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레

쿵쿵쿵.

쿵쿵쿵.

쿵쿵쿵.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잠이 깼다. 눈꺼풀이 무거운 것을 보니 비가 왔거나, 곧 오거나, 흐리거나 셋 중 하나였다. 누군지는 모르지만 꼭 안에 사람이 있다는 걸 아는 것처럼 무시하려고 하면 주기적으로 두드렸다. 아는 사람의 범주에서 이 집 주소를 아는 사람을 꼽아보았다. 저토록 끈질기게 두드릴 사람은 세 명 정도 있었다. 둘은 욕을 한 바가지로 퍼붓기 좋았고, 한 명은 욕이 아니라 다 죽어가도 쾌활하게 맞아주어야 했다. 어느 쪽이든 저쪽에서 목소리를 내지 않는 이상 문을 열어봐야 했다. 일어나서 작은 창을 보니 젖은 나무가 앙상하게 낙엽을 떨구고 있었다.

"...누구세요?"

자다 깨서 그런지 목소리가 낮았다.

"안ㄴ"

쾅.

말이 끝나기도 전에 얼른 문을 닫았다. 퍼런 머리. 퍼런 눈. 흉내내기도 힘든 웃는 얼굴. 최재석이었다. 괜히 잠만 깼다 싶어 궁시렁거리는데 닫혔던 문이 벌컥 열렸다.

"너도 참 사람을 그렇게 문전박대하냐?"

"야, 안 나가?"

"같이 밥 먹으러 온 거니까 성질머리 좀 참아라."

"뭐 이런 놈이 다 있어?"

"놀랍게도, 그런 놈이다."

최재석은 흰 비닐봉지를 들고 있었는데 제 집처럼 자연스레 부엌으로 갔다. 겉옷을 한 곳에 벗어두고 소매를 걷어 손을 씻은 뒤 비닐봉지에 든 것을 하나하나 꺼내기 시작했다. 카레가루에 양파, 감자, 당근, 버섯, 고기 조금에 사과 하나였다.

"밥 먹으러 왔다더니?"

"집밥 먹자고. 넌 맨날 식당만 가냐?"

가끔은, 혜연이의 솜씨가 들어간 반찬을 맛보곤 했다. 사치스러운 반찬에 목이 멜 노릇이라 집밥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아닌 밤중 홍두깨처럼 나타나 집밥을 먹자고 하는 최재석도 그리 좋지 않았다. 하지만 지가 제 돈 주고 사 온 재료로 알아서 차려 바치겠다는데 걷어찰 필요는 없겠다 싶었다.

"요리는 잘 하기나 하냐?"

"사실 처음이야."

"뭐?"

"농담이야. 카레 정도는 뚝딱이라고."

"..너, 맛없으면 죽는다."

"맛있다고 울지나 마셔."

최재석은 양파 껍질부터 벗기기 시작했다. 도와줄 생각 없다는 걸 잘 안다는 듯 도와달라고 빈말로도 안 하는 게 10년 동안 눈치를 안 기르진 않았구나 싶다가도 기분이 나빴다. 도로 방으로 들어가 TV를 틀어놓고 재방송하는 드라마를 중간부터 보는데 방음도 안 되는 집구석인지라 문틈으로 도마와 식칼을 꺼내는 소리며, 싹싹 써는 소리, 통통통 두드리는 소리가 그대로 들렸다. 조금씩 달라지는 소리로 재료를 하나 둘 짐작할 즈음 드라마가 끝나버렸다. 영 집중이 되지 않아 도로 부엌가로 나왔다. 뭐가 그리 좋은지 최재석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썰어둔 재료를 식칼로 한데 모아놓았다. 녀석의 등은 티셔츠에 가려질 만한 게 아니어서 괜시리 손을 뻗어 등줄기 한가운데를 위에서부터 아래로 죽 훑어내렸다.

"재미 좋나 봐."

가장하지 않아도 되는 놈들 앞에 서면 빈정거림이 숨쉬듯 튀어나왔다. 흠칫하던 최재석이 고개를 돌리지 않고 왼손을 살짝 들었다.

"나 칼 들었는데."

"놓칠만한 놈 아니잖아?"

"너무 갑작스러워서 놀랐다고."

목소리에 바삭바삭 배인 옅은 당혹감을 확인하자 꼭 입으로 깨물어부수는 느낌이었다. 코웃음을 작게 치고는 등허리를 톡톡 두드렸다.

"찔리면 곤란하니까 여기까지만."

"성은이 망극하다."

"성은은 개뿔이."

부엌 바닥에 앉아 최재석이 작은 냄비에 야채를 넣어 골고루 볶고, 카레가루를 곱게 개어 붓고, 보글보글 끓으며 그럴듯한 냄새가 날 때까지 국자로 끊임없이 저어대는 것을 바라보았다. 사 먹어봐서 몰랐는데 되게 오래 걸리는 구나. 그럴듯한 냄새가 맛있는 냄새로 발전했을 때 최재석이 말했다.

"야, 주정재."

"왜."

"밥 좀 떠."

"싫은데."

"그럼 이거 저을래?"

"뜬다. 떠."

주걱으로 넓적한 밥그릇 두 개에 듬뿍 떠 가스레인지 옆 싱크대 선반에 올려놓았다. 옳지, 하고는 불을 끄고는 카레를 듬뿍 덜었다. 옆에서 보지 않았더라면 최재석이 한 거라고는 못 믿을 정도로 평범한 카레였다. 상을 펴고 김치통을 꺼내온 둑 인수대로 수젓가락 척척 놓는 폼이 이 집 주인이 내가 아니라 최재석이 됐나 싶었다.

"잘 먹겠습니다."

"....."

"야, 잘 먹겠다고도 안 하냐?"

"잘 먹을게."

갑자기 옛 친구놈이 와서 밥해주는 광경이 어디 흔한가. 쇼킹한 경험인지라 대충 인사하고는 한 숟가락을 푹 떠서 먹었다.

맵지도 않았지만 싱겁지도 않았다. 맛있었다. 내가 했다면 이도 저도 아닌 게 나왔을 게 분명했다.

"..맛있네."

"그치? 카레는 잘 할 줄 안다고."

최재석은 땀이 뻘뻘 난 이마를 손등으로 톡톡 두드리고는 먹기 시작했다. 당연하지만 3분 카레보다 훨씬 맛있었다.

뭣보다 집밥다운 집밥이 오랜만이어서 식욕이 꽤 났다. 사이좋게 두 그릇을 뚝딱하고서야 식사가 끝이 났다.

"다음에 한번 먹으면 딱~ 끝날 걸. 아쉬울 때 그만 먹는 게 비결이지."

"그래서 라면은 2개 반 먹냐?"

"넌 라면과 구공탄도 모르냐?"

"모른다, 새꺄."

"어휴.."

믹스 커피까지 한 잔 때리고 나서야 포만감에 기분이 다 나른할 지경이었다.

"야."

"왜."

"그냥 가냐?"

"아쉽냐?"

"식후 운동해야지."

최재석의 눈이 드물게 가늘어졌다. 가느다란 푸른빛이 실처럼도, 줄칼처럼도 보였다.

"아쉬울 때가 제일 좋대."

"망나니는 뭐가 옳고 그른지 몰라서."

마침 막 하늘이 개고 있었다. 뭘 하든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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