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st
안개 낀 길 위.
그 길 위에 유상일이 있었다.
-근태 형.
별도 달도 없는 밤하늘의 도로 위. 밤이 깊지 않아 오고가는 자동차 한둘쯤 있을 법 한데 안개가 짙어서인지, 교통사고가 빈번하게 일어나는 곳이어서인지 자동차는 한 대도 지나가지 않았다. 그런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길 한가운데 저렇게 서 있는 것이겠지. 유상일은 두 팔 벌려 어서 오라는 듯 근태 형, 근태 형, 부르기만 했다. 저가 다가오지는 않았다. 물론 내가 선뜻 다가가는 일도 없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유상일이 교통사고를 당해 죽고 장례를 치른 지 벌써 한 달이 지났으니까.
그러니까 저 모습도, 달큰하게 부르는 목소리도 헛것일 것이 분명했다. 1km. 적지 않은 거리인데도, 인정하기는 싫지만 노안이 온 눈임에도 흰 옷을 입은 유상일의 모습이 지나치게 선명하게 보였다. 마치 이 세상에 존재가 아닌 것처럼. 또렷하게만 보이는 유상일이 밝게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여기까지 와주었잖아?
"네가 내 일상을 좀먹었으니까. 이제 그만 날 내버려둬라."
-나는 모르는 일이야.
그리고 다시 한번 방긋 웃을 뿐이었다.
한숨이 턱 풀려나왔다. 유령이라도 사람 마음을 꿰뚫어보는 통찰력 같은 것은 없는 모양이다.
-가르쳐줘. 내가 근태 형의 일상을 어떻게 좀먹었는지.
"......"
흰옷을 입은 유상일은 조금씩 걸어왔다.
넓었던 거리가 반으로 좁혀졌을 즈음 더 이상 참지 못 하고 외쳤다.
"얘기할 테니, 거기서 다가오지 마."
-응. 알았어.
유상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입은 것처럼 흰 웃음이었다.
***
-근태 형. 상일이가...상일이가.....주, 죽었대. 교, 교통, 사고로.
둥근 안경을 쓴 남자가 슬피 우는 목소리로 들은 소식을 말했다.
나 이전에, 나보다 더 오랜 시간을 유상일과 함께했던 남자였다. 둘은 서로를 가족같이 여겼고, 그 때문에 비통한 소식을 전하던 남자가 눈물로 말을 제대로 잇지 못 하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거짓말이에요! 상일 경위님이 돌아가셨을 리 없다고요!
갑작스레 내려앉은 침묵을 억지로 찢어 깬 것은 짧은 머리칼의 여성이었다.
놀라마지 않다가 그 소식을 처음으로 전해들은, 안경을 쓴 남자가 바들바들 떨며 어쩔 줄 몰라하는 것에 거듭 재촉하다가 결국 제풀에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내 기억대로라면 유상일을 사모하고 있었던 것으로 안다.
-벼, 병원..이러지 말고, 병원....그 병원으로 가 봐요! 분명 상일 형님은 살아계실 거라고요. 그렇죠? 형님?
덥수룩한 머리의 남자가 애써 울지 않고 되려 소리를 높여 말했다. 억지로 웃는 듯한 목소리였다. 그러자고, 그래야만 한다고. 그들은 상급자였던 내게 양해를 구했다. 나 역시 유상일이 그렇게 죽었을 리 없다고 생각했다. 그 당시에는 나 역시 안경을 쓴 남자처럼 유상일을 어여삐 여기던 사람이었기에, 하던 업무를 중단하고 유상일의 안위를 확인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걱정했다. 두려워했다. 죽지 않았을 거라고, 죽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하며 연락을 받은 병원으로 향했다.
그 때 느꼈던 아찔함은 지금 이 순간 느끼는 분노와 필적하는,
아니. 지금 느끼는 분노보다 더한 것이었다.
***
-그런데 말야 근태 형.
"뭐지?"
-그 사람들, 기억 안 나?
"..뭐가 말이지?"
-이름이라던가, 자세한 인상착의 같은 거 말이야.
"그런 쓸데없는 걸 물어보고 싶은 건가?"
-쓸데없다고 생각해?
"그래."
대략적인 형상이 어땠는지는 기억하고 있지만, 이름이나 얼굴이 어땠는지 이상하게도 기억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그런 것을 따지는 것이 쓸데없다 싶어 무시하기로 했다. 유상일은 흐응, 하는 소리를 내며 내 얼굴을 물끄러미 보았다.
-그래서?
"....."
병원에 당도해 시체를 확인한 건 나였다. 다른 팀원들은 유상일의 죽음을 인정하지 못했고, 또 진정되어 있지 않은 상태였다. 나는 그때 보았던 유상일의 얼굴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꼭 잠든 것처럼 보였다. 비록 상체 아래로는 형용할 수 없이 참혹한 몰골이었지만 목 위만큼은 깨끗하기 그지없었다. 몇 번 세차게 흔들어 깨우면 깊이 잠들었던 것을 알지도 못하고 일어날 사람처럼. 그때 나는 울었던가? 아니면 웃었던가? 아니면 내가 아는 얼굴을 하고 있지만, 내가 아는 사람은 아닐 거라고 현실도피를 했었던가?
잘 기억나지 않았다.
-함께 죽었다면 좋았을 텐데.
유상일이 웃음기를 지우지 않은 채 말했다.
"...뭐라고?"
-근태 형은 그때 그렇게 생각했어.
"거짓말 하지 마라."
-사실인걸.
"난 그렇게 생각한 적 없어."
-그렇겠지. 그래서 이렇게 우리가 대화하고 있는 거고.
"죽었다면 이대로 편히 잠들어라. 산 사람을 현혹시키지 말고."
유상일은 마지막 말에는 긍정하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네가 나타난 건 그 뒤였지."
-장례를 치른 지 일주일이 지났을 때, 근태 형이 내 목소리를 들었고 그게 시작이었지.
"넌..내게 기억해 내라고 했어. 나를 보고 싶다고 했어. 그러니 자신을 찾아오라고 꼬들겼지. 처음에는 네가 죽었다는 슬픔에 환청을 듣는 거라고, 내 약한 마음이 만들어낸 환상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너는, 너는, 날 저승길 길동무로 삼고 싶어서 내 일상을 좀먹고 날 병들게 만들었어. 나를 소중히 여기고 있다고 말했던 주제에!"
-근태 형은 그걸 좀먹었다고 말하고 싶은 거야?
"그래!!"
-그럼 나는 어째서 근태 형을 좀먹었을까? 저승길 길동무로 삼고 싶었다면 긴 시간 들여 그렇게 피를 말려버릴 수도 있었어. 달큰하게 꾀어서 스스로 죽어버리게 할수도 있었고. 그런데 내가 왜 여기까지 굳이 와 달라고 부탁해야 했을까? 근태 형은 지금, 아주 중요한 것들을 잊고 있어.
"잊어? 내가?"
-안아줄게. 그러니까, 잘 생각해 봐.
어느새 가까이 다가와 있던 것인지, 흰옷 소매가 나부끼는 게 보였다.
처음 보았던 그때처럼, 두 팔을 벌렸다가 나를 꼭 안았다. 온기가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는 것이 더욱 공포였지만, 꼭 생전의 유상일처럼 느껴졌다.
'꼭 안아줄게.'
그 순간 반짝하고 유상일이 말했던 것이 떠올랐다.
지금과는 정반대인 검은 상의를 입은 채였다. 차에 타기 전, 작별을 고하는 인사라며 꼭 안아주곤 했었다. 유상일의 오랜 버릇이었다. 하루 자고 가면 안 되냐고 가벼운 응석같은 것을 부리던 것을, 휴가 끝나고 또 보자던 말과 함께 보낸 것은 나였다.
유상일은 그대로 차를 몰고 나갔고, 그대로 교통사고를 당해, 사망에 이르렀다.
***
마지막으로 보았던 검은 옷. 전체적인 체구. 연락처. 엉망이 된 얼굴. 끔찍한 고통과 함께 죽음을 맞았을 유상일. 유상일. 유상일. 피처럼 붉은 섬광이 눈을 가렸다 사라지는 것 같았다. 허우적거리며 유상일을 떨쳐냈다. 다리에 힘이 풀려 더 이상, 서 있을 수가 없었다.
"내...내가....?"
-근태 형.
"내가 죽였어...? 내가...그때 너를...보내버려서...아니, 그 차를..운전하지 않아서..그러다 네가...죽어서...날 원망....?"
-근태 형.
갑자기 머리를 얻어맞은 것처럼 말이 제대로 이어지지 않았다.
붙잡았더라면 유상일이 죽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원망할 여지가 있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리고 죽은 자신을 탓하는 행위를 규탄할 법도 했다. 긴 시간 자신을 좀먹어드는 것에 죽도록 미워했지만, 사랑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시체를 마주하고도, 장례식 당일에도, 긴긴 행렬과 눈물바람에도 나오지 않던 눈물이 나왔다. 주체할 수 없이 쏟아져 시력에 관계없이 또렷하게 보였던 유상일마저 흐리게 보일 정도였다.
-정신차려.
떨리는 손으로 시야를 가리는 눈물을 닦아냈다. 그 어떤 이야기에도 웃음을 잃지 않았던 유상일은 처음으로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조금 전 상냥하게 안아주었던 것조차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안은 손을 푼 유상일의 말이 이어졌다. 주저앉은 나와 서 있는 채인 유상일의 높낮이 차는 까마득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당신은 시체의 얼굴을 보지 못 했어. 얼굴을 보지 못 했지만, 당신이 품었던 육체는 기억했기 때문에 죽은 자가 유상일이라는 걸 알았지.
-사인은 교통사고. 처음에는 자신이 죽였다고 생각했어. 그 다음에는 자신이 유상일을 붙잡지 못 해서 죽게 한 거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했고.
-그리고 그런 착각을, '유상일의 망령' 이라는 착각으로 덮어 감쌌지.
"유상일."
-불쌍한 사람. 불쌍한 근태 형.
"..상일이."
-불쌍한 나.
무표정하던 유상일은, 이제 측은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기억나지 않는 것들은 여전히 기억이 나지 않았다. 머릿속에서는 지금 막 깨어난 기억과 이곳에 오기까지의 기억이 마구 뒤섞여 엉망이었다. 검은 옷을 입은 유상일이 포옹해오던 기억. 작별인사를 하던 것. 사랑한다 말하고 사랑한다는 말을 들었던 것. 사고를 당하기 직전까지도 동승했던 기억과, 사고를 당하기 전 아무것도 몰랐던 자신의 모습이 공존했다. 양립했다. 둘 모두 선명한 기억이었다.
-근태 형은 나를 사랑하지. 나를 너무 사랑해서, 어느 순간 돌아버리고 말았어. 하지만, 진짜 유상일을 사랑하는 마음이라는 것이, 내가 가짜라는 걸 알아서 나를 만들어낸 주제에, 내가 존재하는 걸 용납할 수도 없게 된 거야.
유상일은 이제 등을 보인 채 걸어갔다.
휜 자국이 뚜렷하게 남아있는 가드레일. 유상일이 사고를 당한 지점. 처음 거리를 단숨에 좁혔던 것처럼 멀어지는 순간도 순식간이었다. 자신의 차가 낸 자국을 어루만지던 유상일은 작게 웃었다. 비웃는 조롱조도, 아니었다. 기억속에 잠든 유상일의 미소 짓는 얼굴과 같았다.
"..유상일..!"
언제 일어났는지 알 수 없었다. 알 필요도 없었다. 풀렸던 다리로 자리에서 일어나 뛰는 것이 엉거주춤하게 느껴지기만 했다.
곧 떨어질 것처럼 보이는 유상일을 그저 안아주고 싶었다. 그뿐이었다. 마지막에 해주지 못한 것을, 이제라도.
유상일은 자신에게 뛰어든 박근태를 품으로 끌어들였다.
-함께 죽게 해 줄게. 당신의 상일이로서.
고통없이.
밤이 가고 아침을 향해 접어들려는 때였다.
박근태가 알았던 것, 마지막까지 알고 있었던 것은 이제 모조리 안개속으로 사라졌다.
안개같은 것은 처음부터 길 위에 존재하지도 않았는데도.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