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링장조] 한 줌의 무게
우리 모두 결국엔 이렇게 될 것을
햇빛이 들지 않는 어두운 복도. 오래된 등에서 나오는 잔잔한 불빛만이 긴 복도를 비춰주고 있었다. 재호는 잠시 숨을 고르다 이내 그 길에 발을 들여놓았다. 그리고 한 발자국씩, 천천히, 보이지 않는 끝을 향해 걸어갔다. 뚜벅이는 구두소리가 조용한 복도에 외롭게 울려퍼졌다.
한 줌의 무게
W.T. HA_RUT_
언제였을까. 우리가 술잔을 부딪히며 얘기를 나눴던 그때는. 10년 전의 기억들 대부분은 그동안 흘린 눈물들에 지워져 흐릿하게 번져버렸다. 잊지말자고 해놓고, 결국엔 잊어버린 것이다. 재호는 그런 자신을 생각하며 자조적인 웃음을 짓다 눈 앞의 두 사람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잊어버렸던 기억들은 지금, 자신의 눈 앞에 놓여져 있다.
재호는 상일의 손을 잡았다. 손은 차갑게 식어있었다. 재호는 상일의 손등을 엄지로 쓰다듬다 뒤집어 손바닥을 마주하였다. 그의 손바닥에는 굳은살이 많아 투박했지만 재호의 손이 다 들어갈 정도로 커서 안정감을 자아내었다. 재호는 상일의 이런 손이 좋았다. 어릴 적 아버지가 잡아주었던 손과 같아서, 그 시절의 그리움을 불러 일으켜서, 그래서 좋았다. 실제로 그는 한 아이의 아버지였고, 분명 그의 손을 잡고 자랐던 아이는 자신과 같은 기분을 느꼈으리라. 재호는 아득한 기억 너머에서 들려오는 폭발음에 눈을 질끈 감았다. 투박하고 안정감있던 이 손은 가장 소중한 것을 놓쳐버렸었고 떠나버린 것을 대신해 복수를 쥐었다. 그리고 현재, 이 손에는 싸늘한 겨울 바람만이 스쳐지나갈 뿐이다. 재호는 상일의 손가락에 자신의 것을 끼웠다. 그리고 기도하듯 손을 모아 고개를 숙였다. 일종의 사죄였다. 막지 못한 사죄. 아이의 죽음을, 그리고 그의 파멸을 막지 못한 자신의 한심함에 대한 사죄인 것이다.
'재호는 따뜻한 사람이지.'
10년 전 어느 날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목소리를 따라 귀를 기울여 기억을 넘으면 어렴풋이 그 날의 풍경이 눈 앞에 그려지기 시작했다.
일찍 퇴근한 기념으로 술을 마셨던 때였다. 잔 부짖히는 소리가 곳곳에서 들려오던 작은 술집 안. 한 두잔 넘어가던 술이 다섯, 여섯잔이 되고 세 병을 넘길 때 쯤이었다. 몇 번째인지도 모를 잔을 부딪히고 한 모금 홀짝일 때 혀가 꼬인 발음으로 상일이 재호에게 말했다. 따뜻한 사람이라고. 상일은 재호를 그렇게 평했다. 갑자기 무슨 말씀이세요? 재호가 되묻자 상일은 그저 호탕하게 웃으며 그냥 그렇다고, 라며 대답을 미뤘었다. 대답을 들은 건 집으로 돌아가기 전에 만나는 갈림길에서였다. 깜빡이는 가로등 밑에서,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상일이 말한 대답. 재호는 그 대답을 단 한 번도 잊은 적이 없었다. 대부분의 기억들이 흐려지고 지워졌음에도, 그것만큼은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지금, 그 누구보다, 잡고 있는 이 손에 많은 미련과 후회를 느꼈다.
"……형님…저는 정말 따뜻한 사람일까요…."
재호는 상일의 손을 잡고 있던 자신의 손에 힘을 주었다. 상일의 손의 냉기가 손끝을 타고 넘어와 온 몸으로 천천히 퍼져나갔다. 상일의 손을 잡고, 누르고, 입김을 불어도 뺨에 갖다대면 느껴지는 차가운 냉기에 재호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당연한 일이지만 씁쓸한 기분을 감출 수 없었다.
재호는 상일의 손을 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몸을 틀어 바로 옆에 누워있는 준혁에게로 향했다. 가지런한 이목구비에 재호는 작게 웃으며 그의 뺨을 한 대 가볍게 건들였다. 자신의 뒷통수를 때린 작은 복수였다.
꽤 친한 사이라고 생각했다. 서로의 속사정을 얘기하지는 않았지만 함께한 세월이 얼마이며 함께 마신 술이 몇 잔이었나. 만취한 서로를 붙잡고 거리를 헤매었던 순간이 이토록 생생한데 눈 앞의 남자는 그 때의 남자와 다른 사람처럼 느껴진다. 자신을 기절시켰기 때문은 아니었다. 아니. 어쩌면 조금은 그럴 지도 모르지. 하지만 오직 그것만으로 느껴지는 낯선 기분이 아니다. 재호는 시백에게서 준혁이의 죄에 대해 들었던 때를 떠올렸다. 과거라고 해봤자 겨우 이틀 전의 일이었다.
'준혁…선생님께서…죽인 거였어요…. 이경환, 고상만, 조용호, 그리고……관장님까지 전부…그 네 명을 전부 죽인 건…선생님이셨다구요…!'
그 말을 듣고 무슨 생각을 했었는지 자세히 기억나지 않는다. 그저 죽었구나, 싶었고 그랬구나, 라고 받아들였다. 마치 남의 얘기인 것처럼. 남의 얘기가 아님에도 말이다. 오히려 진짜 남인, 만나봐야 고작 3일이었을 시백이 자신보다 더 그의 죽음에 슬퍼하고 괴로워했다. 재호는 단지 품 속의 담배를 입에 물고 천천히 빨아들일 뿐, 작은 눈물방울 하나 흘리지 않았다. 재호는 그런 자신이 스스로도 어색했다. 이토록 매정한 인간이었나 다시금 돌아보게 만들었다.
준혁의 흥신소에 들린 건 어제가 처음이었다. 유품정리 때문이었다. 그가 흥신소를 한다는 건 10년만에 다시 만났을 때 알았다. 어울리지 않으면서도 묘하게 어울려서, 여전히 속을 알 수 없다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언젠가 그의 흥신소에 들려 기삿거리를 들먹이며 찾아가볼까 하는 얄궂은 생각도 했었다. 다 부질없게 되어버렸지만.
재호는 주인을 잃은 의자에 앉아 천천히 제자리를 돌며 사무실 안을 둘러보았다. 수많은 파일들이 꽂혀있는 책장, 손님을 받기위한 소파와 책상, 작업을 위한 컴퓨터, 중요문서를 숨기기 위한 캐비닛 등등. 준혁의 사무실은 양반이라 불렸던 사람답게 필요에 의한 가구들만 있을 뿐 작은 유흥거리조차 없는 딱딱한 곳이었다. 그런 곳에서 유일하게 사람 냄새가 나는 건 딸의 생일이 비밀번호였던 캐비닛의 자물쇠 하나 뿐이었다.
'저 같은 사람이 그게 쉽겠습니까?'
쉽지 않기에 기적이고 기적은 놓치고 싶지 않은 법. 준혁은 수정에게 모든 것을 건 아버지였다. 설령 불륜으로 이루어진 가정이라 할지라도 그는 지키고 싶었던 것이다. 사랑하는 이의 행복을, 그 행복 속에 들어가 있을 자신을. 그래서 죽였던 걸까. 재호는 도장에서 홀로 울던 시백을 떠올렸다. 준혁은 자신의 행복을 위해 시백에게서 최재석을 앗아갔다. 과연 준혁의 절박함이 시백의 슬픔보다 크다고 정의할 수 있을까. 분명 없을테지. 슬픔이란 깊이는 저마다 다르되 느끼는 무게는 같은 것이니까.
'…재호 씨는 좋은 사람이라고도 말할 수 있겠군요.'
기억은 다시 10년 전 어느 술집으로 넘어갔다. 가만히 앉아 술잔을 기울이던 준혁이 갑자기 입을 열었었다. 그는 항상 그랬다. 한창 대화가 오고 갈 때는 아무 말 없이 입을 다물다가 모든 대화가 끝날 때 비로서 입을 열어 자신의 생각을 얘기했다. 항상 한 템포가 느렸던 사람. 수사팀 모두는 준혁을 양반이라 부르며 느리게 반응하는 그에게 큰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러나 재호는 그런 준혁이 늘 신경쓰였다. 그에게 준혁이는 단순히 느린 사람이 아니라 다가오는 방법을 몰라 멀리하는 사람같아 보였다.
그래서 자주 어울려 다녔다. 방법을 모르는 그에게 방법을 알려주고 싶었다. 일찍 퇴근하는 날이면 항상 술 집에 앉아 시덥잖은 말들을 주고받았다. 종종 미정이도 합류해 셋이서 술을 진탕 마시곤 서로의 어깨에 의지해 어두운 골목길을 걸어간 적도 있었다.
그런 노력이 있어서일까. 상일과 재호의 대화가 끝난 직후 준혁이 재호에게 저런 말을 했다. 좋은 사람이라는 말. 재호는 멋쩍은 기분에 괜히 준혁의 어깨를 툭 치며 과장스레 웃었다. 아 준혁이도 취했네! 양반이 말하면 농담같지 않다고! 그러나 준혁은 그런 재호의 행동을 천천히 시선으로 쫓다 다시금 입을 열었다. 농담이 아니었습니다만 그렇게 들렸다만 사과드리죠. 빛을 받아 은은한 푸른빛으로 도는 눈은 무엇을 생각하는지 도통 알 수 없었다. 재호는 그저 어, 아니 등의 말들을 반복하다 고맙다고 말할 뿐이었다.
'그럼…준혁이는 왜 내가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나?'
'왜라고 물으시면……음…밥도 잘 사주시고, 아프면 병문안도 가 주시고, 동료들에게 늘 맞춰주니까, 라고 대답해드릴 수 있을 것 같군요.'
'……엥? 그것 뿐? 고작 그런 거? …에이, 뭐, 별 특별한 이유도 없었으면서….'
재호는 준혁이 자신의 말에 웃어보였다고 생각했다. 실제로는 아무런 표정 변화가 없었지만, 그래도 그의 무미건조한 얼굴에서 재호는 쓸쓸함이 묻어나는 미소를 보았다고 기억했다. 그것이 한 순간의 착각이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지금의 그의 얼굴에도 그 때와 똑같은 미소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그저 눈을 감고 숨을 멈췄을 뿐인 얼굴임에도 어쩐지 현실에 두고온 딸에 대한 미련과 모든 것을 끝마친 후에 오는 평온함이 섞인 표정을 짓고 있다고 생각했다. 어째서 그런 표정을 짓는 건가? 대답없는 질문은 허공을 멤돌아 다시 재호에게 돌아왔다. 넌 어째서 그런 표정을 짓는 거야.
재호는 가만히 눈을 감고 들려오는 소리에 집중했다. 언제부터 내렸는지 모를 굵은 빗줄기가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빗소리를 뚫고 선명히 들려오는 심장소리는 분명 자신의 것이리라. 가슴 왼쪽에 손을 갖다대면 벽에 걸린 시계의 초침마냥 일정히 두근거리는 심장박동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지금 이 공간에서 들을 수 있는 유일한 삶의 소리였다. 두 사람은 이제 어떠한 소리도 내지 않고서 빗소리에 묻혀 가만히 누워있을 뿐이었다. 그 사실이 재호의 심장을 꽉 쥐어오면서 저도 모르게 눈시울을 붉히게 만들었다. 재호는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내쉬었다. 담배를 피우지도 않았는데 목구멍이 매웠다. 맘 놓고 울어도 될 것을 이상하게도 참아진다. 재호는 꺽꺽 숨을 끊어내면서 눈물을 삼키고 슬픔이 더 이상 나오지 않기를 바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별은 늘 그렇듯 익숙하지 않았다.
때는 가을임에도 비가 억수같이 내렸다. 재호는 가방에서 우산을 뒤적거리다 문득 급하게 나오느라 우산을 까먹었음을 떠올렸다. 결국 그는 빗줄기가 약해질 때까지 건물 앞 처마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쌀쌀한 날씨에 발이 저절로 동동 거려졌다. 아득하게 들리는 빗소리에 눈을 두어번 꿈뻑이다 곧 품에서 담배 하나를 꺼내 물었다. 불이 붙은 담배는 비오는 날의 하늘같은 회색의 연기를 뿜으며 몸 안 깊은 곳까지 들어왔다. 후, 하고 내뱉은 연기가 입김과 함께 뒤섞여 빗방울 사이로 사라졌다.
돈이 넉넉치 않아서 싼 가격에 그나마 좋은 곳으로 골랐다고 한들 낡고 오래된 것은 피할 수 없었다. 이마저도 기자 일로 넓힌 인맥을 사용해 묻고 또 물어 얻은 자리였으니 무어라 불평도 하지 못한다. 부서진 처마로 비가 새어 바로 아래에 깨져있는 유리 위로 물방울이 똑똑 떨어졌다. 깨진 유리는 점점 빗물을 불리다 곧 넘쳐흐르는 것을 막지 못했다. 물방울이 수면에 부딪혀 울리는 소리는 더욱 선명해졌다. 그 소리는 꼭 10년 전 부딪혔던 술 잔의 소리와 닮아 재호는 저도 모르게 귀를 기울여 그 소리에 집중했다. 어디선가 이제는 기억나지 않는 그 날의 소란스러움마저 들리는 듯 했다.
'여기에 가로등이 설치되서 다행이야. 이젠 아연이가 밤에 덜 무서워하거든.'
'골목길은 위험한 일들이 워낙 많이 일어나는 장소니까요. 주민분들이 민원을 자주 넣었다고 들었습니다.'
'응. 나도 넣었었지.'
'덕분에 저도 집에 갈 때 편해졌습니다.'
'필요할 때 이렇게 딱 있어주니 얼마나 좋아. …꼭 재호같다, 이 가로등.'
'……네?'
후우 내뱉는 연기 너머로 흐릿한 두 사람의 잔상이 보였다. 어둑해진 저녁, 갈림길 앞 가로등 밑에 서 있는 두 사람. 함께한 세월은 길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욱 솔직해 질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달빛 한 점 들지 않는 어두운 골목길의 유일한 빛줄기 아래, 두 사람은 서로의 눈을 마주했다. 그 눈동자 속엔 어떤 얼굴이 담겨져 있었는지는 모르나 분명 거기엔 거짓 한 점 없었으리라.
'재호는 필요할 때 곁에 있어주잖아. …그러니까 따뜻한 사람인 거야. 곁에 있어준다는 건…생각보다 어려운 일이거든.'
"……곁에 있어준다, 라……."
가로등의 불빛은 여전히 깜빡거려 그 아래의 그림자 두 개가 나타나고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그것은 과거에 대한 추억의 잔상이었고 동시에 후회로 만들어진 자신의 죄책감이었다. 재호는 느리게 눈을 꿈뻑거리다 뒤를 돌아 복도의 끝에 시선을 향했다. 모든 것을 두고 나오리라 생각했으나 역시 자신은 그러지 않았음에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이것도 제때 곁에 있어드린 건지…전 잘 모르겠습니다…상일 형님…."
재호는 마지막 한 모금을 깊게 빨아들이곤 손가락으로 튕겨 담배값 안에 넣었다. 빗줄기는 서서히 약해져 대충 겉옷으로 막고 가면 될 것 같았다. 소지품들을 바지 주머니에 넣고 겉옷을 벗어 머리 위로 걸쳤다. 재호는 처마 밖으로 나서기 전 다시 가로등을 보았다. 그림자는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다만 달라진 것은 그림자가 하나 뿐이라는 점이었다. 재호는 그 그림자가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있었다. 딸이 기다린다고 먼저 간 상일을 보며 그의 말을 곱씹던 과거의 자신의 것이었다. 재호는 그것에서 눈을 돌리고서 골목 너머로 빠르게 달려갔다.
다음 날, 재호는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후두둑 떨어지는 빗소리에 어제의 비가 지나가는 소나기가 아님을 깨달았다. 습기에 눅눅해진 방은 퀘퀘한 곰팡이냄새가 나는 듯했다. 생각해보면 이 집은 처음 이사오기 전부터 낡아있었다. 거기에 10년을 넘게 더 살아온 집이니 벽에서 비가 스며들어오지 않는 것이 오히려 다행이었다. 재호는 침대에서 일어나 책상에 올려둔 휴대폰을 집었다. 화면을 키자 새벽 5시를 가르키는 전자 시계가 비춰졌다. 어서 준비해야겠군. 재호는 일으켜지지 않는 몸을 억지로 움직여 욕실로 향했다.
몸을 말끔하게 씻은 뒤 재호는 옷장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옷장의 진한 나무의 향은 그 오래된 문을 열면 더욱 강하게 풍기어 순간적으로 인상을 찌푸리게 했다. 옷장 안에는 종류도, 갯수도 몇 가지 없는 옷들이 마구잡이로 개어져있었다. 그 옷들을 하나씩 꺼내어 바닥에 두면서 모두 들어내면 긴 동굴 속에 숨겨둔 보물인냥 감춰저있던 노란색의 보따리 하나가 나왔다. 재호는 그것을 조심스럽게 꺼내었다. 꽉 묶어두었던 매듭을 풀어내면 스르륵 천이 흘러내렸고 그 안에 있던 것이 모습을 보였다. 그것은 다름아닌 검은색 정장이었다. 재호는 정장 위를 손으로 천천히 쓸어내렸다. 절대로 입지 않겠다 다짐했건늘 결국 꺼내게 되었다. 잊지 말자고 하고서 잊어버렸던 것처럼. 두고 나오자고 해놓고 결국 가지고 나온 것처럼. 자신은 항상 이렇다며 재호는 자조적으로 웃었다. 옷에서는 그 날의 비냄새가 선명하게 묻어나왔다.
그래. 그 날도 비가 억수같이 내렸다. 마치 그 사람의 죽음을 하늘이 슬퍼해주는 것같았다. 종교같은 건 없었음에도 말이다. 깜빡거리는 전구에 맞춰 그 날의 풍경이 선명하게 그려져갔다. 풍경 너머론 소중한 이의 죽음에 하염없이 울고 있는 자신이 보였다. 꼭 그러쥔 주먹에는 나약한 자신에 대한 분노가 들어있었다. 주먹을 쥐었다 다시 펴면, 안에 있던 분노가 흘러나오고, 흘러나온 분노는 한 때 동료라 생각했던 자의 멱살을 쥐고서 흔들었다. 재호는 눈물과 빗물에 엉망이 된 얼굴로 그에게 외쳤다. 다 털어낼거라고. 진실을 전부 밝힐 거라고. 지키지 못할 약속은 그때부터 하고 있었다. 진실을 밝힌 것은 자신이 아닌 밝혀주겠노라 약속했던 소중한 이의 딸이었다.
'권혜연 순경입니다.'
죄책감에 얼굴을 볼 자신이 없었다. 사과의 의미로 뒤에서 등록금만 몇 번 대줬을 뿐이었는데 혜연은 스스로 훌륭하게 자라주어 재호의 앞에 나타났다. 제 아비처럼 경찰이 되어 자신의 앞에 선 혜연은 재호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어느 것하나 질책하지 않고 그저 한 아이를 품에 안고 다시 자신의 앞에 섰다. 누구 하나 구하지 못했던 과거의 자신과 다르게 혜연은, 가만히 주저앉아 울기만 하던 나약했던 그 소녀는 자신에게 주어진 선택에 집중하여 진실을 찾아내는 경찰로 자란 것이다. 나약하게 울고만 있던 건 어쩌면 자신이었을지도 모른다. 오히려 자신이야말로 그날의 눈물자국을 주름에 파묻곤 계속해서 울고 있었던 건 아닐까.
낯설지 않은 천의 느낌이 피부를 타고 흘렀다. 사아악, 피부를 스쳐가는 천의 소리가 등허리를 타고 다시 반대편 손끝으로 넘어가 적막한 방 안으로 퍼졌다. 눅눅한 빗내음이 몸 전체를 적시는 것같은 기분이었다. 10년 만의 입어본 정장은 그때처럼 숨통을 조이듯 딱 맞았다.
전국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두 사람이지만 아무도 그들의 죽음을 슬퍼해주지 않았다. 그들은 10년 전 사건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었으며 그저 눈에 보이는 사건의 화제성에 입을 놀리기 바쁜 자들이란 걸 재호는 기자, 그리고 한 때의 형사의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빈소를 차려 굳이 적적한 그 빈방에 들어앉은 이유는 단순했다. 옛 동료에 대한 마지막 예우. 단지 그것 하나. 그 단순한 것 하나를 지켜줄 사람이 재호 한 명 뿐이라는 건 이제 별로 씁쓸한 사실도 아니게 되었다.
지금쯤이면 읽고 있을까. 재호는 오늘 아침, 사식에 몰래 넣어 보냈던 쪽지 한 통을 떠올렸다. 안녕, 이라던지 좋은 아침, 같은 문구들 하나 없이 그저 한 줄. 딱 한 줄의 글을 적어 보냈다. 오늘 두 사람의 장례식을 치룬다는 한 줄. 이것은 옛 동료에 대한 예우의 연장선이었다. 철장에 갇힌 그는 재호와 다르게 마지막 인사조차 나누지 못했으니 말이다.
재호는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선 사진 속의 두 사람을 보았다. 맞지 않는 시선을 억지로 맞춰 자세히 들여다보면 어제 보았던 그들과 달리 꽤 생기있는 표정이었다. 그래봤자 마찬가지로 그리워하던 그 온기는 느껴지지 않았지만 재호는 그래도 사진이 더 낫다고 생각했다. 실없는 생각이라며 작게 웃다 그 웃음소리가 금세 공기 중으로 사라지는 것을 느낀 재호는 무릎을 굽어 올리고서 얼굴을 파묻곤 한숨을 내쉬다 간질거리는 느낌에 손가락으로 바닥을 가볍게 쳐댔다. 방 안엔 여전히 아무도 없었다. 그저 째깍이는 시계소리와 창밖에서 들려오는 빗소리, 그리고 복도에서 울리는 다른 사람들의 울음소리만이 작게 들릴 뿐이었다. 어쩐지 속이 타들어가는 느낌에 습관적으로 품에서 담배를 꺼내어 입에 물었다.
"…그러게 형님은 친구관리 좀 하고 다니지 그랬어요. 맨날 딸만 예뻐하니까 친구가 없지. 준혁이 자네도 그래. 양반 양반 하니까 자네가 진짜 양반이라도 되는 줄 알았나?"
허한 마음에 혼잣말이 는다. 주절거리는 말들에 의미는 없되 감정은 있어서 뱉어내면 낼수록 울컥이는 마음이 다시금 솟아났다. 그러나 말하지 않으면 공허함 사이로 찬 바람이 불어와 시리게 만들기에 계속해서 입을 나불거렸다. 이러니까 나도 친구 없는 놈같네. 재호는 작게 중얼거리며 입에 문 담배에 불을 붙혔다. 실내에서 피우면 안되는 것을 알면서도 그를 제지할 사람이 아무도 없었기에 슬쩍 피워보았다. 후, 하고 숨을 내쉬면 회색의 뿌연 연기가 방 안을 가득 메꿨다.
친구라는 단어가 어쩐지 낯설게 느껴진다. 동료와는 다른 느낌이다. 공적인 자리가 아닌 사적인 자리에서 서로를 의지할 수 있는 관계로 보인다. 재호는 생각했다. 저와 저들은 동료인가 친구인가. 사건을 수사할 땐 동료였다가 술자리에선 친구가 되곤 하여 그 관계를 정확히 정의내릴 수 없었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 그렇지 않은가. 일에서는 동료로, 사석에서는 친구로. 그렇게 서로를 받아들이지 않는가. 재호는 고개를 돌려 빈 빈소를 둘러보았다. 그렇다면 지금 사진 속 그들을 위해 자리를 마련한 자신은 그들의 동료인가 친구인가. 옛 동료에 대한 예우. 그리고, 어쩌면 친구로써의 도리도 함께 들어있을지도 모른다. 자신은 그날의 형사가 아닌 사무실 하나 없는 기자 나부랭이에 불과하니까 말이다.
"…안 그래도 친구없는 사람들끼리만 모여 칙칙해 죽겠는데 또 친구없는 놈이 들어오네."
"뭐, 뭐요?!"
"환영한다는 말일세. 그렇게 노려보지마. 무서우니까."
"아, 안 노려봤거든요…."
문 앞에 서 있던 남자는 삐죽이는 걸음새로 걸어 들어와 재호의 앞에 섰다. 남자의 복장은 여태껏 본적 없던 검은색의 정장이어서 평소와는 다른 차분함이 느껴졌다. 정장은 어디서 났어? 재호의 물음에 남자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기어가는 목소리로 답했다. …관장님이 예전에 사주신 겁니다. 재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말을 끊었다. 더 이어봤자 좋을 것이 없어보였다.
남자는 향을 꽂고, 불을 붙히고, 잠시 고개를 숙였다 자리로 돌아와 절을 올렸다. 재호는 그 모습을 찬찬히 눈으로 좇다 조용히 입을 열었다.
"…솔직히 놀랐어. 안 올 줄 알았거든."
"저도 솔직히 놀랍습니다. 저도 제가 안 올 거라 생각했거든요."
"근데 왜 왔어? 적적하게 고독을 즐기고 있는 나를 방해하러 온 건 아닐테고."
"……인사는 해야될 것 같아서요."
"인사?"
"…이해도, 용서도 안됐습니다. 복수를 위해 설희를 이용한 유상일과 딸을 위해 제 가족을 죽인 준혁 선생님 모두요. 그렇지만…. 그래도…."
남자는 허리를 들어 꼿꼿하게 정면을 바라봤다. 날카롭게 올라간 그의 눈매는 어느 때보다 정중했으며 잔잔한 전등 아래로 비춰지는 녹색의 눈동자는 선명하게 반짝이어 앞의 두 사람을 그대로 담아내었다. 엊그제 분노하고 슬퍼하며 혼란스러움에 가득찼던 눈동자가 거짓이었던 것마냥 지금의 그의 눈은 명확하게 두 사람을 마주하였다.
"…그래도 인사는 해야될 것 같았습니다. 그게 맞는 것 같아서요."
다시 일어서기까지 많이 다친 사람일 것이다. 많이 다쳤다는 건 그가 좋은 사람임을 뜻하겠지. 다치면서도 다시 일어난다. 넘어질 것을 알면서도 꿋꿋하게 걸어간다. 그런 사람은 분명 미련해보이겠지만 그보다 더 확실한 것은 그런 사람이 진실을 꿰뚫어볼 수 있다는 것이다. 재호는 과거의 자신을 떠올렸다. 그리고 근질거리는 감각도 함께 떠올려졌다. 그 감각을 따라 기억의 파도를 타고 넘어가면 그리웠던 그 날의 술자리가 눈에 선히 그려졌다. 무엇을 생각하는지 도통 알 수 없는 푸른 빛의 눈이 자신을 보고 있었다. 과거의 자신이 그에게 묻는다. 그럼 준혁이는 왜 내가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나?
'왜라고 물으시면……음…밥도 잘 사주시고, 아프면 병문안도 가 주시고, 동료들에게 늘 맞춰주니까, 라고 대답해드릴 수 있을 것 같군요.'
'……엥? 그것 뿐? 고작 그런 거? …에이, 뭐, 별 특별한 이유도 없었으면서….'
그래. 준혁은 웃었다. 분명히 웃었다. 한 순간의 착각도, 단지 그렇다고 느꼈던 기억도 아니었다. 술에 취해서 였을지도 모르지만 어찌되었든 준혁은 웃었고 자신은 그런 그가 낯설어 같이 웃었음을 기억해냈다. 늘 무표정이었던 준혁이 지어보인 미소는 정말로 다정하고 상냥하여 전등의 노란빛으로 물들여진 좁은 가게 안, 음식들의 열기로 후끈거리는 그 안의 온기가 모두 그 미소에 녹여져있는 듯 했다. 자네, 그런 표정도 지을 줄 알았군. 그런 실없는 소리를 하기도 전에 준혁이 순서를 앗아갔다. 그는 말했다. 확실하고 정중하게.
'그 모든 걸 고작 그런 것처럼 생각할 정도로 당연하게 여기시니까요.'
재호는 남자의 옆에 앉았다. 그리고 그의 덥수룩한 머리를 크게 두 어번 쓰다듬어주었다. 이에 남자는 화들짝 놀래며 재호를 밀쳐내는등 크게 반응하였다. 뭐하는 거냐, 왜그러냐 등의 불평들이 쏟아지는 가운데 재호는 조용하고 낮게 그에게 읇조리듯 말했다.
"…양시백이 자넨, 좋은 사람이야."
남자, 시백은 재호의 말에 쑥쓰러워져 그를 다시금 노려보았으나 이내 시선을 거두었다. 그 말을 하는 재호의 표정은 침착했고 동시에 진실했으며 그만큼 슬퍼보였기 때문이었다. 재호의 그런 표정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던 시백이었기에 가만히 그를 냅두었다. 재호는 무척이나 슬퍼보였지만 그에게 필요한 것은 어설픈 위로가 아니었다. 그것은 잠시의 안정을 줄테지만 재호는 그것을 원하지 않았다. 깊게 슬퍼하고, 그만큼의 공허에 허덕이다, 마침내 눈물로 그 안을 메꾸어가기를 원했다. 그 눈물이 바다를 이루어 자신과 같은 또 다른 누군가의 슬픔을 안아 그에게 반짝이는 추억을 남길 수 있기를 원했다.
"왜…굳이 참으시는 거에요? 여기선 울어도 뭐라할 사람 없는데…."
시백이 물었다. 재호는 그의 물음을 곱씹었다. 천천히 생각하고, 고민하다 마침내 답해주었다.
"나는 이미 너무 많이 울었거든. 10년 전부터, 지금까지."
흐르는 것들은 아낌없이 흘려보냈었기에 지금의 바다는 메말라져 있었다. 대신 흐른 눈물을 숨기기 위해 깊게 파여진 주름살들이 자글자글하니 이제 숨길 곳도 없었다. 숨기고 싶은 마음도 없어졌고. 공허한 그 땅을 메꾸기 위해서 자신은 그동안 흘렸던 눈물만큼 이젠 삼켜내기로 하였다.
"그만 울 때도 되었어. 그리고…옷에 비냄새가 묻으면 별로잖나."
빗소리가 들려온다. 후두둑 내리는 빗줄기가 제법 굵다. 내일 설희랑 놀러가기로 했는데 비가 그치겠죠? 옆에서 시백이 물었다. 그치겠지. 재호가 답했다. 그칠 거야. 소나기니까. 그저 한 순간 몰려오는 비일 뿐이니까. 그리 말하며 재호는 눈 앞의 두 사람을 향해 다시 허리를 숙여 인사를 올렸다. 부디, 안녕히. 재호의 바람은 빗소리를 타고 흘러 서서히 퍼져나갔다.
비는 재호의 말처럼 다음 날 말끔하게 그쳤다. 오히려 언제 비가 왔냐는 듯 쨍쨍하게 내리쬐는 햇빛이 퍽 우스워 그는 오랜만에 창문을 걷어 그 빛을 잠시 쬐었다. 따뜻하고 평온함에 다시 잠이 오는 것을 겨우 막고선 그는 어제 입었던 양복을 다시 꺼내 입었다. 한 번 입었던 거라고 처음의 조임이 느껴지지 않았다. 재호는 가볍게 숨을 돌리고서 현관문을 나섰다.
"이쪽은 유상일 씨의 유골함이고 이쪽은 배준혁 씨의 유골함입니다."
"아, 네. 감사합니다."
"납골당으로 가는 버스는 잠시 뒤에 올거에요. 그거 타시고 8정거장 정도 가면 납골당입니다."
"이런. 역 놓치지 않게 조심해야겠군요."
재호는 가볍게 인사를 올린 뒤 버스 정류장 의자에 앉아 품에 안아 든 유골함을 내려다보았다. 생각보다 작은 크기였다. 상일과 준혁은 결코 작은 덩치가 아님에도 이 함에 전부 들어가게 된 것이 신기하기도 했다. 가만히 보고있노라면 빵빵거리는 버스의 경적소리에 놀래어 허둥지둥 짐을 싸고서 버스에 올라탔다. 버스는 크게 한 번 덜컹이며 천천히 출발하였다. 창문으로 불어오는 바람이 썩 기분이 좋았다.
나란히 두 칸. 자신의 눈높이에 맞춰서 두 칸. 유골함을 넣고 각자의 칸에 맞춰 주변을 드라마에서 본 것처럼 대충 꾸며주었다. 그들의 사진이라던가 그들이 아끼던 이들의 사진이라던가. 상일의 칸에는 아연의 이름도 같이 넣었다. 시신이 없을 뿐더러 상일도 구속되어 정신이 없었기에 제대로 된 장례 한 번 치루지 못한 아이를 위해 특별히 부탁해서 넣었다. 아주 작고 소박한 공간이지만 아마 그들이 살아생전 겪어왔던 공간 중에서 가장 아늑하고 행복한 곳일 것이다. 오직 좋아하는 것들로만 이루어진 칸. 죽어서 그들이 찾은 행복. 온기 하나 느껴지지 않는 그 행복을 위해 그들은 얼마나 많은 피를 손에 묻혀왔던가.
재호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버스 안에서 유골함을 열어 그 뼛가루를 손에 쥐어보았었다. 조심스레 쥐어올린 그 가루는 겨우 한 줌이었다. 자신보다 훨씬 덩치가 컸던 상일조차 한 줌에 모두 들어왔다. 그것이 어찌나 허망하던지 헛웃음에 떨어트릴뻔한 가루를 겨우 다시 안에 넣었던 것을 떠올렸다. 그래. 한 줌이었다. 그저 한 줌. 그 한 줌의 무게가 어느 것보다 무거움을 재호는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은 비록 유상일과 배준혁이라는 자들의 한 줌의 뼛가루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의 일부였고, 그들의 삶이었던 무언가가 있던 것이기에 한없이 무겁다. 우리 모두 결국 그렇게 될 것을 다들 잘 알고 있음에도 더 나은 삶을 위해, 더 행복하게 살기 위해 발버둥을 쳤던 것처럼 그들도 그러했고 그러함에 피를 묻혔고 여러 생명들을 그 안에 담아내었으니 이보다 무거운 것이 또 있을까.
"…오늘 설희랑 양시백이랑 혜연이랑 함께 놀러가기로 했습니다. 상일형님과 준혁이의 한 줌의 무게를 덜어내준 사람들입니다. 그들마저 그 한 줌에 들어있었다면…무거워서 제가 들고오지도 못했을 거에요. 못했을 거야. 분명히."
주머니 안에서 휴대폰이 크게 진동했다. 에구구. 얘들도 양반은 못되겠네. 재호는 휴대폰을 들어 알림을 확인했다. 문제 메세지가 한 통 와있었는데 발신인은 다름아닌 혜연이었다.
[재호씨, 어디세요? 지금 우리 도착해가는데]
"평생 감사해하세요. 혜연이한테. 그리고 양시백이와 설희한테. 상일 형님과 준혁이 자네를 막은 모든 사람들에게 감사해하고 미안해하세요. 그것이 옛 동료이자 친구였던 제가 해줄 수 있는 마지막 상냥함으로 베푸는 용서니까요."
[내가 그쪽으로 가겠네]
재호는 그렇게 답하고서 휴대폰을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 벌써 가봐야할 시간이었다. 이별은 늘 이렇게 갑작스럽게 찾아와 받아들일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재호는 그들의 유골함을 보았다. 익숙한 이름 석 자가 크게 박혀있는 유골함이 이젠 낯설지 않았다.
"이젠 정말 다 두고 갈겁니다. 제가 두고 오지 못했던 모든 것들을 이곳에 두고 갈테니 적당히 곁에 두다 버려주십쇼. 준혁이 자네도 새겨들어. 알겠지?"
재호는 내려놓았던 짐들을 다시 들춰메었다. 그리고 뒤를 돌아 출구를 향해 걸어갔다. 햇빛에 자신이 비춰지고 납골당 안쪽으로 긴 그림자가 생겨났다. 재호는 그것을 따라 시선을 돌리다 멈추고서 다시 앞을 보았다. 이번에야말로 두고 가는 것이다. 과거에 대한 잔상도, 그리움도, 그리고 후회도. 모두. 자신이 슬퍼했던 모든 것과 기뻐했던 모든 것들을 그들의 죽음과 함께 묻어두자. 한 줌의 무게에 그것들을 함께 실어놓고서 가벼운 몸으로 앞을 향해 걸어가는 것이다.
"…그럼, 안녕히."
휴대폰이 시끄럽게 울린다. 재호는 그것을 받아 들었다. 세 사람의 목소리가 겹쳐서 들려왔다. 재호는 그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그렇게 출구를 빠져나와 언덕 아래로 빠르게 걸어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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