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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아내와 아들이 장을 보러 간 사이 깜찍하게 찾아왔다네. 어떤가. 차 한 잔 없이 늙은이를 내치진 않겠지?"
"......."
수사국장이자 치안감 하성철은 그리 유복하지 않았고, 집 역시 다소 외지고 거친 길목을 지나야만 다다를 수 있었다. 아마도 차가 들어올 수 있는 데까지는 차를 타고 오고 남은 길은 장희준이 노쇠한 몸을 이끌고 직접 발걸음 했을 것이 틀림없었다. 더군다나 날은 춥고 목적이 어찌됐던 방문한 손님을 말 그대로 차 한 잔 없이 박대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아내와 아들이 돌아온다면 무어라고 이야기 해야 좋을지 몰랐으나 하성철은 침착하게 말했다.
"..들어오시죠."
"실례하지."
작은 탁자 사이에 방석을 두 개 깐 하성철은 부엌으로 가 작은 주전자에 물을 올렸다.
냉장고를 열어 몇 개 없는 귤을 꺼내 접시에 담았다. 낮은 식탁에 놓은 뒤 앉으니 장희준이 한 마디를 툭 했다.
"고향 생각이 나는구만."
"..고향 정취를 느끼고 싶어 오신 게 아닐 텐데요."
"그냥, 내가 왜 자네를 찾아오게 되는지, 뭘 어떻게 하길 원하는 건지 나도 잘 모르겠거든. 내겐 원하는 것을 이룰 만한 힘이 있어. 나의 가족도 있고. 자네는 높은 직위를 가진 경찰의 고위 간부이기는 하나, 자네가 원하는 올곧은 정의를 관철시키기엔 힘이 부족하지."
"그럴지도 모릅니다. 저는, 앞만을 바라보고 있으니까요. 다른 사람들을 서툴게 이끌 순 있으나 결국은 자신이 믿는 것에 집중하므로 그리 훌륭한 상관은 못 될 테지요. 그렇다고 회장님의 손을 잡고 제가 정의라 믿었던 것을 관철시킬 생각은 없습니다."
"오늘은 그런 얘기를 안 했으면 좋겠군."
주황빛 전등 빛에 물든 백발이 잘게 흔들렸다. 노기가 스민 얼굴은 아니었다.
말을 섞기 싫다는 거절의 표현도 아니었다. 그저 살짝 피곤해하는, 곤란하게 보이는 얼굴이었다. 하성철은 그 얼굴을 보니 경찰 상부 회의에서 곤혹스러운 기색을 감추고 작전의 와해를 막기 위해 맞섰던 예전이 떠올랐다. 자신의 의도와 다르게 뻗어나가는 상황과, 속절없이 감당해내야만 하는 무력감과 그럼에도 끝까지 손을 놓을 수 없다는 절박함이 뒤섞이다 남은 앙금이 피로라는 딱지로 치부된 것 같이 보여서.
"...귤 좀, 드십시오."
이야기를 깊이 들을 수도 없고, 들어줄 만큼 친밀한 사이도 아니다.
그래서 하성철은 그런 뜬금없는 -상대로 하여금 새빨간 딴소리로 느껴지게끔- 말과 함께 귤 몇 개를 손에 쥐여주는 수밖에 없었다. 주름과 뼈가 도드라진 손을 잡고 그 손에 귤을 쥐여주고 있으려니 스스로 생각해도 뜬금없어 낯뜨거울 노릇이었다.
"내 입을 막아버리고 싶어서 그런가? 쓸데없는 말 못 하게?"
"그건 아닙니다. 듣기 싫다는 게 아니라...들어도 전 큰 도움을 드릴 수 없으니까요. 회장님께서 가진 것으로도 해결되지 않는 문제가, 저로 하여금 해결될 거라고 생각되지 않는군요."
"놀랍게도, 그렇게 들어주기만 해도 이 늙은이 마음에 도움이 된다네. 딸아이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지 않거든."
"...따님도 성인인 걸로 알고 있습니다. 회장님이 그 어떤 이야기든 해주지 않는 것이 따님의 성장을 무시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일일 수 있습니다."
"나는 내 것을 건드리는 자는 결코 용서하지 않지."
"......"
"그런 성정임에도 자네가 정론인 말들을 늘어놓는 걸 듣는 게 퍽 즐겁군. 나도 나이를 먹은 걸까."
"인간으로서 좋게 봐주셔서 감사하다고 해야할지 모르겠군요."
"개인적으로도 자네를 좋아하네만."
피로감 스민 얼굴에 장난기가 가볍게 얼굴을 들었다.
하성철은 장희준을 멋대로 동정했던 것과는 별개의 곤혹스러움이 솟아나는 것을 느꼈다. 마침 삐익, 하고 물이 끓은 소리가 나서 하성철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손님용으로 몇 개 놔둔 커피믹스 두 개를 꺼내 컵에 하나씩 털어넣고 막 끓은 물을 내렸다. 작은 숟가락 하나를 꺼내 휘젓자 카랑카랑하는 소리가 작게 났다. 먼 걸음 걷지 않고 쟁반에 커피가 든 컵 두 개를 얹어 식탁 위에 소리나지 않게 내려놓았다.
"나는 친구부터도 괜찮네."
"누구 마음대로 말입니까."
"내 마음대로 말일세. 노인네 심통을 누가 이길 텐가."
"다른 사람을 알아보는 게 좋을 겁니다. 친구마저 잃고 싶지 않다면."
"오호라, 그럼 친구부터 시작하자는 말에는 동의한다는 말인가?"
"부딪치지 않는다는 가정 하에서라면, 친구여도 괜찮습니다."
호록, 하성철은 잔을 후후 불었다가 입으로 가져갔다. 장희준은 멍한 표정을 지었다가 큰 웃음을 터트렸다.
그렇게 웃으면 집 밖까지 들릴 겁니다. 하성철이 곤란하다는 얼굴로 제지했으나 장희준은 눈물을 글썽일 만큼 허허 웃었다. 그리고 나서는 커피 한 잔을 깨끗이 비우고 손에 쥐여준 귤을 까 먹은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벗어둔 코트와 모자를 푹 눌러쓴 장희준은 하성철의 인사를 받으며 짧게 덧붙였다.
"생각해 보겠네."
하성철이 잠시 어리둥절해하는 사이, 장희준은 손을 흔들며 문밖으로 나섰다.
눈이 내릴 듯 짙은 먹구름으로 하늘은 온통 회색빛이었고, 장희준이 먼 길 나서며 내뿜는 입김과 모자 밑으로 보이는 백발이 유독 희게 보였다.
하성철은 때떄로 그가 참 쓸쓸해 보인다 싶어 답잖은 생각을 하고는 잠시 우뚝 멈춰 서 있다가 이윽고 눈이 내리자 열려있던 문을 닫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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