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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색도시 전력60분

닫힌 눈꺼풀 안은 당연하게도 검었다.

빛났다가 사라지는 조명의 잔상이 섞여 옅우 붉은빛이 섞인 눈꺼풀 안의 어둠은 이윽고 까맣게 가라앉았다. 여느 날처럼 단락 없는 잠을 청하는 과정이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사방을 가득 채우고 있던 어둠이 물에 섞이듯 조금씩 말갛게 희석되더니 마치 기체인 양 바람을 타고 위로 흩뿌려졌다. 그와 동시에 눈이 번쩍 뜨였다. 서울의 밤하늘임에도 보이는 하얀 별, 건물의 이름으로 세워진 네온사인, 환풍기와 기타 잡동사니가 조금 보이는 것 외에는 지극히 깔끔한 옥상의 전경이 보였다.

아.

탄식이 흘러나왔다. 동훈 빌딩이었다. 만났다 헤어졌던 그 옥상, 그 옥상이었다.

등을 보인 관장님과, 등을 보인 선생님이 보였다. 무어라고 들리지 않는 말을 중얼거리던 관장님이 한숨을 돌리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은 얼굴로 천천히 준혁 선생님을 바라보았고, 준혁 선생님은 관장님의 등에 손을 뻗었고...

"관장님!"

밀쳐졌다!

나는 나였다. 발을 박찼다. 탄식과는 달리 외침은 힘차게 나왔다.

인지하지 못한 얼굴이, 시퍼렇게 보이는 한 쌍의 눈동자는 준혁 선생님에게 왜냐고 묻는 듯 했다. 네온사인의 외장재를 잡으려 했던 것인지 뻗어진 손이 닿을 듯 닿지 않고 시야에서 사라졌다. 나는 또 다시 관장님을 옥상 아래로 밀어넣은 준혁 선생님을 쳐다보았다. 선생님은 아주 천천히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다. 관장님과 같은 색의 푸른 눈빛이었다. 그 눈을 마주 하자 나는 입이 떨어지지 않는 것을 느꼈고,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 옥상 아래의 난간에서 탄탄한 손이 비죽 튀어나왔고, 난간 가까이에 있던 내 발목을 움켜잡아 그대로 잡아당겼다!

"......!!"

쉭쉭거리며 매서운 소리를 토해내는 바람에 휩쓸려 비명을 채 지를 수도 없었다.

다리가 부들부들 떨렸다. 그 기세에 눈도 뜨지 못 하고 내가 보았던 대로의 끝을 맞아야 하는데.

-시백 씨.

선생님의 목소리에 힘겹게 눈을 떴다. 거짓말 같이 눈이 떠졌다. 몸으로 느끼는 것처럼 주위는 온통 수직으로 번진 선의 집합으로만 보였고, 내가 딛고 있는 것은 땅이나 바닥이 아닌 허공이었다. 추락하고 있다. 그 사실이 끔찍하게도 실감나는 와중에 준혁 선생님은 내 옆에서 있음에도 그 어떤 것에도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듯 단정하게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왜 그랬냐고 묻지 않으시는군요.

"...이유를, 알고 있으니까요."

수정이 때문이다. 선생님은 수정이를 지키고자 했고, 그러기 위해서 어떤 수단도 불사했다. 관장님은 그 과정에서 희생되었다.

이제는 서로 알고 있으면서도 구태여 대답을 구하는 듯해서, 겨우 입을 열어 대답했다. 혀라도 깨물 줄 알았는데,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후회하시죠?

"....."

-관장님의 부름에 응한 것, 저를 부른 것, 잠적한 관장님을 찾아나선 것...

준혁 선생님은 나를 다시 한 번 후벼파듯이 질문을 던졌다. 이런 문답은 하고 싶지 않다. 대답의 유무와는 상관없이 고통스러울 노릇이었다. 차라리 끝나게 해 달라고, 추락하고 있는 중이니 어서 꿈에서 깨어나게 해 달라고 빌었다. 더이상의 대화를 거부하듯 눈을 질끈 감자 사람의 손끝이 눈 위로 닿았다.

-눈을, 뜨세요.

그 목소리에는 무언가가 깊은 곳에서부터 끓어올라 내뱉어지는 거친 기색이 묻어있었다. 선생님의 손끝이 떨어지자 내 의사와는 상관없이 눈꺼풀이 열렸다. 수직선의 집합으로만 보였던 건물들은 한 점, 두 점, 새까만 물감에 푹푹 찍힌 듯 삽시간에 묻혀 사라졌다. 우주 공간에 내던져진 것처럼 까만 공간에서는 가슴을 붉게 물들인 준혁 선생님의 모습이 보였다.

"아...."

-시백 씨와 만나지 않았더라면, 관장님도, 저도, 죽지 않았을 겁니다.

미안하다고 말하던 그 때의 눈빛과 목소리로 선생님은, 그런 말을 했다.

빠른 속도로 추락하고 있다는 감각은 계속되고 있는데, 준혁 선생님 만큼은 흔들리지 않았다.

..진심일까? 이게, 선생님의 진실일까?

내가 영원히 알 수 없는 선생님의.

-하지만, 역시 죽었을 겁니다.

대답을 구해보려는 찰나, 영원히 추락할 듯 했던 몸이 딱딱한 어딘가에 내동댕이쳐지듯 부딪히며 끝을 고했다.

대번에 쏟겨지는 물소리. 똑, 똑, 방울져 떨어지는 소리.

"으아아악!"

그제서야 터진 비명에 삽시간에 눈꺼풀이 열렸다. 열린 눈꺼풀 안은 당연하게도 새벽의 회색 빛을 띄고 있었다.

하악거리는 한숨과 등을 할퀼 듯 날카롭게 선 식은땀. 아직까지도 떨리는 손발의 느낌에 한참을 진정하지 못 했다.

***

"시백 오빠, 눈이 퉁퉁 부었어요."

"응? 아, 어제 라면을 먹고 자서 그래."

며칠에 한 번 갖는 설희와의 식사다.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서 괜히 둘러댔다. 평생 꿈꾸는 타입이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요즘에는 이런 꿈을 꾸는 빈도가 늘어있었다. 식욕이 나지 않아서 빈 수저를 달각거리는데, 재호 아저씨가 젓가락으로 반찬을 집어먹고는 그 끝으로 나를 가리켰다.

"오랜만에 봐서 그런가..안색이 영 안 좋은데. 양시백이, 자네 건강 생각해서라도 라면 좀 줄이라니까."

"나참, 밤새면서 인스턴트로 식사 때우는 재호 아저씨가 할 말 아니거든요."

"혹시 모르니 아프면 말하라고. 병원 정도는 같이 가 줄 테니까."

"괜찮다니까요."

-...누구도 죽지 않았을 겁니다.

쨍그랑-

힘이 풀린 손에서 떨어진 숟가락이 도장 바닥에 부딪혀 유독 큰 소리를 냈다.

설희와 아저씨의 눈이 휘둥그래져서는 내 얼굴을 빤히 보았다.

"죄, 죄송합니다. 잠깐 딴 생각을 해서..."

"..정말 어디 아픈 거 아니지?"

"오빠, 어디 아파요..?"

두 사람의 걱정 어린 물음과 눈빛에 손을 몇 번 내저어 분위기를 얼른 환기시키고는 남은 밥을 억지로 우겨넣었다.

꿈 속의 준혁 선생님이 한 말이 쭈욱 귀에 달라붙어서, 떨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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