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912

강재인 생축글

"강 비서님, 오늘 생일이시라면서요."

"어머, 양 실장님, 그런 것도 기억해주세요?"

"..본인 생일이 아니십니까?"

"그만큼 의외였다는 거죠."

양 실장님 쪽에서 기억해 줄 필요가 있었던가? 그렇게 생각하는데 양 실장님이 말을 이었다.

"강 비서님이 맡으신 일들이 워낙 많으시니 회장님께서 따로 조기 퇴근을 시켜준다거나 하지는 않으시겠지만 또 모르잖습니까."

"기대 안 해요. 회장님이 어떤 분이신데요."

"어떤 분인데 그러나?"

"그야.....회장님?"

소리도 없이 나타난 회장님의 기척에 표정을 굳혔다. 딱히 험담을 한 것도 아닌데 -이건 조금 기준이 애매하지만- 지레 찔려서 어쩔 수 없었다.

요 근래 기분이 좋아보이셨는데 그 여파가 아직까지도 계속되고 있는지 웃음기가 머무른 얼굴이 나를 보았다.

"자네가 날 위해 많이 애써줬는데, 생일날 만큼은 휴가가 아니더라도 쉬게 해 주는 게 맞겠지."

"..그 말씀은?"

"오후 업무는 장 비서에게 인계하고, 일찍 들어가 보게."

"정말인가요?"

"내가 언제 다른 소리를 허투루 한 적이 있었나, 재인이?"

"그건 그렇지만..."

"서두르지 않으면 오후에 제 때 못 나갈 거야."

"회장님의 호의, 감사히 받아들이겠습니다."

"그래, 가 보게."

무슨 변덕인지는 모르지만 쉬게 해 준다면 나쁜 일은 아니었다. 장 비서님께 이야기를 말씀드리고 오후 업무에 대해 안내하려면 당장 바삐 움직여도 살짝 모자랐다. 뒤에서 두 사람이 무어라고 이야기 하는 게 들렸지만 딱히 관심도 가지 않아서 무시했다.

***

다행스럽게도 제 시간에 저택을 나올 수 있었다.

날씨는 다행히 좋았지만, 곧 생일맞이 휴가를 나와도 크게 할 일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쇼핑하러 가기엔 귀찮고, 장은 지난주에 봤고, 친구..는 부를 만한 사람도 없었네."

누굴 부른다. 그렇게 생각하는데 한 사람이 뭉게뭉게 떠올랐다.

틱틱거리고, 매너가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알 수 없는 사람.

"정은창."

곧 호칭을 정정했다.

"정은창 씨."

지난번에 연락처는 받아두었으니 전화를 못 거는 것도 아니다. 안 받으면 말짱 꽝이지만 그건 걸어봐야 아는 법. 방황하던 마음을 다잡고 공중전화 박스를 찾아 헤맸다. 조금 헤매다가 결국 지나가는 사람에게 물어 공중전화 박스 안에 들어갈 수 있었다. 동전을 넣고 신호음을 가만히 듣는데, 그제서야 날씨가 덥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손부채질을 하며 상대가 어서 받기를 기다렸다.

***

".....뭐?"

-나 오늘 생일이라, 오후 시간부터 휴가 받았거든. 예정에 없이 시간이 비어서 심심한데, 혼자 있기는 싫어. 정은창 씨 방바닥 긁고 있으면 같이 놀자고 전화 걸었어. 어때?

"방바닥을 긁긴 누가..."

-그래, 긁고 있던 안 긁고 있던 무슨 상관이야. 그래서, 대답은?

"알았어. 대신 지금 아직 준비가 안 되어서..조금 있다가 보자고. 지금이 1시 반이니까, 3시쯤에 만나자고."

-나참, 오래도 기다리게 하네. 꾸미고 나오기라도 해? 아무튼 알았어. 우리 저택 오는 길의 사거리 알지? 그 앞에서 봐. 늦으면 안 돼.

"알았어."

정은창은 전화를 끊었다.

강재인이 자신을 이성적으로 염두에 두고 있다는 것은 지난 일들로 알 수 있었지만 정은창은 그 마음에 어떻게 부응해 줄 수는 없었다. 그것은 제 자존감의 부재와 저보다 어린 여성들의 얼굴에서 여동생 정은서를 떠올리고 마는 심리적인 문제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연상의 여성이 괜찮다는 건 또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생일날 혼자 있기 싫다며 전화해 온 것을 모른 척 하기에는 가슴 한구석이 콕콕 찔렸다. 이미 같이 시간을 보내겠다고 대답도 한 박자 빠르게 한 뒤였다. 정은창은 수화기를 들어 번호를 눌렀다.

"응, 나야."

-응, 어쩐 일이야?

"나 좀 도와줄래?"

-무슨 일 있어?

"별 건 아니고..."

***

정은창 씨가 제안을 받아들일 줄은 몰랐지만 2시간 동안 바깥을 배회하고 돌아다닐 순 없어서 집에 들러 옷을 갈아입고, 화장도 고치고, 가볍게 간식거리로 배를 가볍게 채우며 시간을 보냈다. 집에서 백석 저택 근처까지는 버스 타고는 10분. 걸으면 2~30분 정도. 시간이 마악 2시 반을 넘기고 있어서 새로 사고 신지 않았던 베이지색 샌들을 꺼내 신고 집을 나왔다. 한창 더울 시간이었지만 구름이 해를 가리고 있어서 그럭저럭 견딜만 했다.

'늦으려나. 늦으면 잔소리 해 줘야지.'

횡단보도를 건너려는데, 반대편에 정은창 씨가 서 있는 게 보였다. 말끔한 정장 차림에 반쯤 넘긴 머리. 뒷짐 진 팔 옆으로 비죽 나온 꽃다발 끄트머리. 그냥 얼굴 보는 것만으로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해서 기대를 갖지 않았기 때문에, 신호가 초록으로 바뀐 뒤에도 한참 동안 서 있다가 겨우 신호를 놓치지 않고 길을 건널 수 있었다.

"뭘 멍 때리고 있어."

"우리 정은창 씨가 느닷없이 꽃단장 하고 와서 놀라서 그랬어. 꾸미고 나오기라도 하냐고 말해서 그래?"

"그건 아니고..그, 뭐냐, 생일날 사람 만나는데 후줄근하면 그럴 거 같아서."

"그런 배려도 다 해주고. 고마워서 눈물나겠네. 그나저나 옷은 정은창 씨 거?"

"당연히 빌린 거지. 이런 정장 자주 입어볼 리가 없잖아."

"머리는?"

"..친구가 해 줬어."

"옷이 날개라더니, 딱이네."

"생일, 축하해."

키득키득 웃고 있으려니, 정은창 씨가 손에 든 꽃다발을 건넸다.

안개꽃에 장미는 상투적일만큼 흔한 선물이었지만, 상대로부터 그런 흔한 선물조차 기대하지 않았기 때문에 솔직히 기뻤다.

요 근래 생일 축하한다는 말을 들은 게 처음이기도 했고.

"고마워. 그럼 가자."

"잠깐만, 어디 가고 싶은데라도 있는 거야?"

"근처에 그럭저럭 데이트 할 만한 장소 많으니까. 일단 길거리에서 멍하니 있을 순 없잖아."

"알았어. 천천히 걸어가."

"그러죠, 정은창 씨. 저의 에스코트를 받아주시겠어요?"

"에스코트는 무슨..."

"으이구, 손 잡자고도 못 해?"

옷 갈아입고 예쁘게 꾸며도 알맹이는 똑같네.

그래도 기분 좋은 여운이 가시지 않았다. 오늘이 가기까지는 이 여운이 계속될 것 같았다. 이 서울에 온 뒤로 드물게 기분 좋은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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