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퀘글
졸업
"아저씨, 다음달이면 졸업식이 있는데, 와주실 수 있으세요?"
아버지 손에서 자란 권혜연에게는 친척이 없었다. 정확히는 어머니가 살아있었지만 그는 부녀와 연을 끊고 이뤄놓은 가정이 있었고, 구태여 그를 돌봐줄 필요성을 느끼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어떻게 대답해야 하나 고민하던 주정재는 문득 중학교 졸업식 때에도 혼자였던 건 아닌가, 생각했다. 그가 권혜연을 만났을 때에는 이미 중학교를 졸업한 뒤였다.
"...괜찮으시면요!"
권혜연은 조금 긴 침묵을 그렇게 끊었다.
"우리 혜연이가 졸업하는데 당연히 가야지, 꽃은 뭐가 좋으냐?"
"와주시기만 해도 감사한 걸요! 만약에라도 못 오시게 되면 미리 말씀 해주세요."
"그런 걱정 말어! 아저씨가 한 번 약속한 건 꼭 지키는 거 알잖냐."
"알았어요. 졸업식 다 보실 것까진 없고, 강당엔 사람 많을 테니까 강당 나와서 그 옆쪽에 있는 스탠드 쪽으로 오세요. 친구들이랑 있을게요."
"그래, 알았다."
눈에 띄게 밝아진 얼굴을 보니 마음이 따스해지는 듯 하면서도, 그 밝은 얼굴에 그 아버지의 얼굴을 겹쳐보고 있노라면 거짓말처럼 가슴이 서늘해졌다. 저 아이를 홀로 둔 건 누구던가. 권현석을 기만하고, 조롱하고, 사지에 몰아넣은 사람은 누구던가. 그 얼굴을 마주할 때마다 그런 사실들을 뻔뻔하게 되새기며 살아가면서, 죽어서도 권현석을, 그가 죽자 그의 딸까지 기만하고 조롱하는 꼴이 아닌가.
언제까지. 언제까지?
경찰이 되겠다는 꿈을 버리지 않으면, 자신의 처지와 위치까지도 모두 감수하고도 아버지의 죽음에 몸을 내던진다면, 그리하여 비로소 자신에게까지 닿는다면 그때는.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무심할만큼 안일한 생각을 하며 꽃다발은 어떻게 골라야할지부터 고민하기로 했다.
***
졸업식만큼 사치스러운 게 있으랴. 배부른 처지였던 적이 없었기에 주정재의 그 생각은 몇 해가 지나도 여전했으나, 그런 생각을 권혜연에게 감히 털어놓을 순 없었다. 날씨도 썩 괜찮았고, 좋은 삼촌 행세 하면서 꽃다발과 함께 축하인사를 건넨 뒤 기쁨을 가장해 근사한 식사 한 끼를 하면 그걸로 끝이었다. 졸업식 날이면 학교 교문은 물론 인근 길거리에서 꽃장수들이 진을 치고 온갖 꽃다발을 팔았다. 꽃에 대해선 잘 알지 못했지만 그런 주정재의 눈에도 여느 꽃들보다 특히나 예쁘게 보이는 꽃들이 있었다. 조금 나이가 들어 보이는 노파였는데 퍽 과묵하고 노련해 보였다.
"이모, 여기 잘 나가는 꽃다발 좀 해줘요, 아는 애가 졸업하거든."
"딸?"
"아냐아냐, 굳이 말하자면 조카요, 조카. 조카뻘이지. 응. 가격 좀 비싸도 좋으니 알아서 예쁘게 좀 부탁드립니다."
"그렇구만."
이름 모를 큼직한 하얀 꽃에 마찬가지로 작지만 샛노랗고 둥글둥글한 이름 모를 꽃을 모아 쥐더니, 기다랗고 뾰족한 초록잎을 사선으로 두르고는 흰 국화 몇 송이와 안개꽃, 다른 꽃 몇 송이를 더해 솜씨 좋게 하나로 묶었다. 흰 포장지를 접지 않고 나선으로 주름지게 잡고는 가느다란 끈으로 고정시킨 뒤, 노란색과 연녹색 섞인 포장지로 꽃들을 한데 모아 삼각뿔 모양으로 감싸 주홍빛 도는 붉은색 리본으로 깔끔하게 묶었다. 화려하다곤 할 수 없지만 심플하게 괜찮았다. 생각했던 것보다 가격은 그리 비싸지 않았다.
"많이 파십쇼."
꽃장수 노파는 과묵하게 고개 끄덕이며 다른 손님들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교문에 들어서자 졸업식장 안내하는 커다란 입간판이 있었는데, 적잖은 인파에 그것만으로는 선생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학부형을 안내하는 모습도 종종 보였다. 망가질까 두려워 꽃다발을 조심스레 안고 졸업생들이 있다는 강당으로 향했다. 안에서 울리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니 단상 위에는 학생이 이야기하는 듯했다. 졸업생 대표일지도 모른다. 그럼 졸업식도 슬슬 끝물이리란 의미리라. 스탠드 쪽으로 와서 주위를 둘러보니 졸업식이 끝나기만을 기다리는 학부형들이 보였다.
얼마간의 지루한 시간이 흐르고 하나둘씩 학생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수많은 학생들 사이에서 권혜연을 찾아낼 수 있을까 고민했으나, 졸업식을 끝내고 강당 밖으로 나온 권혜연이 스탠드의 가장 높은 단에 올라 여기저기 휙휙 둘러보는 주정재를 찾는 것이 더 빨랐다.
"아저씨!"
"어, 혜연아!"
주정재는 실례합니다, 실례, 하며 학부형들 곁을 지나 권혜연이 있는 스탠드 아래쪽으로 내려갔다. 몇몇 친구들은 누구셔? 하고 물었고 권혜연은 으응, 우리 아빠 친구! 마찬가지로 경찰 일을 하시는 삼촌이셔. 하고 대답했다. 아빠 친구 삼촌. 틀린 말은 아니다. 친구들은 그렇구나, 하고 납득하며 주정재에게 인사했다.
"졸업 축하한다. 혜연이도, 너희들도. 이제 다들 성인이구나. 혜연이랑 친하게 지내서 고맙고, 내년에도 친하게 지내라."
"감사합니다. 서로 다른 대학 가도 자주자주 만날 거예요!"
"그럼 그럼, 우리 우정 영원히!"
"어이구, 젊다, 젊어! 그렇지, 혜연아, 여기. 꽃다발 마음에 드냐?"
"그럼요, 정말 예뻐요! 향도 좋고요."
"맘에 든다니 다행이다. 그나저나 오늘 같은 날에 근사하게 밥 먹어야지. 뭐 먹고 싶은 거 없냐? 친구들은? 말만 해라."
"아, 저희는 사진만 찍고 가족들한테 가려구요."
"아저씨가 찍어주세요!"
친구들이랑 가족들과 사진도 같이 찍곤 한다는 걸 깜빡해서 낭패감이 들었지만 꽃장수 만큼이나 일회용 사진기를 파는 노점상도 많아서 큰 문제는 없었다. 권혜연과 그 친구들은 그런 실수들을 관대하게 눈감아주었다. 친구들과의 사진이 대부분이었지만, 삼촌하고도 몇 장 찍어봐야 하지 않겠냐고 권하며 등을 떠민 덕분에 주정재도 권혜연과 팔짱을 끼고 분수에 넘치는 사진 몇 장을 찍을 수 있었다. 사진을 찍고 찍었던 두 친구 말고도 다른 친구들도 다가와 인사를 나누고, 축하하고, 아쉬움을 표했다. 생각보다 교우 관계가 괜찮았는지 수가 적지 않아 주정재는 기운이 쭉쭉 빨렸다. 이것이 바로 젊음인가.
어찌어찌 인사를 마치고 교문을 나오자 권혜연이 활짝 웃었다.
"와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내가 다른 날은 몰라도, 생일이랑 이런 졸업식 같은 날은 꼬옥 챙겨줘야 한다고 생각하거든. 걱정 마라. 학교 문턱 오랜만에 밟아보니 나도 감회가 새로운 걸."
"그래요? 정재 아저씨 학창시절도 궁금하다."
"그러냐? 이거 원 그 시절 사진이 남아있을랑가 모르겠네."
없다.
사진도, 그런 시절조차. 순수하게 궁금해하고, 알고 싶어하고, 더 이해하고 싶어하는 그 모습이 갸륵하고 또 기특하면서도,
지금 비치는 이 모습 이상의 구렁텅이를 굳이 먼저 보여주고 싶지는 않았다. 딱, 여기까지만. 지금은 그걸로 족하다고.
"그래서 혜연아, 뭐 먹고 싶냐? 말만 해라. 아저씨가 오늘만큼은 다 사줄 수 있으니까."
"흠...졸업식엔 역시 짜장면이죠."
"우리나라 사람들은 짜장면을 어찌나 좋아하는지...이사해도 짜장면, 졸업해도 짜장면."
"아저씨는 짜장면 싫어하세요?"
"아니, 나도 좋아. 그럼 가자. 최고의 짜장면 먹으러,"
"좋아요,"
어찌됐든, 꽃다발은 주정재의 손을 떠났고
지금은 그저 제일 맛있는 짜장면집이 어디에 있을지 고민하는 일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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