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628

정은창 생축글

정은창은 담배에 불을 붙였다. 누군가 그 모습을 봤다면 생일날 아침부터 담배냐고 핀잔을 주었을 것이다.

생일이라고 해서 대문을 여는 순간 폭죽이 터져나온다거나, 머리 위에 뜬 태양이 마음을 바꾼 듯 서늘하다거나 하는 종류의 날은 아니었다.

생일은 그냥 생일이었다. 모든 게 신기하고 모든 게 특별했던 어린 시절에도 생일에 목매던 기간은 짧았다.

딩동-

"...아침부터 누구야?"

정은창은 반쯤 타오른 담배를 재떨이에 대충 비벼끄고 일어났다.

정말 눈 뜨자마자 담배부터 찾았기 때문에 -무엇보다 이른 시간에 누군가 갑자기 찾아올 거란 생각은 전혀 생각도 못 했기 때문에- 머리는 부스스했고 옷차림은 당연스레 약간 후줄근했다.

"여, 정은창! 생일 축하해!"

"미안, 꼭두새벽부터 찾아오는 건 예의가 아니라고 재석이 녀석한테 말했는데, 이렇게 안 하면 생일날에 또 유령처럼 사라질 거 같다면서 아침부터 찾아가야 한다고 고집을 부리지 뭐야."

대문을 열자 아침부터 싱글벙글 웃는 낯인 최재석과 미안한 얼굴의 유상일이 있었다.

유령처럼 사라진다고 말하는 것에 정은창은 어쩐지 웃음이 나왔다. 정보원 일을 계속하고 있긴 하지만 요즘엔 흔히 '건수' 가 없었다. 풀칠할 정도로 하루 벌어 먹고 사는 일들로 남는 시간을 보내긴 했지만 그것도 끊어진 게 며칠 전이었다. 그렇다고 늘어지게 남는 시간을 취미생활로 보내는 것도 아니어서 집에 콕 박혀 있는 것 아니면 외출해서 이곳저곳을 쏘다니거나 그러다가 아는 사람 한둘을 만나 같이 식사를 하는 걸로 백수짓을 전전하고 있었다. 생일날에도 바뀌지 않는 일과였다. (헌데 다른 사람들은 정은창의 이 기나긴 휴식에 차라리 잘 됐다며 기왕 이렇게 된 거 푹 쉬라는 조언을 했다.)

"자, 여기 케이크. 네가 뭘 좋아할 지 몰라서 조각 케이크로 한 판을 채워서 사 오려다 다 못 먹고 버릴 거 같아서 빵집에서 제일 맛있다고 하는 것만 골라왔어. 생일 축하해, 정은창."

"어, 그래..고맙다. 난 네 생일 잘 못 챙겨줬는데 이런 걸 다..."

"에이, 우리 사이에 뭘 그렇게 삭막하게 따지고 그래. 그리고 넌 가끔 나보다 더 끼니를 대충 때울 거 같아서 남 같지가 않더라야."

"나도 배고프면 찾아 먹거든."

"생일 축하해, 정은창. 부족하지만 이거."

최재석이 케이크가 담긴 종이상자를 내민데 반해, 유상일은 꽤 큼직한 반찬통들을 한대 묶은 것을 내밀었다.

"자문을 구한 결과 흡연가에게는 담배 한 보루면 그만이라는 누구누구의 조언이 있었지만..."

유상일은 슬쩍 최재석을 흘겨보다가 다시 정은창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럴 순 없겠다 싶어서 반찬을 따로 챙겼어. 저번에 보니 냉장고가 거의 텅텅 비어있었잖아."

"고마워. 근데 이렇게 많은 걸 언제 다 먹냐.."

"세 끼 밥 꾸준히 잘 챙겨 먹으면 금방 먹어."

아니, 적어도 몇 달은 먹을 거 같은데.

정은창은 종이 상자와 반찬통을 차곡차곡 냉장고에 채워넣었다.

"아, 정은창. 그리고 현석이 형이 작년 생일에 말도 없이 넘어간 거 너무 섭섭하다고, 저녁에 다같이 모여서 식사하자고 전해달라드라. 혹시 약속 있다거나 하면 미리 말해주고."

"내가 약속은 무슨.."

"야, 간만에 다들 모여서 포식 좀 하겠네."

"최재석 넌 언제나 포식하지 않냐?"

"어허, 그 무슨 섭섭한 소리를. 합리적인 소비를 할 줄 아는 문화시민이라면 능히 뱃가죽을 늘였다 줄였다 할 수 있는 거 아니겠냐."

"아닐 걸."

"아니지."

"체, 문화시민들 아니신가보지."

최재석은 입을 불퉁 내밀고 투덜거렸으나 곧 헤헤 웃어보이며 말을 붙였다.

"아침 안 먹었지?"

"일어나자마자 너희가 들이닥쳤으니까, 그렇지."

"그럼 얼렁 씻고, 다같이 밥 먹으러 가자. 배고파 죽겠다."

"집에서 먹는다는 선택지는 없는 거야?"

"어라, 직접 차려주게?"

"...나 좀 씻고, 그러고 나가자."

***

근처의 식당에서 식사를 마친 세 사람 중 정은창은 멀찍하게 떨어져 담배를 느긋하게 피우고 있었고, 최재석과 유상일은 반대편에 마주 서서 정은창이 담배를 태우는 것을 마찬가지로 느긋하게 기다려주고 있었다. 거리가 좀 벌어져 있기는 해도 이야기를 나누는데에는 별 문제가 없었다.

"방바닥 긁기 영 귀찮으면 우리 도장 와서 일일 사범 보조일 하는 건 어때? 애들뿐만 아니라 성인반도 가끔 운영하는데 영 손이 모자라거든."

"일당 줄 여력은 되시고?"

"되니까 물어봤겠지."

"정보원이 일이 없다는 건 좋은 일이지."

유상일의 덧붙임에 정은창도, 최재석도 고개를 끄덕였다. 셋 모두 정보원과 잠입 요원으로서 선진화파에서 지냈던 시간이 있기 때문에 자동반사적으로 나온 행동이었다. 서로 친구가 된 것을 포함해 나쁜 일만 일어난 것은 아니었지만 결코 좋은 시절은 아니었다.

"일자리야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겠지. 설마 요 입 하나 처신 못 해서 굶어죽겠냐?"

"그래, 정은창, 넌 잘 해낼 거야."

"네가 '보증' 하니까?"

"캬, 역시 정은창. 척하면 척이라니까."

"그러다 진짜 보증이나 서지 마라."

"걱정 안 해도 아무나한테 보증 안 서 주니까 걱정 마셔."

"유상일 넌 잘 지내? 아연이..도 얼굴 본 지 꽤 된 거 같은데."

"벌써 6월 말이니까. 새학기 때 소개시켜줬는데 이젠 2학년 1학기가 쏜살같이 지나갔지. 학교 가방 매고 입학식 사진을 찍었던 게 엊그제 같은데.."

"애들이야 원체 잘 크잖냐. 앞자리가 1이 되면 또 남다르게 클 걸. 그럼 아연이가 아빠보다 친구들이랑 노는 걸 더 좋아하게 될 거고..."

"지금도 나보다 친구들을 더 좋아하는데."

"....."

"어..그, 미안하다."

"풋, 농담이야."

유상일은 최재석이 진심으로 미안한 표정을 짓자 킥킥 소리내어 웃었다. 최재석도 한방 먹었다며 함께 웃었다.

"정은창."

"응."

"행복하냐?"

최재석이 기지개를 펴는 동안, 유상일이 정은창에게 그런 물음을 던졌다.

뜬금없는 물음이었다.

"..행복해. 너희들이나 경감님이 제 일상을 되찾아서, 그 곁에 내가 함께할 수 있어서."

"어우, 정은창, 너 그렇게 낯간지러운 말도 할 줄 알았냐?"

"그래, 이런 낯간지러운 말도 할 수 있게 됐다."

"현석이 형도 그 말을 들으면 기뻐할 거야."

유상일은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정은창은 그 미소를 어떻게 받아야 할지 고민됐다.

"그럼 오늘 하루 끝내주는 생일이 되도록 에스코트 해 줄게, 정은창!"

"내가 애냐..."

"덩치 큰 꼬마 정은창이라...귀여운데."

"이렇게 큰 애가 어딨다고 그래? 징그럽게."

"여기 있잖아. 여튼, 방바닥만 긁고 있을 거라면 저녁 때까지 함께 놀아보자고, 정은창."

담배를 다 태운 정은창은 저를 향해 손을 뻗는 유상일과 최재석의 손을 멀끄러미 보다가 하이파이브 하는 것처럼 제 손바닥을 들어 짝 소리나게 맞부딪친 뒤 고개를 까딱하며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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