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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혁+시백/어쩌면 무간지옥

"준혁 선생님, 손 놓으시면 안 돼요!"

투명한 눈물. 그리고 붉은 피가 방울져 배준혁의 얼굴로 뚝뚝 떨어졌다. 둘 모두 배준혁의 것은 아니었다. 까마득한 백색 심연으로 떨어지려는 자신을 꼭 붙잡고 있는 양시백의 것이었다. 배준혁은 위기감도, 두려움도, 슬픔도 없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서 양시백이 저토록 간절하고 급박하게 말하는 데도 하나도 와닿지 않았다. 그런 배준혁의 의지 때문일까. 손은 천천히 미끄러졌다.

"하나만, 하나만요...선생님이, 잊지만 않는다면...!"

"그것이 끝은 아니지요."

배준혁은 손이 맞잡은 양시백의 손을 빠져나갔다.

아니, 그조차 배준혁의 의지였는지도 모른다.

***

"...으음..."

"선생님!"

초점이 맞지 않아 흐릿한 상. 배준혁이 눈을 뜨자 양시백의 얼굴이 제일 먼저 보였다.

안은 흙빛 벽으로 둘러 싸인 천장 높은 동굴이었다. 바닥이 싸늘하긴 했지만 못 견딜 정도는 아니었다.

"..시백 씨?"

"정신 차리셔서 다행이에요..영영 깨어나지 못 하는 건 아닐까 걱정했어요."

"여긴..어딥니까?"

"선생님, 하나도 기억 안 나세요?"

"예...머리가 아파서..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여기는 어디고.."

"저흰..설산을 오르고 있었어요. 눈으로 뒤덮여 있긴 했지만 녹지 않는 곳이니까 며칠 걸리더라도 넘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결론만 떼어 정리하자면, '눈사태' 를 겪었다는 것이었다.

많은 눈들이 파도처럼 휩쓸어가는 것을 포착한 양시백이 얼른 배준혁을 잡아끌어 동굴로 이동했고, 그 과정에서 눈신과 몸에 지닌 도구며 비상식량을 제외한 나머지 장비가 든 가방을 모조리 잃어버렸다는 게 요점이었다.

"...하산할 수 있을까요?"

"사방이 하얘서 방향을 분간하기가 어려워요. 아까 산 중반에 꽂혀있는 표지판을 봤으니까 차라리 산을 넘는 게 더 나을지도 몰라요."

방금 양시백은 하산할 수 있느냐는 물음에 사방이 하얘 방향을 잡기 어렵다고 했었다. 그렇다면 산은 어떻게 넘는가. 장비도 거의 없는 맨몸에, 식량도 넉넉치 않은 상태인데. 모순이었다.

"꼭 그렇게까지 해서 이 산을 넘어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까?"

배준혁은 그 모순을 꼬집었다. 하지만 양시백은 당황하는 빛을 보이지도 않고 대답했다.

"당연하잖아요. 준혁 선생님이 수정이를 보러 가는 길이니까."

배준혁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수정이. 박수정. 배준혁의 딸. 양시백에게 딸의 이야기를 한 적이 있던가? 하지만 양시백은 거짓말 하는 타입이 아니었고, 속내를 감추거나 하는데에는 능숙하지 못 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궁금하긴 했지만 굳이 캐묻지는 않았다. 하지만, 양시백 하면 떠오르는 사람이 있어 그에 대한 것을 묻기로 했다.

"..최재석 관장님은 어디 계십니까?"

"네?"

"아, 아니..그냥..물어봐야 할 것 같았습니다."

"실없는 소리를..선생님, 관장님은 산 아래에 있을 게 당연하잖아요. 배웅받았던 거 잊으셨어요?"

"...그랬던가요?"

"그랬죠."

수정이를 만나야 한다.

만나서. 만나서 무얼 하려고 했지.

얼굴만이라도 보기를 간절히 바랐나?

아니면 다시는 헤어지지 않도록 아이를 제 품에 데려오기를 바랐던가?

배준혁은 양시백이 되새겨주는 목적은 수긍할 수는 있었지만 능동적인 목적 의식을 가질 수는 없었다.

이상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수정이와 관련된 일인데. 배준혁이 고민하는 동안 동굴 입구 쪽에서 바깥을 살피고 온 양시백이 말했다.

"눈보라가 그쳤어요. 마침 날도 밝았고..부지런히 걸으면 산을 넘을 수 있을 거예요."

어찌됐든, 상황이 배준혁을 가만두지 않는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양시백은 다시금 재촉했다.

***

고운 천이 겹겹이 깔린 듯 한없이 부드러운 눈길을 두 사람이 걷고 있었다. 뽀드득하는 소리와 함께 두 쌍의 발자국이 나란히 찍혔다. 하늘은 연한 파란색을 띠고 있어 눈을 덜 피로하게 했지만, 햇빛을 반사하는 사방의 눈들이 눈을 뜰 수 없을 만큼 피로하게 해서 소용이 없었다. 그나마 위안을 가질 수 있는 것이 있다면 비 온 뒤 땅이 굳어지는 것처럼 이 산도 한 차례의 난리를 겪었기 때문인지 바람도 없이 고요하다는 것 정도였다. 길도 가파르거나 하지 않았다.

"길이 이대로만 죽 이어진다면 정말 시백 씨의 말대로 오늘 중으로 산을 넘을 수도 있겠군요."

"모를 일이죠. 눈에 이렇게 덮여 있으면.."

"시백 씨."

"네."

"뭔가, 말을 해야할 것 같은데,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양시백은 걸어가면서 배준혁에게 눈길을 주었다.

"중요하지 않았던 게 아닐까요?"

"아뇨, 중요한...중요한 것이었습니다. 꼭 해야 하는..그런..말인데."

"그렇게 중요하다면 기억하지 못 하실 리 없잖아요. 분명 아무 것도 아닐 거예요."

양시백은 주의를 돌리려 했지만, 배준혁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자신의 기억에 어딘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지금 배준혁의 머릿속에 남은 건 박수정에 대한 것뿐이었다.

그마저도 떠뜸떠뜸 나왔다.

"제가 왜 수정이를 만나러 가는지 아십니까?"

"그야...아버지가 아이를 만나러 가는데 무슨 이유가 더 필요한가요? 보고 싶으니까 그렇지."

"..이상합니다."

정말 이상했다. 배준혁은 박수정의 근처를 맴돌고 있었지만 '만나러 간다' 고 할 수 있을 만한 처지가 아니었다.

죽을 때까지 벗어날 수 없을 터였다. 그런데 이제와 만나러 간다고?

"저는 수정이를 공공연히 만나면 안 되는 몸입니다. 그럴 수 없습니다."

"......"

양시백은 이제 걸음마저 멈추고 배준혁을 바라보고 있었다.

배준혁 또한 걸음을 멈추고 양시백을 바라보았다. 무표정한 얼굴을 본 적이 없었던 것도 아닌데, 양시백의 지금 얼굴은 너무나 낯설었다.

"수정이에 대한 이야기를..시백 씨에게 자세히 들려준 적이 있던가요?"

"..네."

"수정이는..."

'박근태 의원의 딸, 박수정은...사실 저와 장지연 씨의 딸입니다.'

기억 하나가 풀려나온다.

'관장님을..빼앗아서..미안합니다..'

두번째 기억이 덩달아 풀려나온다.

세번째, 네번째, 다섯번째, 셀 수 없는 많은 기억들이 단번에 풀려나와 요동을 쳤다. 기억의 사태였다. 바람 없던 곳에 느닷없이 사나운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발 아래 눈 쌓인 땅도 진동을 발생시키며 온갖 것들을 뒤흔들기 시작했다. 땅이 순식간에 갈라지나 싶더니 배준혁의 발 아래가 훅 꺼졌다. 함께 걷던 길은 이제 섬세하게 조각된 절벽의 형상이 되어있었다. 배준혁이 어딘가를 붙잡고 자시고 하기도 전에 양시백은 그 손을 꽉 붙잡고 있었다.

"...선생님."

"이제 알겠군요. 이제야."

배준혁은 제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었는지 알 수 있었다. 이후 어떻게 되는지까지도.

"나는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 하고 맴돌고 있었군요. 시백 씨는..그런 나를 끊임없이 붙잡았던 거군요."

손을 놓아버려 백색의 심연 속에 몸을 던지면, 양시백은 그것을 구한다. 아무 것도 기억하지 못 하는 배준혁을 구해 '산을 넘어야 한다' 는 목적을 말해주고, 길을 나선다. 아이를 만난다는 경우의 수는 없다. 하산한다는 경우의 수 역시 없다. 산은 영원히 계속되고, 배준혁은 그런 일련의 사건들을 잊으며 끊임없이 지금을 되풀이한다.

"손..놓지 마세요. 제발요. 제가..데려다 드릴게요, 수정이한테..!"

"그럴 수 없다는 걸 나도, 양시백 씨도 알고 있지 않습니까."

양시백은 눈물을 흘렸다. 깨문 입술 사이로 피 역시 맺혀 흘렀다.

그것이 뚝뚝 배준혁의 얼굴을 떄리듯 떨어져내렸다. 이 광경. 이 광경을 몇 번이나 보아왔던가.

"포기하지 말아 주세요. 제가..끝까지 도와드릴 테니까..!"

"시백 씨는 저를 사랑하지요."

양시백은 양손으로 배준혁의 손을 꼭 붙잡고 있었지만 끌어올리지는 못 했다.

배준혁이 그러기를 바라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백색 심연 너머에서 휴식하고자. 포기하고자 마음먹었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쉽사리 포기할 수 없다는 것을 이젠 이해할 수 있지만...전 그 과분한 사랑에 보답할 길이 없습니다. 제 스스로 망쳐버렸으니까요."

배준혁의 손이 다시금 양시백의 손에서 빠져나갔다.

한 차례의 끝이었다. 영원의 끝이 될 수 있을지 없을지는 모를 일이었다.

"부탁입니다. 이젠..저를 구하지 마십시오."

배준혁은 절벽 아래로 삼켜지기 직전 눈을 감아버렸다.

***

만들어진 절벽 위에 홀로 남은 양시백은 은인을 붙잡았던 제 양 손바닥을 내려다 보다가, 몸을 던졌다.

마치 고양이가 높은 곳에서 내려오듯이 절벽의 가장 깊은 곳까지 순식간에, 또 부드럽게 내려오는 모습은 가히 기예였다.

배준혁은 높은 곳에서 떨어졌다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상처 하나 없었다. 마치 잠든 것처럼 두 눈을 감은 배준혁의 모습을 바라보던 양시백은, 그를 부축해 업었다. 절벽의 가장 밑바닥, 그 사이에 놓인 길은 동굴과 이어져 있었다.

양시백이 동굴 속으로 들어감과 동시에, 절벽 아래로 눈보라가 불어닥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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