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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색도시 전력60분

쿵쿵쿵-

"관장님이세요?"

관장실 안쪽에서 한창 컴퓨터를 만지작 거리던 -게임 용도로- 양시백은 그렇게 말했다.

쾅!

그리고 대답은 두드린 건지, 걷어찬 건지 모를 큰 소리로 돌아왔다. 아이들 장난인가 싶어 양시백은 그제서야 관장실을 나와 도장 마루를 가로질러 걸어 문을 열었다.

"누구..."

"비켜비켜비켜비켜!"

"우왁!"

"어우, 양시, 왜 이렇게 문을 안 열어? 전화도 안 받고, 문자도 안 보고."

"그, 죄송해요. 게임 좀 하고 있었거든요."

최재석은 양손에 든 봉투를 바닥에 내려놓은 뒤에야 이마에 어린 땀을 닦았고, 뒤에서 북적이던 그림자 둘도 도장 안으로 들어왔다. 유상일과 주정재 역시 땀범벅이 되어 양손에 든 봉투를 내려놓았다. 내려놓을 때 쿵 하는 소리며 봉지 겉이 둥글게 울룩불룩한 것이 적잖은 양의 무언가가 들어있음을 알 수 있었는데, 양시백이 내용물을 확인해보기 위해 하나를 펼쳐본 순간 단내가 훅 도장 안에 퍼졌다.

"이게 웬 과일이에요? 어디서 서리라도 하셨어요?"

"그럼, 아주 해치우느라 고역...이 아니라, 당연히 사 온 거지!"

"농담이에요. 농담. 그, 두 분이 가져온 것도 다 과일이에요?"

"응, 전부 과일이야. 좀 멀리 가서 사 왔지."

"내참, 하루 죙일 과일만 먹을 것도 아니면서 저렇게 무식하게 사오고 난리야."

"먹을 건데."

"먹고도 남지..."

주정재의 투덜거림에 최재석과 유상일이 덧붙였다. 피 대신 과즙 흐를 놈들 같으니, 하고 지쳤다며 주저앉은 주정재는 선풍기를 틀고는 움직일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양시백은 몹시 지친 것으로 보이는 세 사람에게 물 한 잔씩을 나눠주었다. 잠시 숨을 돌린 세 사람 중 둘, 최재석은 양시백을 불러 과일들을 넣는데 열중했다. 참외, 포도, 수박 등을 냉장고 구석구석에 넣은 다음에야 손을 털었다.

"과일 날랐는데 맛은 보게 해 줘야지."

"아유, 그래야지요. 양시, 칼 좀 갖고 와라. 작은 거 큰 거 둘 다 갖고 와."

"옙!"

"근데 재석이 너, 진짜 과일만 먹고 살 생각이냐?"

"라면만 먹고 산 적도 있는데 과일만 먹고는 못 살라고. 자, 웨이-러-미닛."

양시백이 과도와 신문지를 준비하는 동안 최재석은 과일들을 꼼꼼히 씻었다. 참외는 껍질이 깨끗하고 저절로 단내가 났고, 포도는 씨가 없는 것이었다. 씻을 필요 없이 바로 가져온 수박은 무늬가 뚜렷하고 큼직했다. 신문지가 깔리고 과일 놓을 접시며 칼까지 준비하자 최재석이 과도를 들고는 눈짓했다. 못 말려, 하고 중얼거린 유상일이 큼직한 식칼을 쥐었다.

"?"

뭐지, 하고 양시백이 고개를 갸우뚱할 즈음, 최재석이 아래 위로 칼을 움직여 참외 껍질을 깎아냈다. 빠른 것도 빠른 것이었지만 껍질의 두께도 얇은 것이 보통 솜씨가 아니었다. 그 다음에는 4등분하여 접시에 깔끔하게 내려놓았다. 유상일은 수박을 칼 끝으로 살짝 찌른 후 다른 손으로 칼등을 눌러 깊게 껍질 위에 박은 뒤 큼직한 수박을 두 쪽 냈다. 그것을 다시 반으로 가르고 성큼성큼 먹기 좋은 두께로 채썰듯 썰었다. 사람 입이 많은 만큼 얼마간의 과일 손질이 끝난 뒤 양시백이 겨우 입을 열었다.

"..둘이 어디 과일 가게에서 일해본 적이 있으세요? 심상찮네."

"어우, 너희들, 좀 썰어본 테가 난다, 나."

주정재는 포도를 몇 개 쥐어 입으로 가져가며 으쓱했다.

최재석과 유상일은 서로 씁쓸한 눈빛을 교환하다가 쥔 칼들을 내려놓았다.

"자, 그럼 먹어보자고."

"잘 먹겠습니다."

"잘 먹을게."

"잘 먹을게. 뭐, 이미 먹고 있었지만."

수박이며 참외, 포도가 일반적으로 후식으로 먹는 양에 비해 꽤 많았지만 지금 도장 안에 모인 넷 중 둘은 원체 식성이 남다르게 좋아 큰 문제는 되지 않았다. 무더운 날에 작은 에어컨을 살짝 틀어놓고 새콤달콤한 과일들을 늘어놓고 먹는 것은 꽤나 호사스러웠다.

"음, 과일 정말 잘 골랐다."

"내가 고른 거라고."

"우리 주정재 씨, 사람 보는 눈만 있는 줄 알았더니 과일 보는 눈도 있으시다니까."

"야 임마, 형이라고 부르랬지."

"거 같이 늙어가는 처지에 한두살 따지지 말자. 아, 상일이 너도 많이 먹어. 있다가 저 빼둔 거 가져가는 거 잊지 말고."

"벌써 먹는 중인 걸. 고생한 보람이 있게 맛있어서 다행이야. 이 날씨에 과일맛 남다르다고 보증하네 마네 해서 갔다왔더니 물 빠진 거였으면 보증의 대가를 치르게 할 거였는데."

"아잉, 재석이 무서워잉."

"......"

"......"

"미안, 그냥 먹자."

애교 윙크를 찡긋하던 최재석은 에어컨 바람보다 싸늘한 눈빛을 쌍으로 받은 뒤에야 얌전히 참외를 집어먹었다.

"근데 관장님."

최재석이 시무룩하거나 말거나 신경쓰지 않고 반달 모양 이빨 자국을 남기며 수박을 베어먹던 양시백이 오물거리며 입을 열었다.

"저희 정말 당분간 과일만 먹고 살아요?"

"하하, 양시, 사람이 어떻게 과일만 먹고 살겠냐."

"그쵸? 역시. 전 또 관장님이 한창 철이니까 싸게 과일 사서 위장 늘어난 것도 줄이고, 식비도 줄여보고, 과일도 섭취하는 일석삼조 같은 효과를 노린 줄 알았지 뭐에요."

"....."

"설마, 과일 종류가 여럿이니까 원푸드 다이어트는 아냐! 라고 하는 거 아니시죠?"

"....."

"....."

"관장님..?"

끔찍한 침묵이 흘렀다.

유상일과 주정재는 서로의 얼굴을 보다가 최재석을 바라보았다.

"걱정마라, 양시. 이 관장님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으니까..! 다아 식비를 계산하고 산 거라고."

"네네..아니라니 그거 다행이네요."

양시백은 절레절레 젓고는 수박을 마저 해치운 뒤 포도의 가지 부분을 뚝 꺾어 작게 매달린 포도알들을 입으로 가져갔다. 폭발적인 과일 파티를 한 차례 거친 뒤 네 사람은 그새 선선한 기운이 감도는 도장 벽에 나란히 기대 부푼 배를 통통 두드리며 텔레비전에 시선을 주었다.

"근데, 너희 둘, 저녁 먹고 갈 거냐?"

"오늘 저녁 메뉴가 과일이 아니라면 생각은 있는데.."

"아, 난 저녁은 아연이랑 같이 먹을 거라..근데 과일을 이렇게 배불리 먹고도 저녁을 또 먹겠다고..?"

"아직 세 시인 걸. 분명 7~8시쯤엔 배가 고파질 거야. 저녁이라기엔 이르기도 하고. 안 그러냐?"

"그렇죠."

"그렇지."

"그치?"

최재석의 말에 양시백과 주정재가 기기 막힌 맞장구를 쳤다. -주정재야 외부인이니 둘째치고- 유상일은 새삼스레 태권도장 2인조의 엥겔 지수가 몹시 걱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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