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색도시 전력90분

누아남과 어느 if세계

남자는 길을 걸었다.

한없이 익숙한 서울이었지만 때때로 눈에 익지 않은 상황들을 마주할 때마다 전신을 얼음에 댄 듯한 낯설음을 느끼곤 했다. 그것이 불행을 예비하는 종류의 것이라면 경계하거나 마땅히 몸을 사려야 함이 맞으나 그런 종류의 낯설음은 또 아니었다.

"은희 씨. 여보. 우리 설희 동생이 무어가 먹고 싶어하는지 알려주시겠소?"

"글쎄요. 새큼한 게 먹고 싶다고 하는데."

"엄마, 아기가 말을 하는 거에요? 어떻게 다 알 수 있어요?"

"음..그건, 엄마 뱃속에서 아기랑 이야기할 수 있는 전화선 같은 게 있어서, 태어나기 전에는 엄마랑만 조금씩 대화할 수가 있는 거야."

"우와...신기해라. 그럼, 여동생인지, 남동생인지도 알 수 있어요?"

"그건..우리 아기가 조금 더 자라야 알 수 있을 것 같은데. 설희는 여동생이 좋아, 남동생이 좋아?"

"둘 다요!"

"나도 둘 다인 쪽이 좋은데, 은희 씨는?"

"글쎄요. 아기 마음에 따라야 하겠죠?"

아이를 임신한 아내를 인도 안쪽에 두고 딸을 업고 길을 걷는 남편의 모습은 퍽 정겨워 보였다. 평범한 가족의 모습이었으나 남자는 제가 글줄과 사진 몇 장으로만 알았던 여자아이를 겹쳐보고는 업힌 채로 까르륵 거리며 제 엄마 아빠와 대화를 나누는 아이의 모습을 뚫어지게 쳐다보다가 등을 돌려 다른 곳으로 향했다. 따스한 얼음이 남자의 가슴에 푹 박히었다가 흔적도 없이 녹아 사라졌다. 피 대신 떨어지는 것은 말갛게 떨어지는 투명한 물기 뿐이었다.

***

양지 태권도장.

남자의 기억속에서 태권도장은 꽤 협소한 평수였는데, 지금보니 옆에 있던 건물을 매입해 내부를 확장한 듯 이전보다 넓고 말끔하게 재단장 되어있었다. 기웃거렸기 때문일까, 안쪽에서 사람이 걸어나왔다.

"아, 저, 혹시 상담 받으러 오셨나요?"

어두운 녹색 머리카락에 날카로운 눈빛은 남자가 아주 예전에 마주쳤던 인상과 거의 흡사했지만, 나온 사람은 훤칠한 청년이었다.

"예..저, 관장님은 잘 계시는지요?"

"아, 관장님을 찾아오신 건가요? 이걸 어쩌나..지금 잠깐 은행에 가 계시거든요. 곧 오실 것 같은데, 바쁘지 않으시면 안에서 차라도 한 잔 어떠세요?"

"..아닙니다. 잘 계신다니 그걸로 괜찮습니다."

"저 날도 더운데 그러지 마시고.."

"시백아, 손님 왔니?"

말과 함께 도복을 입은 중년 남자가 도장 안에서 나왔다. 끄트머리에 흰 머리칼이 조금 보였지만 체구며 기세는 남자가 아주 먼 옛날 처음 보았을 때처럼 정정해 보였다.

"아들과 다시 만나서 다행이네."

"예?"

남자는 제가 중얼거린 것을 얼른 다른 말로 덮었다.

"혼잣말입니다. 그보다 오늘은 날이 아닌 것 같으니 나중에 관장님이 계실 때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그럼 이름이라도 좀 알려주시겠어요?"

남자는 아주 잠깐 고민했으나,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정은창이라고 합니다."

"옙, 그럼 다음에 또 오세요!"

청년, 양시백은 남자에게 붙임성 있게 인사했다.

그러다 제 아버지가 먼 길을 가는 남자의 등을 뚫어지게 쳐다보는 것에 의아해하며 물었다.

"아빠, 아는 사람이야?"

"아니. 모르는 사람이야."

"근데 그렇게 뚫어져라 보고 있어?"

"어쩐지 쓸쓸해 보여서."

"웬 뚱딴지 같은 말이래."

"그렇지. 자, 들어가자. 날 덥다."

***

남자는 그늘진 벤치에 앉아 지친 다리를 쉬게 하며 식사 겸 빵과 우유를 해치우고는 제가 아는 곳을 하나하나 체크하며 돌아다녔다. 어디에도 남자가 아는대로의 흔적이 남겨진 곳은 없었다. 정확히는 그 흔적에 변조가 가해져 있었다. 으리으리한 호텔이었던 곳은 아예 회사들로 이루어진 빌딩이 들어서 있었고, 붉고 노란 불빛이 가득차던 술집 거리는 재개발 되면서 전혀 모르는 상점들로 가득 차 있었다. 마치 남자가 알아온 모든 것이 송두리째 부정되는 것처럼. 감히 제 것이었던 이름을 손쉽게 꺼낼 수 있는 것 역시 -분명 '예전' 이었다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 부정이 만연해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불만은 없었다. 바라는 것이라곤 제가 알았던 사람들의 얼굴을 멀리서든 가까이서든 보고자 하는 것들 뿐.

복수를 위해 한 때 깊게 몸담았던 곳에 양식 전문 음식점이 들어서 있는 것에 헛웃음을 짓던 남자는 버스를 타고 서울지방경찰청 인근으로 이동했다. 안에 들어선 남자는 안내석에 앉은 직원에게 물었다.

"저, 말씀 좀 여쭈겠습니다. 권현석 경..감님이 지금 자리에 계신지 알 수 있을까요?"

"권현석 경감님이요? 같은 이름을 가진 분은 계시지만 계급이 다른 것 같은데..혹시 어떤 용무로 찾아오셨는지요?"

"아, 그게..급한 일은 아닙니다."

"이제 경감이 아닌 권현석 경정입니다만..여기 계신 분은 어떤 용무로 절 찾으셨습니까?"

음색은 조금 달랐지만, 말투는 남자가 10여 년 전쯤에 들은 것과 비슷했다. 들려온 목소리에 휙 뒤를 돌아본 남자는 잠시 숨을 멈추었다. 미남상의 키 큰 남자와 조금 부산해 보이는 남자를 대동한 이는 못 보던 가르마가 져 있었고, 안경테는 이전보다 조금 굵은 것으로 바뀌어 있었다. 권현석 경감이 아닌 권현석 경정으로서 자리에 서 있었다. 남자는 그것이 너무나 생경하고 놀라웠다. 권현석은 제게 새로운 삶의 길을 알려주었던 은인이었다. 이제는 그 권현석이 어디에도 없다 할 지라도. 이렇게 마주하고 있다는 사실은 남자에게 커다란 벅참을 안겨주었다.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그런 감정을 억누르고 있었지만, 언제 둑 터진 것처럼 눈물을 쏟을지 모를 일이었다.

"현석이 형, 아는 사람이야?"

"글쎄..나도 처음뵙는 분이라서.."

"형님, 저희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아, 그래, 재호. 준혁이. 다들 먼저 들어가 봐."

남자가 말을 잇지 못하는 동안 권현석은 저와 함께 있던 세 사람을 안으로 먼저 들여보내고 다시 남자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혹시, 저희 어디선가 만났었습니까? 예전 직급으로 절 찾으셔서.."

"..아닙니다. 제가 잘못 안 것 같습니다. 예전에 여기 근무하시는 분께 은혜를 입었었는데, 워낙 오래 전 일이라 권 경감이라는 호칭만 기억하고 있어서..경찰 영웅인 권현석 씨와..착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가요..?"

그게 아닌 것 같은데.

권현석은 남자가 제 이름 석 자를 정확히 말했다는 것을 알기에 묘하다는 듯 중얼거리다가 곧 표정을 고친 뒤 말했다.

"서울지방경찰청에 근무하는 권 경감이라..타 부서에 계신 분과 착각하셨던 것 같은데, 괜찮다면 제가 찾는 것을 도와드릴까요? 어쩌면 금방 찾을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아뇨. 마음은 감사합니다만, 그렇게 수고를 끼치고 싶지는 않습니다. 인연이 된다면 다시 만나볼 수 있겠죠. 본의 아니게 시간을 잡아먹어 죄송했습니다."

"저, 잠시만요!"

남자는 황급히 등을 돌려 달아나듯 자리를 벗어났고, 권현석은 얼떨떨해 하며 남자가 박차고 나간 출입구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

하교 시간에 이르자 거리에는 교복을 입은 아이들이 하나둘 나타났다.

"아, 드디어 모레면 방학이다..현아야, 아연이랑 다른 친구들이랑 여름에 같이 놀러가는 거 어때? 부모님이 다같이 놀러가는 거라면 괜찮다고 하셨거든."

"정말로 허락 받은 거 맞아?"

"아이 참, 맞다니까. 고3 되기 전에 마지막으로 논다고 생각하라고 하셨지만 말야."

"으..그 말 듣기 싫었는데 생각해 버렸어.."

"아연이는 어때?"

"음, 나도 아빠한테 물어봐야지. 그보다 어디? 산? 바다? 계곡?"

"글쎄. 아마 갈 수 있으면 계곡 쪽일 거야."

익숙한 이름에 남자는 잠시 횡단보도 옆에선 학생 셋을 물끄러미 보았다. 남학생 하나에 여학생 둘. 여학생 둘 중 한 명은 머리칼이 밝은 색이었고, 다른 한명은 양갈래로 묶어 늘어뜨리고 있었다. 아연이. 유아연. 아빠를 닮은 것인지 키도 크고 또랑또랑한 눈매가 돋보였다. 남자는 눈웃음을 짓다가 제 시선이 눈에 뜨일까 고개를 바로하고는 횡단보도 신호등이 초록불로 바뀌자 잰걸음으로 길을 건넜다.

시끌벅적한 거리를 벗어나 주택가가 들어선 곳에 이르자, 남자는 상상한 적 없었던 모습 하나를 볼 수 있었다.

"언제나 고마워. 혜연이한테 늘 고마운 거, 알지?"

"아니에요. 은서 언니야말로 주말마다 꾸준히 봉사활동 나가시잖아요. 존경스러울 정도인 걸요."

"아냐. 권현석 경정님이 도와주신 거..생각하면, 나도 받은 은혜만큼 다른 사람들에게 베풀고 싶어. 그러고 싶어. 응, 그것뿐이야."

"아이참, 좋은 일한 건 아빠인데 제가 다 부끄러운데요. 그보다 다음에 일손 급한 일 있으면 사양말고 또 불러줘요."

"응. 근데 부모님이 저녁 먹고 가지 서운하게 그냥 가냐고 하시던 걸. 이렇게 갈 거야?"

"헤헤..오늘은 그 아빠가 일찍 퇴근한다고 들어서, 모처럼 같이 저녁 먹으려고요."

"그럼 더 못 권하겠다. 어서 보내줘야겠어. 잘 가, 혜연아."

"또 놀러올게요. 언니."

"응."

머리를 어깨까지 기른 여자, 권혜연이 남자의 곁을 스쳐지나가는 동안 권혜연이 가는 걸 보던 정은서의 눈길이 아주 잠시 남자에게 머물렀고, 곧 시선을 거두고 집안으로 들어갔다. 오로지 남자에게 낯설고 익숙했던 서울은 이제 '익숙했다' 는 딱지조차 붙일 수 없게끔 대못을 박아놓았다. 남자는 이제 완전히 죽어버려 사어(死語)가 된 자신의 이름을 읊조리다가, 그 자리에 쓰러지듯 주저앉아 통곡조차 하지 못 하고 소리 죽여 오열을 토해냈다.

***

남자는 시커먼 물이 그득히 보이는 둔치로 와 있었다.

공원이란 이름으로 꽤나 넓은 길이 다져져 있었지만 깊어가는 여름밤 후미진 둔치에는 오직 남자만이 있었다.

하루종일 서울 곳곳을 돌아다니며 제가 본 것들을 떠올렸다. 저 없이 행복한 나날들이 주어져 있었고, 정은창이었던 남자는 제가 죽어도 좋으니 그런 일상이 파괴되지 않고 계속되기를 수없이 바랐었다. 그것이 하늘에 닿았는지, 정은창이었던 남자가 이제 정은창이었노라고 말할수도 없게 된 참에야 이루어져 있었다. 제 감정이 모순된 것인지, 아니면 지당한 슬픔인지 남자는 알 수 없었다.

"경감님."

남자는 저와 마찬가지로 죽어 없어진 은인의 호칭을 마지막으로 불러보았다. 눈물은 모조리 흘려버렸기에 남은 것은 껍데기 뿐이었다.

"이 서울에 나는 필요없어요."

이, 누구도 불행하지 않은 서울을 깨뜨려 버릴 가능성만을 품고 있을 뿐인 정은창이었던 남자가 세상에 존재할 필요는.

남자는 시커먼 물로 가득한 앞을 향해,

걸었다.

카테고리
#2차창작
페어
#Non-CP
추가태그
#생존if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