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615

유상일 생축글

-출소를 앞두고 발송되었어야 할 무명의 편지는 존재하지 않았다.

유상일이 출소했다. 10년 전 비리로 몰락한 경찰 영웅이었던 그의 출소 소식은 생각보다 크게 다뤄지지 않았다. 자리를 떠나기 전 줄곧 기다리던 옛 친구를 만나 밥을 먹고, 이야기를 조금 나눈 게 전부였다. 밥을 먹고 나니 무어라도 할 것이 없었다. 적당히 자리를 파하려는 유상일을 붙잡은 친구는 도와줄 것은 없는지, 갈 곳은 있는지 물었다. 마땅치 않다면 자신과 함께 가자는 말과 함께였다. 유상일이 돌아가고 싶은 곳은 한 곳뿐이었고 그곳은 10년 전 흔적도 남기지 않고 무참히 파괴되었다. 그 점을 몰라서 하는 말이 아닌 건 잘 알았다. 유상일을 걱정하기에, 속내를 터놓고 이야기해 주지 않기 때문에 이대로 사라져 버릴까 두려워 걱정스러워 묻는 말인 것도 알았다. 잘 알고 있음에도 유상일은 부드럽게 친구를 내치며 걱정 말라고, 언제 또 연락하겠다고 짧게 말했다. 뜨거운 눈물을 펑펑 쏟을 것처럼 바라보던 친구는 천천히 손을 놓았다. 연락처를 적은 메모를 주머니에 넣은 뒤 유상일은 친구에게서 등을 돌렸다. 오랜 기간 보지 못했던 절친한 친구를 만나 짧은 회포를 풀고 헤어지는, 평범한 이별 광경이었다.

***

친구. 최재석과 헤어지고 한 시간도 지났다. 유상일은 자신을 불러세운 남자에게 붙들려 근처 커피숍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지금의 유상일은 연락 수단도, 집도, 돈도 한 푼 없었기에 용케도 잘 찾아온다고 생각해도 무리가 없었다. 커피 두 잔이 테이블에 놓였지만 유상일도, 남자도 섣불리 입에 갖다대지 않았다. 뺨의 흉터가 도드라져 보이는 남자가 깊은 눈빛으로 유상일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복수하고 싶지 않아?"

"복수?"

"출소하자마자 박근태에게 복수하고자 하지 않았나?"

"...그랬지."

"그랬다는 건?"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런 복수는 아니라는 의미야. 이대로 명 닿는 데까지 살다가 명이 닿지 않아 죽는 것도 나쁘지는 않지."

"...가진 힘이 없어서라면, 도와줄 사람이 없어서라면, 내가 도와줄 수 있어."

"...근태 형님에게 악감정이라도 있나?"

이 서울의 그 누구보다도 박근태를 향한 악감정이 임계점을 넘었을 유상일이 그렇게 묻자 남자는 외려 입술 끝을 깨무는 것으로 참담한 심정을 드러냈다.

"...친구로서, 너를 돕고 싶다. 그것뿐이야."

"......"

이런 친구는 둔 적 없는데. 유상일은 침묵으로 답했고 남자는 조금 긴 이야기를 시작했다.

자신이 누구였고, 왜 여기에 있는지, 기꺼이 유상일의 복수를 돕겠다고 하는지까지 모두.

"살아있었구나."

"..그래."

"..처음에는, 내가 겪은 모든 것을 되갚아주겠다고 생각했어. 지금의 근태 형님을 있게 한 명예와 라인에서 배척받고 버려지게끔, 자기 손으로 자기 목을 조르는 함정을 파 줄 생각이었지."

박근태 의원에게는 외동딸이 한 명 있다. 아내 장지연이 출산 직후 사망하여 백석 그룹 회장인 장인과의 유일한 매개가 된 아이. 그 아이를 이용한다면 박근태에게 직접적으로 타격을 줄 수 있는 것은 물론, 자신이 겪은 고통과 수모까지 되돌려 줄 수 있었다. 그 아이가 박근태의 피를 타고 났다는 것 외에는 아무런 죄가 없어도, 유아연이 유상일의 딸이라는 이유로 맞이해야만 했던 죽음을 덮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지금도 아연이를 생각하면 입에 칼이라도 물고 근태 형님과 마주하고 싶은 느낌이야. 하지만...난, 내 손을 더럽히지 않고도 나름의 복수를 해낼 수 있다는 걸 깨달았거든."

"네가 입을 피해는? 박근태 쪽에선 이미 네가 출소한 걸 알고 있을 테고, 다시금 말도 안 되는 꼬투리를 잡아서 널 처넣을 수도 있어. 그럴 바에는 차라리.."

유상일은 고개를 저었다. 남자는 무어라고 말하지 않았다.

손을 더럽히지 않는 복수란 무엇인가. 그 복수로 지난 세월의 시름을 달랠 수 있단 말인가. 박근태가 유상일에게 마수를 뻗치게 되면 너무 늦게 된다. 남자가 제 성을 못이기는 것에 비해서 유상일은 이상할 정도로 차분해보였다. 이제야 겨우 자유로워졌으나 모든 의욕이 사라져버린 것처럼, 금방이라도 따사로운 햇빛을 맞으며 죽어버릴 사람처럼 침착했다. 복수에 미쳐 자신을 모조리 불태우려고 나서는 것도 뜯어말려야 할 일이었지만 지금의 무욕도 경계해야할 일이었다. 남자는 지갑에서 자신의 명함을 꺼내 -조금 전 설명한 것처럼, 남자의 명함 속 이름은 유상일이 기억하는 이름이 아니었다- 생각이 바뀌거나 자신의 도움이 필요하다면 연락을 달라고 말했다. 박근태를 제외하고 자신을 둘러싼 인복은 꽤 높은 게 아닐까, 유상일은 명함을 쪽지가 들어있는 주머니에 살그머니 넣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로 갈 셈이야?"

"근태 형님께 인사라고 올릴 생각이지. 같이 갈래?"

***

남자와 헤어진 유상일은 서울 강북을 천천히 오갔다.

그렇게 오간 곳은 백석의, 박근태의 손길이 닿은 곳이었다. 이를 테면 지금도 호화로운 대저택이라거나, 뉴스에도 몇 번 오르내린 적이 있는 소유 빌딩이 대표적이었다. 유상일이 막 횡단보도를 건너 빌딩을 올려다보는데 여자아이가 푹, 하고 유상일의 다리에 부딪혔다.

"꼬마야, 괜찮니?"

디자인이며 재질이 퍽 고급스러워 보이는 외투를 걸친 여자아이였다. 죄송합니다..하고 사과한 여자아이에게서 유아연의 얼굴을 본 유상일은 아니라며 손을 내저었다. 유아연의 얼굴이 슥 가시자 붉은빛 도는 갈색 단발머리 여자아이가 10년도 더 전에 보았던 형수의 얼굴을 닮아있음을 알았다. 멀지 않은 곳에서 검은 세단의 문이 열리더니 운전수가 아이를 뒷좌석에 태웠다. 그 순간 안에서 어떤 손짓이 있었는지 운전수는 반대편 뒷좌석의 문을 열었다. 문을 열고 두 발자국 물러나자 그 안에서 희끗한 머리가 섞인 중년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재킷 끄트머리에 붙은 금뱃지가 낮의 햇빛을 머금도 휘황찬란하게도 번쩍였다. 마지막으로 보았던 때보다 더욱 오만해 보이는 형님의 모습에 유상일은 변한 것도 없다며 웃었다.

"네놈...."

"오랜만입니다 형님. 신수가 좋으시네요. 하마터면 몰라볼 뻔했습니다."

"여기가 어디라고 네놈이 찾아온단 말이냐."

"빌딩을 전세냈지, 땅을 전세낸 건 아니잖습니까, 형님. 지나다니는 모든 사람들에게 이런 식으로 시비를 겁니까? 국회의원이신 분이."

박근태의 세단 뒤로 따라온 차에서 경호원들이 내렸다. 유상일을 에워싸지 않았지만 여차하면 재킷 안에서 무기를 거머쥘 기세였다. 유상일은 박근태와의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고 또 빈손이었다. 제아무리 유상일이 박근태에게 앙심을 품을 것이라 해도 그저 대화를 청했을 뿐인 무방비한 시민을 다짜고짜 제압하고 구타하는 광경이 세간에 좋게 보일 리 없었다.

"나를 이렇게 만들고 현석 형님을 죽게 만들었으면서 이렇게 좋은 대접 받으시니 참 보기 좋으십니다."

"유상일. 출소하자마자 네놈이 하는 일이 고작 날 능멸하려는 거냐?"

"사실을 말했을 뿐이지."

유상일은 처음으로 웃었다. 친구들에게조차 빈말로 짓지 않은 웃음이었다. 광소도 아니었고, 미소도 아니었다.

하하, 버석한 웃음이 건조한 겨울 공기에 흩어졌다.

"조카가 형수를 많이 닮았네."

유상일은 박근태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차창쪽으로 시선을 내렸다. 썬팅이 되어있는지 앉아있을 아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출소하기 전까지 유상일에게 관심조차 없었을 박근태는 유상일의 제 하나뿐인 아이에게 관심이 꽂힌다는 것에는 심기가 사나워진 듯 경호원들에게 손짓해 유상일의 앞을 막았다. 유상일은 경호원들의 얼굴을 휘 살펴보고는 양손을 들며 뒤로 물러났다. 오늘은 이 정도만이었다.

"근태 형님에게 전해줘. 앞으로도 잘 지내보자고."

***

죽음은 속죄가 되지 않는다. 죽어버리는 것, 죽여버리는 것 역시 복수가 될 수 없다. 살아있어야 속죄도 할 수 있고, 복수도 할 수 있다. 박근태는 유상일과의 짧은 만남으로 지독한 불쾌감과 함께 하나뿐인 딸 박수정에게 위해를 끼칠지도 모른다는 점을 상기할 것이다. 지금은 그 감정이 단발적일지 몰라도 점차 시간이 지나고 유상일이 번번이 모습을 보이는 것으로 유상일이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하고 있어도, 이 서울 안에서 함께 살아간다는 사실 하나로 전전긍긍하게 될 것이다. 유상일은 수고와 시간을 들여 박근태가 그렇게 변화할 수 있도록 기꺼이 그렇게 만들어줄 생각이었다.

유상일이 유아연을 잃은 것처럼, 박수정 역시 그와 비슷하게 잃어버리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속에 매몰되도록, 허우적거리도록.

유상일이라는 사람이 이 서울에 살아있는 이상 그런 생각에서 도망칠 수조차 없게.

유상일을 죽여야만 주박같은 생각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결론에 이를 때까지.

그러다가 누군가는 죽고 누군가는 파멸할 때까지!

"날이 좋지, 아연아."

그런 생각들을 곱씹으며 하늘을 올려다보던 유상일은 자신의 손을 잡아오는 유아연을 보며 웃었다.

아직 많은 날들이 유상일의 앞에 놓여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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