"
"아니요. 이래봬도 계란말이도 도톰하게 잘 말 줄 안다고요."
"그래?"
"네."
"오늘처럼 맛있다면 난 상관없어."
"잘 자요. 경감님."
"잘 자. 정은창."
딸깍. 작은 등의 불이 꺼지고 방은 온통 암흑으로 가득 찼다.
평온한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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