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를 떠나는 사람들 - 01

모티브는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

정신을 차리고 시계를 보니 어느새 한낮이었다. 휴일이라고 하루의 반을 잠으로 보내는 정도는 아니었는데.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손으로 대충 정리하고 부엌으로 가니 혜연이가 식사 준비를 하는 모습이 보였다.

"아빠, 이제 일어난 거야?"

"그게..그렇게 됐네."

"많이 피곤했었나 봐."

"이제 아빠도 늙었나보지."

"또 그런 말 한다. 정재 아저씨한테 옮았다니까..아무튼, 일어났으니까 점심 먹자."

혜연이가 입을 삐죽이는 것에 픽 웃었다. 정재 녀석이 자꾸 속 썩이면 암 걸린다! 고 말했다던가.

참 실없고도 무서운 소리를 하는데 도 튼 건 전부터 달라지지를 않는 녀석이다.

"아빠 나이 마흔 네 살이면 이제 적은 나이는 아니지 않나?"

"인생이 서른부터라는 말이 있던데 그렇게 치면 아빠는 두 번째 14살인 거라구."

"두 번 늙는 것 같아서 그건 그거대로 슬픈데..."

"거짓말 조금 보태서 아직 30대라고 할 수는 있을 걸, 아빠."

"빈말이라도 고맙네. 그래서 우리 혜연이, 오늘 일정은 어떻게 될까?"

"밀린 일이 있어서 집에서 하려고. 다음주까지 해도 되지만 이번주에는 딱히 약속도 없고 해서 집에서 해결하고 가뿐하게 출근하려고. 아빠는?"

"좀 더 늘어져 있는 것도 나쁘지는 않지만..바깥 바람이나 쐬 볼까 하고."

"잘 생각했어. 내가 지난주에 사 준 옷 입고 가. 모처럼 선물했는데 잘 입지도 않고."

"알겠어. 나갔다 오면서 뭐 살 만한 건 없고?"

"그럼 오면서 간식거리 좀 사 줘."

"오케이! 접수 완료!"

말은 하지 않았지만 스물 여섯 살의 혜연이는 제 엄마를 꼭 빼닮아 있었다. 성인이 되던 날에 가슴이 저릿하도록 느꼈다. 하지만 그에 못지 않게 스스로 선택하고 집중하여 결실을 취하고 보람을 느끼는 모습들이 어찌나 자랑스러운지. 영영 닿을 일 없는 그녀를 만날 수 있게 된다면 혜연이는 이렇게 잘 자랐노라 전하고 싶을 정도였다. 식사를 마치고 자리를 정리한 뒤 혜연이는 제 방으로 들어갔고, 나 역시 씻고 옷을 갈아입은 뒤 밖으로 나왔다. 한겨울이라기엔 크게 춥지 않은 날씨였다.

***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지만, 참 세상 변했다.

말하는 것만으로 세대 차이를 크게 벌리는 일이겠지만 꼭 그렇게만 느껴졌다. 서울 공기가 10년 전보다 더 탁해진 것처럼.

"현석 씨!"

산책로가 딸린 공원에나 가 볼까, 하던 참에 귀에 익은 여자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형수!"

근태 형은 결혼 후 근처로 이사를 왔는데, 그곳이 우리 집과는 집과는 맞은편, 정확히는 앞집의 옆집되는 곳이었다.

그래서 이렇게 외출하는 날에 길을 나서면 종종 형수를 뵈는 일이 많았다.

"오랜만이에요. 그간 잘 지냈어요?"

"경찰 일이 다 그렇죠 뭘. 근태 형도 안에 잘 있죠?"

"네. 저는 교회에 가려고 설희랑 막 나온 참이에요. 설희야, 삼촌한테 인사해야지."

"삼촌, 안녕하세요."

"설희도 안녕. 볼 때마다 쑥쑥 크는 것 같네. 그런 점은 근태 형을 닮았나?"

"그럴지도요. 절 닮은데가 없어서 가끔은 속상해요."

"에이, 형수님, 농담입니다. 농담. 그보다 교회 안 다니셨던 것 같은데..요 근처에서 다니는 겁니까?"

"아, 아뇨. 지연 씨에게 다니는 교회를 추천받았거든요. 몇 년 전 결혼식이 있었던 곳이요. 조금 멀긴 해도 괜찮은 것 같아요. 평일에는 봉사도 조금씩 돕고 있고요."

"우리 형수님, 좋은일 하시네요."

"현석 씨는 어디 가세요?"

"저야 바람 쐬려고 나왔죠 뭘."

"그렇군요. 언제 혜연이랑 저희 집에 오셔서 식사 같이해요. 그 이도 좋아할 거예요."

"알겠습니다. 다음에 근태 형 통해서 연락드릴게요."

설희와 손을 잡고 가는 형수님의 모습은 아버지 일로 힘들어했던 예전과는 전혀 다르게 변해있었다. 바라던 화목한 가정에 속해있기 때문인지 미소가 늘고, 그늘이 가신 얼굴은 행복해보였다. 그리고 그녀의 남편이자 집안의 가장이 된 근태 형 역시도. 늦은 결혼을 걱정했던 것이 거짓말같이 까마득하게 여겨져 웃었다.

"에, 에취!"

갑자기 재채기가 나와 코를 훌쩍였다.

***

"모두, 근무에 이상없습니까?"

"옙, 이상 무...아니, 현석 형님?"

"중간에 대답을 바꾸니까 이상하잖아, 재호."

동네 주변을 산책 겸 휘 돌아본 뒤 시간을 때울 만한 것을 곰곰이 생각하다가 근무 중인 팀원들에게 줄 간식거리를 사 주는 것으로 결정이 났다. 재호는 볼펜 끝을 잘근거리며 물었다가 툭 떨어뜨렸고, 일어나면서 그것을 밟았다.

"어이쿠!"

"잡았다."

"나이스 캐치, 상일이."

"가, 감사합니다, 상일 형님."

"10년이 흘러도 바뀌지를 않아요. 서 형사, 이제 질릴 때도 되지 않았어요?"

"일부러 그러는 거 아니거든?"

"그래서 휴일에 서까지 무슨 일이야, 현석이 형?"

"밖에 나온 겸 생각이 나서 간식거리 좀 사 왔지. 별일들은 없지?"

"그렇죠. 그나저나 휴일까지 저희 생각하셔서 혜연이가 질투하는 거 아닌가 몰라요."

도세훈 형사가 내 손에 들린 짐을 받으며 그렇게 말했다.

재호는 주운 볼펜을 제자리에 두고 다시 앞으로 나와 반대 손에 들린 짐을 받아들었다.

"혜연이는 일이랑 씨름하느라 그럴 여유 없거든. 오히려 늦잠 잤다고 핀잔 주던 걸."

"성장한 자식들의 핀잔을 듣는 것도 부모의 몫이래, 현석이 형."

"네가 아연이에게 핀잔을 듣는 것처럼?"

"우리 아연이가 어느새 다 커서 아빠에게 사랑의 잔소리를 할 줄 알게 되어서 어찌나 기쁜지.."

"어련하겠어."

"기왕에 오셨는데 간식이나 같이 드시고 가시죠, 현석 형님."

"아서, 재호. 같이 먹으면 나는 오늘이 다 가도록 붙들려 있을 것 같으니까."

"서 형사, 작전 실패네?"

"저, 전 진짜 권유였거든요? 도 형사님까지 정말.."

나와 준혁이를 비롯한 몇몇 팀원은 휴일이 맞아 쉬고 있었기 때문에 사무실 안에는 나를 제외하면 간식거리를 반기는 네 사람밖에 없었다.

상일이가 무언가를 떠올린 듯 삼각김밥을 먹다 말고 입을 열었다.

"아, 현석이 형. 내일도 쉬지?"

"긴급 호출할 만큼 큰 사건이 벌어지지 않는다면 이번 주말까지 쉬고 월요일부터 가겠지. 왜?"

"재석이가 형 얼굴 잊어버릴 것 같다고 나한테 종종 이야기해서. 한가하면 얼굴 좀 비춰줘."

"그 정도였나..? 네게 말하는 것보다 내게 직접 연락하는 게 더 빠를 텐데, 재석이도 참."

"그게..계속 연락했는데 형이 연락을 통 안 받았다고 하던 걸?"

"내가 안 받았다고?"

휴대폰을 들어 통화목록을 확인해보니 하루에 한두번, 재석이 이름으로 부재중 통화가 걸려왔던 게 눈에 띄었다.

꽤 자주 걸려왔는데 왜 이제까지 몰랐던 건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정말 그러네. 내일 한 번 찾아가 보든가 할게."

"그래. 수고스러웠을 녀석을 위해 라면 한 봉지라도 좀 사 가고."

"재석이가 라면 한 개 되겠어?"

"물론 5개 들입 한 봉지지. 한 번 먹을 때 2개 반씩은 너끈하게 먹으니까."

재석이의 그 가공할 대식은 언제봐도 놀라웠다.

그 뒤로 시시콜콜한 이야기가 몇 번 더 오갔고, 작은 탁자 위에 펼쳐놓은 간식들은 게눈 감추듯 사라져갔다.

"어느 정도 먹은 것 같으니 이제 다들 일해야지. 나도 이만 가 볼게."

"들어가세요, 현석 형님!"

"그래. 나오지는 마, 넘어져도 책임 못 진다, 재호."

"안 넘어집니다!"

"들어가세요, 경감님!"

"다들, 월요일에 보자고."

팀원들에게 손을 흔들며 사무실을 나오니 하늘에는 어느새 노을이 걸려있는 것이 보였다. 불타듯 빛나는 붉은빛, 고운 주홍빛, 저무는 해가 힘을 다해 끌어모은 듯한 노란빛까지 뒤섞인 노을은 너무나 눈부셔 중심원인 해가 이지러지는 것처럼 보였다. 멍하니 있던 나는 뽀얀 회색빛이 붉은빛의 끄트머리를 야금야금 삼켜갈 즈음에야 다시 발걸음을 움직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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