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617

생일 자축/재호시백 진단메이커

서재호는 푸하푸하거리며 잠을 도롱도롱 자는 양시백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책상에 앉아 고개를 우측으로 돌리면 자는 얼굴이 정면으로 보였다. 컴퓨터 쪽을 보고 자면 불빛이나 열기가 느껴져서 되려 잠을 이루기 힘들지 않냐는 물음을 던진 적이 있었고, 양시백은 예전부터 늘 그래와서 괜찮다고 대답했다. 너무나도 당연해 생략되어 있었지만 그 사이에는 최재석 관장님과 지냈을 때부터, 라는 전제가 깔려있었다. 뒤통수를 맞은 뒤로 사경을 헤맨지라 어떤 일을 겪었는지 전해들었을 뿐이지만 겪은 것을 타인에게 이야기해 줄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큰일인지 알기에 참 대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권혜연도, 양시백도 강했다. 제 자리를 벗어나지 않고 그대로 나아갈 다짐을 하는 의지는 결코 쉬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부탁받은 일을 해볼까 합니다.

그 결연한 선언과 이채를 띤 눈을 보았을 때부터였다. 서재호가 양시백을 종종 주시하게 되는 습관을 갖게 된 것은.

***

백석 그룹, 그리고 하태성에게만 집중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냐마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이 알아서 샘솟는 재력을 가진 게 아닌 이상 밥벌이를 소흘히 할 순 없었다. 그나마 양시백은 자주 서재호를 찾아오곤 했다. 1순위로는 근처에서 일거리를 찾았기 때문이었고, 2순위로는 도장에 돌아가고 싶지 않아서, 3순위로는 서재호가 보고 싶어서였다. 서재호는 내가 고작 3등이란 말이지? 하고 가볍게 놀렸지만 사실 1등이건 3등이건 별 감흥이 없었다.

"짜잔, 맥주 사왔어요!"

"어이구, 우리 양시백이가 이제 공경도 다할 줄 아는구만."

"늘 잘했거든요."

서재호는 그러셔요? 하며 가볍게 마른 볼에 뽀뽀를 하고는 맥주와 안주거리가 든 봉투를 받아들었다. 널려있던 책들은 이 방문자가 준 동거인이 되었을 때 책장에 꽂은 지 오래였다. 신문지를 쫙 펼친 뒤 착착착 안주를 늘어놓고 맥주 캔을 봉투에서 꺼냈다. 여름날 맥주는 빨리 마셔 없애야했다. 그 점에서는 두 사람의 주도가 꼭 맞았다.

"오늘은 별일 없었어?"

"어휴, 무섭다 무섭다 하면서 시비는 있는대로 걸더라니까요."

"요즘 젊은 애들이란.."

"저도 요즘 젊은 애들인데요."

"양시백이는 얼굴 빼면 합격점이거든."

"쳇!"

"내가 좋아하는 얼굴이니 좀 봐줘."

서재호는 양시백이 앞머리 끝을 잡고 비비 꼬는 버릇이 있다거나, 날 선 눈빛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게 좋았다. 좋아한다는 말을 주고받게 된 것도, 서로의 상처와 외로움을 지우고 지게 된 것도. 너 나 할것 없이 위태로운 와중에도 의지가 되어주고 싶다고 생각하게 된 것까지도. 그렇게 마음이 흐르고 변하게 된 것까지도. 서재호가 그렇게 낯간지러운 말을 던지는 것에 퍽 익숙해진 양시백은 씩 웃으며 서재호의 볼을 쭉 잡아당겼다.

"그만 놀리고, 건배해요."

"자, 건배, 건배."

***

여유가 되는 날이면 서재호와 양시백은 서울 중구와 종로구를 돌아다녔다. 성중경찰서, 백석 빌딩, 백석 그룹 본사와 그 중추인 회장 -병환을 이유로 칩거하고 있다는- 이 머무르는 백석 저택 주위를 살피며 길목 구석구석을 익히는 것은 덤이었다. 백석 측의 압박은 은연중에 심화되고 있었지만 이제는 하태성도, 권혜연도, 양시백도, 서재호도 발을 뺄 수 없었다. 사활이 걸려있었기 때문이었다.

양시백은 처음과 달리 혼자가 아니었다.

최재석은 이제 없었지만 홀로 바닥을 허우적거리며 헤매지 않아도 되었다. 하지만 혼자가 아니기 때문에 잃을 수 있다는 점은 때때로 양시백을 지독한 불안감에 잠기게 했다. 권혜연을, 홍설희를, 서재호를 잃게 된다면, 저의 행적으로 그들을 잃게 될 위험에 맞닥뜨리게 된다면 지금보다 더 견딜 수 없게 될 것만 같았다. 실제로 혼자가 아니었던 하태성은 제 주위의 모두를 잃었기에 복수하는 길을 선택했다.

'도복. 저 불쌍한 눈을 한 녀석을 돌봐달라고. 이런 결말이 되지 않도록.'

하태성과 마주하려면 그 두려움에 대한 답을 내야할 것 같았다. 생각에 빠져 먼저 앞서가던 양시백은 제 빈손을 잡아 드는 것에 뒤를 돌아보았다.

서재호가 맞잡은 손을 들어 살짝 흔들며 말했다.

"동행자가 있을 때는 보폭을 맞춰서 가야지."

서재호는 눈웃음을 지으며 양시백을 바라보았다.

양시백은 잠시 머뭇거리다 고개를 끄덕이며 곤혹스런 생각들을 잠시 뒤로 미뤄두었다. 아직은 다소의 유예가 남아있었다.

"그러지 않을 거면 기다려줘, 같이 기자고."

같은색 눈동자가 서로를 바라보며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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