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퀘글

양지조

"관장님, 여기 달력에 표시해둔 날짜 뭐예요? 수강료 입금날은 아닌데."

제자의 물음에 최재석은 뜨끔한 기색을 드러내지 않으려 노력하며 대답했다.

"어어, 별 거 아냐."

"별 거 아닌데 표시까지 해두셨어요?"

"볼일이 있는데 그렇게 오래 걸리진 않을 거거든."

"그래요?"

"그래."

그럼..뭐.

제자, 양시백은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도장 내 정리정돈에 집중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별 것 아닌 하루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누군가의 악의만 없다면 최재석에게도, 그 날 만날 그의 친구에게도 엇나가지 않을 그런 하루가 될 것이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론 그 악의는 10년이 지난 지금도 사라지지 않고 어떤 형태로든 친구에게 마수를 뻗칠 것이라고 확신했다. 10년 전 친구를 파멸로 몰아넣은 그 자는 능히 그럴 수 있는 사람이었다.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할 지도 모른다. 죽음에 대한 것은 아니었다.

양시백에 대한 걱정이었다. 그를 거두어 함께 살아온 뒤로 오랫동안 홀로 남겨둔 적은 없었다. 하지만 친구를 만나고 그를 돕는 과정에서 어쩌면 오랫동안 양시백을 홀로 남겨두어야 할 수 있었다. 성인이 되고, 얻어맞는 일도 없어지고, 걸려오는 시비에 유연히 대처할 수 있게 되었다 해도 양시백은 최재석의 하나뿐인 제자였고, 가족이었다. 어쩌면, 사정을 미리 이야기했을 때 최재석을 이해해 줄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이 들만큼 양시백은 옹골차게 성장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쳤을 때 최재석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위험하다고 만류할지도 모른다. 혹은 저도 따라나서겠다고 할 수도 있었다. 그런 것을 다 떠나서 최재석은 친구와 했던 약속을 지킬 수 있는 유일한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본의는 아니었지만 오래 전 도움이 필요했을 친구를 돕지 못한 전적이 있었고, 그는 양시백의 아버지를 잃은 것 다음으로 몹시 후회했다. 그러니 어째서 미리 이야기하지 않았냐고 원망받는 한이 있더라도, 어떻게든 자신을 붙잡으려 노력한다고 해도 이번만큼은 친구의 뜻에 따라줄 생각이었다. 그래. 이미 답은 정해져 있었다. 답을 정했다면 최대한 상처를 덜 받을 수 있도록, 최대한 빠르게 제자의 곁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길을 닦을 생각부터 하는 게 차라리 나았다.

"관장님, 멍하니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세요? 이제 곧 애들이 몰려 올거라고요."

"알았다~! 요 녀석, 누구 닮아서 이렇게 똑 부러졌는지."

"관장님 닮았나 보죠."

"그런가?"

"흠, 아닌가?"

"예끼, 관장님 놀리기는."

최재석은 근심 어린 기색을 지우듯 웃었다.

***

그날은 최재석이 의도한 대로 아무렇지 않게 조용히 다가왔다.

생각한 것보다 이른 시간에 눈이 떠졌다. 양시백은 아직 곤히 잠들어 있었다. 최재석은 은행에서 찾아온 돈과 여벌 옷이 들어있는 작은 가방을 메고 관장실을 나왔다. 이른 겨울의 아침 공기는 몸을 움츠러들게 할 만큼 싸늘했다. 친구를 만나기로 약속한 곳으로 가면 자연히 날은 밝게 될 것이고, 양시백은 날이 밝은 뒤에도 한참의 시간이 흐르고서야, 어쩌면 며칠이 소요된 뒤에야 그의 부재를 알게 될 것이다.

장기전이 되면 조금 곤란하겠지만, 양시백이 홀로 도장 일을 처리하는 게 이번이 처음이 아니라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이른바 짬이 찼다는 말이다. 물론 최재석도 죽으러 가는 게 아니었다. 그저 도움이 필요한 친구를 위해서 동행하는 것뿐이었다. 필연적으로 위험해지긴 하겠지만 제 한 몸 간수하는 방법을 모르는 것도 아니었고, 사지나 다름없는 곳으로 뛰어드는 일도 처음은 아니었다. 처음이 아니기에 두 번째, 세 번째는 뛰어드는 일은 그럭저럭 수월했다. 최재석의 언젠가 상상했던 양시백이 것 봐요, 위험한 일이잖아요! 하고 소리쳤다.

걱정마라, 양시. 잘 될 거다.

잘 되지 않을 일이라 해도, 잘 될 거라고 보장할 수 없는 일이라 해도, 여기서 더 나빠지지는 않게 노력해 보겠다.

하나뿐인 가족의 곁으로 돌아가야 하니까. 삶의 터전인 이곳에 돌아와야 하니까.

문이 닫힌 도장을 한 번 쭉 둘러보던 최재석은 짧게 작별인사를 건넸고, 길을 나선 뒤 다시는 돌아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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