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212
양시백 생축글
양시백은 가끔씩 서울을 배회했다.
도장은 여전히 폐업 신세여서 먹고 사는데 지장이 있었지만 그동안 먹어온 세상 물정이 있어서 입 하나 정도는 풀칠하며 살 수 있었다. 넉넉하지 않음에도 겨우 쥐어짜낸 여유를 짧게 만끽한 양시백은 따뜻하진 않지만 춥지도 않은 옷차림으로 도장을 나섰다. 날은 햇빛조차 얼음으로 빚어낸 것처럼 싸늘했지만 개의치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뚜렷한 목적지가 있지는 않았다. 한 달 전, 어느 때보다 길었던 3일동안 지나온 발자취를 더듬는 것에 불과했다. 많은 사람을 만났고, 그만큼 많은 일이 있었다. 그 속에는 최재석에게 품었던 오해와 분노, 화해와 이별이 있었다.
양시!
멋대로 떠올리는 탓인지, 아니면 정말로 어디선가 양시백을 지켜보고 있다는 증거인지, 익숙한 사람의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올 때마다 양시백은 가슴을 후벼파는 고통과 허망하게 그를 잃고 말았다는 슬픔을 느꼈다. 혼자였으니 걷다 말고 감정이 북받쳐 눈물이 나오면 그대로 흐르게 두어도 괜찮았다. 아무도 없는 길가에서 벽에 등을 기대고 소리 높여 울어도 상관없을 터였다. 하지만 양시백은 눈물을 보이지 않았다. 최재석이 숨을 거둔 직후, 그리고 그의 장례를 치를 때 쏟은 눈물이 있었다는 이유에서였다. 뜨겁게 쏟아지는 눈물조차 능히 얼려버릴 겨울이었다. 점차 기세를 더해가는 겨울은 아직 지나지 않았고, 부탁받은 일도 끝마치지 못한 상태였다. 겨우 몸을 추스른 지금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았고, 아무것도 끝나지 않은 상태였으므로 사적인 감정에 짓눌려 스스로를 약하게만 할 눈물을 보이기엔 턱없이 일렀다. 여기저기 상처자국 선명한 마음속은 회색이었지만, 서울의 거리는 그런 양시백을 감싸안았다. 얼음으로 빚어 열기라곤 없을 것 같았던 오렌지색 햇빛은 양시백의 머리를 뽀얗게 달구며 나아갈 길을 비추었고,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아 익숙한 사람을 떠올리게 했다.
"...관장님."
간절한 부름일수록 짧은 법이었다.
***
지잉.
매너모드로 설정된 휴대폰에서 잠깐의 진동이 울렸다.
-양시백 씨, 오늘 쉬는 날이라고 하셨죠? 다같이 저녁 먹어요. 재호 씨가 잘 아는 곳이 있다고 하니까, 퇴근 후 바로 재호 씨네 집으로 갈게요.
권혜연이었다. 잠시 멈추어 서서 알겠다고 답장한 양시백은 얼어버린 손을 주먹을 몇 번 쥐었다 펴는 것으로 풀고는 또 다시 걷기 시작했다. 시간이 한낮에 가까워지자 햇빛은 잠시나마 추위를 누그러뜨렸다. 아무런 생각없이 돌아다니려 했건만, 이번에는 다른 의미로 착잡해졌다. 문자를 확인하고 답장을 보내기 위해 잠시 멈춰 섰을 때, 멀지 않은 곳에서 인기척이 느껴진 탓이었다. 허술하게 인기척이 느껴진 곳으로 시선을 주지는 않았다. 1억의 보증 빚은 없던 것이 되었고, 정리정돈을 마친 도장 안이 뒤엎어지는 일도 사라진데다 상대를 살피며 미행하는 것이 이제까지 대범하게 나왔던 백석 그룹의 소행같지는 않아서 순수하게 궁금할 뿐이었다. 총상을 입었던 종아리가 마음에 걸렸지만 그럭저럭 나았기에 여차해서 몸싸움을 벌이게 되어도 상관없었다. 양시백은 자신을 미행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확인하기 위해 적당한 골목길을 골랐다.
터벅터벅.
터벅. 타박.
탁.
막다른 길 한가운데에 선 양시백은 천천히 등을 돌리며 입을 열었다.
"누군진 몰라도, 이제 그만 나오지 그래? 그렇게 티 나게 사람 뒤를 쫓아와 놓고선."
미행에 지독하게 서툴거나, 감출 생각이 없거나. 양시백은 후자라고 생각했다. 쭉 미행해왔던 상대 역시 양시백이 이렇게 나오리라고 예상했는지 금방 모습을 드러냈다. 뺨에 있는 흉터가 특징적인 중년 남자였다. 셔츠 위로 가죽 재킷을 걸친 남자의 눈은 깊게 패여있었는데, 유상일에게서 느꼈던 감정들이 그 눈에서도 똑같이 느껴졌다. 한 눈에 봐도 위험해 보이는 남자였지만 적개심이 느껴지지 않았고, 또 한 지점이 양시백의 시선을 마구 잡아끌어대는 통에 어리둥절할 따름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남자의 품에는 색색 꽃들로 풍성해 보이는 큼직한 꽃다발이 들려 있었다.
칼? 아니면, 총?
양시백은 꽃다발 안 깊숙한 곳에 사람을 위협할만한 흉기가 들어있는 게 아닌지 유심히 살폈으나 남자는 양시백이 의심하고 경계하는 것에도 아랑곳않고 한 걸음 두 걸음 거리를 좁히다가 몇 걸음 앞에서 꽃다발을 내밀었다. 차가운 겨울 공기속에서 꽃향기가 살그머니 코끝을 스쳤다. 조화가 아닌 진짜 꽃이었다. 양시백은 꽃다발과 남자의 얼굴을 번갈아보다가 입을 열었다.
"..당신, 대체 누군데..."
"오랜 친구의 아들뻘 되는 녀석에게 인사 정도는 해야겠다 싶어서."
오랜 친구. 아들뻘. 양시백은 얼결에 꽃다발을 받아들었지만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관장님을...알아?"
"그래. 최재석 대신이라곤 할 수 없겠지만...생일 축하한다, 양시백."
"관장님 친구라면 잠깐 이야기를.."
남자는 양시백의 말에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젓더니 한 걸음 뒤로 훌쩍 물러섰다.
"..생일선물 받은 김에, 혜연이에게 안부 전해줘."
그리고, 서울을 배회하는 건 이제 그만둬.
여전히 무표정했음에도 양시백은 남자의 말에서 쓴웃음을 느꼈다. 남자는 등을 돌려 빠르게 자리를 떴고 골목길에는 양시백만이 홀로 남겨졌다. 정말 이상한 생일날이다. 그렇게 생각한 양시백은 선물받은 꽃다발을 뚫어져라 훑어보다가 남자가 특별히 언급한 권혜연에게 어떤 말로 그의 안부를 전해야 할지 멍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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