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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령 배준혁과 양시백

차 위로 떨어져내린 최재석의 몸. 가속도가 붙은 몸뚱이에 실린 힘이 어느 정도였는지 찌그러진 차의 천장이 보여주고 있었다. 양시백은 최재석의 얼굴을 보았다. 아무것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파란색 츄리닝 차림이 보라색으로 보일만큼 고였던 새빨간 피가 울컥거리며 차체를 타고 한 방울, 두 방울, 뚝뚝 흘러 땅을 적셨다.

"허어억!"

양시백은 꿈속에서 최재석의 이름을 부르는 순간 소스라치듯 잠에서 깨어났다. 가슴이 죄어들었다가 풀어지는 느낌은 잠기운이 덜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늘 벅찬 무게를 갖고 있었다. 그 무게를 견디기 힘든 것도 있었지만 양시백이 한겨울임에도 식은땀에 푹 젖어있다는 것에 불쾌함을 느낄 새는 없었다.

-또 그 때 꿈을 꾸었습니까.

최재석의 꿈을 꾸고 나면, 배준혁의 환상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꼭 살아있는 것처럼. 그럼에도 다른 존재라는 듯 미약한 빛을 품고서. 원인 제공자. 살인자. 선생님. 은인. 은인을 죽인 배신자. 수많은 단어들이 양시백의 머릿속에 떠오르고 제멋대로 조합되다가 산산이 사라졌다. 죽은 사람을 원망하는 것만큼 괴롭고 허망한 일도 없다. 무엇보다, 무엇보다도.

-..미안합니다.

위선에 가까울 정도로 듣기 좋은 말만 하는 그의 모습이, 음성이, 진짜 배준혁의 모습이 맞는지. 어쩌면 '저것' 은 양시백 스스로의 나약함이 만들어낸 환영이 아닐지 두려웠다. 두 은인 중 어느 쪽도 선택하지 못하고 증오하는 것조차 버거워해서 이렇게 자기 합리화에 가까운 속 편한 환영을 만들어낸 게 아닌지. 그래서 양시백은 그 환영을 철저하게 무시했다. 아니, 배준혁의 모습을 한 환영을 처음 보았을 때처럼 시선이 흔들리는 것을 자제할 수 없었으나 그 어떤 말에도 대답하지 않으려, 되도록이면 신경조차 쓰지 않으려 노력했다.

-.......

시선이 닿는 것이 느껴지자 식은땀에 젖은 등이 축축해 양시백은 잠시 어깨를 움츠리고는 한 손을 들어 제 뒷목을 감쌌다. 제멋대로 흐른 땀이 날을 세워 뒷덜미를 날카롭게 긁어대는 것 같은 느낌 때문이었다. 아직 깊은 밤인 듯 새까만 도장 안 관장실에서, 미약한 빛을 내는 손이 양시백 앞으로 다가왔다. 은은한 빛을 발하고 있어서 퍽 성스럽게 보일 법도 했다. 하지만, 양시백에게는.

"손대지 마!"

지금의 양시백에게는 그만한 공포가 없었다. 저 손길이 정말 실체로서 닿는다면, 그에 준하는 어떤 감각을 동반한다면, 그리하여 '저것' 이 진짜 배준혁의 환영임을 인식하게 된다면! 그게 아니라 해도 지리멸렬했다. 나약함을 못 견디고 스스로 만들어낸 환영이 자신을 위로한다니, 그런 끔찍함이라니! 양시백은 어느새 울고 있었다.

"크흑....흑..."

최재석이 보고 싶었다. 지금 곁에 있었다면 속상해서 우는지, 두려워서 우는지 정확히 알려줬을 것이다. 제가 곁에 있으니 울음 뚝 그치라고 양시백에게 말했을 것이다. 발 밑이 무너지고 믿음이 배신당해 상처입은 마음은 오래된 상처를 불러일으켰다. 하나도 안 아프다고 입버릇처럼 말했지만 허세를 부릴만한 여유도 이유도 더는 존재하지 않았다. 배준혁의 환상이 뻗은 손은 양시백에게 닿지 않았다. 그저 양시백의 머리맡에 조금 떨어져 앉아 양시백이 울다 지쳐 잠들 때까지 바라보기만 했다. 해가 뜨면 산산이 사라져버릴 미약한 빛을 품은 환상이었다.

***

전날 얼마나 울었는지, 양시백의 두 눈은 퉁퉁 붓다 못해 뒤집어져 있었다.

날이 밝고 나면 환상은 보이지 않았다. 혹시 자신이 충격을 감당하지 못하고 미쳐버린 건 아닌지, 병원에 가 보아야 하는 건 아닌지 걱정되었지만 그럴 돈도 없었다. 숱한 나날들을 허기를 느끼고 늘 먹던 라면 하나를 사서 끓여먹고 뱃속을 달래다가, 지저분한 도장 안을 정리하거나, 힘이 부칠 때 휴식하는 걸로 보내곤 했었다.

뚜르르르-

오늘도 어김없이 막 라면을 끓인 참이었다.

여전히 요금을 내지 못해 발신이 정지된 양시백의 휴대폰이 간만에 벨소리를 냈다.

"여보세요."

-양시백이 휴대폰 맞는가?

"장난 전화에요? 아저씨."

-아 목소리가 양시백이 거 같지 않으니까 그렇지. 밥은 먹었어?

연락을 취한 것은 습격당해 절대 안정을 취해야 한다던 서재호였다. 병원에서 퇴원해 몸을 추스르고 있으며 안부 물을 겸 종종 전화를 걸어왔기 떄문에 양시백은 사람 목소리를 들으며 대화하는 것을 잊어버리지 않을 수 있었다.

"라면요. 지금 먹으려고요."

-계속 라면만 먹으면 몸 상한다.

"뒤통수 맞은 아저씨가 더 걱정이거든요. 딱 봐도 식사 메뉴 저랑 비슷하면 비슷했지 더 나을 거 같지 않더만."

-그건 나에 대한 도전인가?

"뭐래요. 이런 얘기 하려고 전화하신 거에요?"

-그럴 리가 있나. 언제 맘 좀 괜찮아지면 사건 이야기를 좀 들려줬으면 해.

"........"

-..시간이 지나도 얘기하기 어렵겠나?

부탁받은 일이 있다. 해야만 하는 일이 있다. 자신의 나약함에든, 죽은 사람의 잔상에든 이리저리 휘둘려서는 시간만 잡아먹힐 뿐이었다.

결정해야만 했다. 입 꾹 다물고 영원히 깨지지 않을 것처럼, 부서지지 않을 것처럼 나아갈 수 없을 거라면.

"아뇨. 아저씨 괜찮을 때 얘기해주세요. 지난번 명함 준 거 남아있으니까, 말해주시면 제가 그쪽으로 갈게요. 오늘도 괜찮아요."

-무리하지 말고.

"괜찮다니까요. 아마도요. 전부....전부 다 얘기해 줄게요."

...배준혁의 모습을 한 환상을 보고 있다는 것도.

양시백은 고개를 몇 번 주억거리다 전화를 끊고 막 끓어오른 라면을 보았다. 서둘러 먹지 않으면 불어터져 목구멍을 메울 라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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