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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한달 후

...상일이가 죽은지도 어느덧 한달이 지났다.

매정한 노릇일지도 모르지만 어느덧 알게 된 사람들 모두 제자리로 조금씩 돌아가고 있었다. 재호 씨와는 앞으로도 백석을 쫓겠다고 했다. 나 역시 꼭꼭 감춰둔 것들을 풀어내야 할 때라고 생각해 서로들 몸이 나아지면 이야기를 해 보고자 약속을 잡았다. 양시 녀석은 자기가 해야만 하는 일을 찾아낸 상태였고, 권혜연 씨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아직 건강을 핑계로 두 사람에게 해야 하는 이야기를 애써 피하고 있었다. 입이 백 개라도 할 말이 없었지만 반드시 확인해야만 하는 게 있었다. 만나야만 하는 사람이 있었다.

사람을 찾는 건 10년 전에도 했던 일이다.

지금 찾고자 하는 사람은 몇 주 전 사라진 사람이었다. 권혜연 씨가 그에 대해 종종 얘기를 했었다고 하니, 합류 직후 절대 안정을 이유로 배제되지 않았다면 금방 알아차릴 수도 있는 문제였다.

"주정재!"

이놈을 만나기만 하면 한방 먹여줄 생각이었다.

아니, 한방만 아니라 수없이 때려줄 거라고 마음먹고 있었다.

하지만 한달이라는 시간이 흐르면서 어쩌면, 어쩌면 이미 죽었거나 죽어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분노가 온전히 마음을 지배하지 못하고 있었다.

"주정재, 야, 이 자식아!!"

없는 돈을 탈탈 털어 뒤를 캐는데 썼다. 제발 이번에는 허탕이 아니길 빌며 낡은 창고 문을 열어제꼈다. 그리고 익히 아는 냄새에 없는 솜털까지 쭈뼛 섰다. 화약 냄새였다. 이 장소에서 총격이 있었다는 말이다.

"......."

거기에, 피냄새가 났다. 바깥과 통해 있는 문을 저도 모르게 닫고 냄새가 풍겨오는 곳을 향해 걸어갔다.

수증기를 두른 듯 한꺼풀 꺾여보이는 광원. 쓰러진 사람. 코트를 입은 채 서 있는 칼을 든 남자. 과거에 두고 왔던 살인과 유혈에 대처하는 자세가 반사적으로 되살아났다. 멍하니 있어서는 안 됐다. 쓰러진 사람이 내가 그토록 찾던 사람이라도. 고여있기만 했던 피냄새가 뒤늦게 자욱하게 퍼지기 시작했다.

"...당신, 누구야?"

"......"

"백석의 사주를 받고 온 거야? 그런 거냐고!"

칼에 의해 누군가를 잃는다. 그 누군가는 소중한 사람이었고, 소중한 사람이었다.

아저씨에 이어 10년이 지났건만 그 광경이 되풀이되는 것에 구역질이 다 날 지경이었다. 달려가 피흘리는 몸을 짚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살아있다면 옅든 짙든 이 적막한 복도의 침묵을 깨뜨려야 마땅한 피 섞인 숨소리가 나야 옳았다. 하지만 출혈량은 점점 늘어가고 있었고, 숨소리는 일체 나지 않았다.

"누구냐고 묻잖아!"

"...최재석. 살아있다는 소식은 들었어."

"..백석이야? 관계자를 모두 죽이려고? 그때처럼!"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조명은 사선으로 비춰져 목 위로는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칼에 묻은 피, 손목에 튄 피, 옷에도 몇 점 튀어있는 피가 현실감 없이 붉었다. 흉기를 주의하며 거리를 좁힐 생각이었다. 남자가 툭 입을 열었다.

"..이봐, 길막이."

"이런 상황에서 무슨 헛소리를..."

길막이. 길을 막는 사람.

과거 작전을 수행하던 때 그런 역할을 맡아 경찰과의 공조를 맞추기 위해 노력하던 때가 있었다.

'아까 봤어. 가방잡이를 한다고 했지? 난...길막이로 지원했어.'

'넌 내 이름 아냐? 계속 가방잡이라고 하네.'

길막이가 길을 막으면, 가방잡이가, 물건이 든 가방을 확보한다.

"정은....창....?"

코트를 입은 남자가 한 발자국 나오자 사선의 그림자에서 빠져나온 얼굴이 멀끔하게 드러났다. 왼뺨에는 흉터가 있었고, 얼굴은 젊은 시절과는 판이하게 달라져 있었다. 그러니까, 정말 다른 사람같았다. 그저 같은 것은 눈 색 정도였다. 피로해 보이는 눈을 하고 있었다. 정은창, 이라고 생각되는 남자가 조용히 말했다.

"..이건, 복수야."

"복수?"

"..그래. 경감님의 복수이기도 하지."

'전, 권현석 경감님의 딸, 권혜연이라고 해요.'

경감님 이야기를 듣자 권혜연 씨가 퍼뜩 생각났다. 몸서리 칠 새도 없이 궁금한 것 투성이였다.

"..이 녀석이 무슨 짓을 했는데?"

"경감님을 사지로 몰아 결국 죽게 만들었지. 날 이렇게 만든 장본인이기도 하고."

"..꼭, 죽여야만 했어?"

"너도 짐작했겠지만, 이 녀석은 박근태의 주구로 암약해 경감님에 이어 유상일을 죽게 만들었어. 내가 지금 죽이지 않았다면 여기서 총을 쏜 사람을 죽일 예정이었고."

죽은 줄로만 알았던 친구가, 옛 친구를 죽였다. 그 옛 친구는 용서받을 수 없는 일들을 저질렀다. 또한 저지르려 했다.

백석, 박근태 휘하였다면 그렇게 저질러 온 일들을 아예 없었던 일처럼 무마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아저씨의 일처럼. 가슴 한쪽이 욱신거렸다.

"나는, 이 녀석을 죽이고 나서야 내가 정은창이라고 말할 수 있게 됐어. 너무 늦었지. 너무..."

"정은창.."

"..살아있어서 다행이야.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어."

"가, 같이 가자. 가서 얘기하자. 묻고 싶은 것도, 듣고 싶은 것도 많아. 그러니..."

"그럴 수는 없어. 할 일이 있으니까."

"...또 다시, 살인을 저지를 거냐?"

"..죽이지 않겠다고 약속할 수는 없어. 선진화파에 있었던 시절에도 나는 살인자였지만..유상일을 부수고 경감님을 죽게 한 놈들을 뒤쫓을 거니까."

"....."

"...경찰에 대해서는 나에 대해서 이야기 해도 좋아. 하지만 나를 막지는 마라."

"정은창!!"

두발짝 다가섰던 것이 거짓말인 것처럼, 전혀 모르는 얼굴을 한 정은창은 등을 돌려 그대로 뒤에 있던 문을 열고 장소를 빠져나갔다.

또 다시, 상일이 때와 같은 실수를 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을 하다가, 이제야 주정재에게 시선을 돌릴 수 있었다.

"바보 같은...바보 같은 자식아...그렇게 살아남겠다고 했으면서."

때려주고 싶었다. 그러려면 살아있어야 했다.

살아서 흠씬 두들겨 맞고 형량을 곱빼기로 받아서 속죄를 마음에 새기고 살아나가야 했다. 죽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이렇게 시체와 마주하게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어느새 눈물이 고여 턱 아래로 줄줄 흐르고 있었다. 친구라는 녀석들이 하나같이 비참한 행보를 밟았다는 것에 도장을 차리고 10여 년 간 나 몰라라 하며 살아온 것 같아 그저 눈물이 났다.

"...경찰...경찰에...연락을..."

눈물이 펑펑 나와서 112 세 자리 숫자를 도저히 누를 수가 없었다.

멎고 나서야 떨리는 손끝으로 겨우 신고를 마칠 수 있었다.

상일이가 죽은 지도 어느덧 한달이 지났다.

그리고 오늘, 주정재가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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