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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준성철

노랗게 물든 은행잎이 얇게 떨어져 길을 덮을 시기에, 장희준은 경호원과 거리를 둔 채 공원을 산책했다. 적이 많은 지라 경호원 없이는 잘 다니지 않았으나 이 작은 공원에서는 종종 거리를 두고 거닐곤 했다. 겨울로 접어드는 늦가을, 가끔 짬을 내어 사람 없는 공원 벤치에 앉아 자판기에서 뽑은 커피를 한 잔 마시며 사색에 젖어드는 것도 한가롭고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장희준이 막 자판기 커피를 하나 뽑아 자리에 앉으려는데 늘 앉는 그 벤치에는 한 사람이 먼저 오른쪽 끝에 앉아있는 것이 보였다.

전체적으로 마른 몸. 노쇠한 장희준보다 더 좋지 않은 혈색, 반듯하게 빗어넘긴 흰 머리칼 섞인 검은 머리카락. 마찬가지로 반듯한 안경. 겨울 외투를 단단히 한 하성철이었다. 경찰 고위 간부와 백석 그룹 회장의 만남. 공적인 자리여도 뜬 소리가 나올 판에 사복으로 인적 드문 공원에서 마주쳤다는 것이 마냥 우연 같이 느껴지지는 않았다. 장희준은 등을 잠시 돌려 자판기에서 율무차를 하나 더 뽑은 뒤 벤치로 다가가 그것을 내려놓았다.

"마시게. 뽑는 모습을 봐서 알겠지만 그냥 율무차일 뿐이니 늙은이가 대접하는 셈 치게."

"..이럴 땐 평범한 노인 같으시군요."

"백석의 괴물이라고 불린다 해서 인간의 마음을 아예 모르거나 모른 척 하지는 않으니까."

"이럴 때만 베풀 줄 안다면 모르는 것이나 다름없지요."

"날도 추운데 말에 뼈가 박혀 아프구만."

후우. 낮은 숨소리와 함께 벤치 위로 몽글거리는 한숨이 희게 어리다가 사라졌다.

빈정거리거나 은근하게 권하지 않고, 또한 그것을 이성적이거나 감정적으로 맞받아치거나 경멸하고 매도하는 일은 없었다. 두 사람이 있는 곳은 접견실이나 경찰청이 아니라 그저 사람 없는 한가로운 공원이었기 때문인 점도 있었다. 하성철은 제가 장희준으로부터, 그의 저택에 방문할 적마다 예의상 받았던 값비싼 커피보다는 자판기의 율무차가 훨씬 더 입에 맞았다. 본의 아니게 얻어먹은 거긴 했지만 마른 목에 걸리거나 하지는 않았다.

"회장님."

평소보다 더 조용한 목소리였다. 하성철은 딱히 장희준에게 시선을 주지 않은 채 말했고, 장희준 역시 눈을 똑바로 보고 얘기하라던가,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냐고 묻지 않았다. 그저 이 조용한 분위기를 나서서 깨고 싶지 않다는 듯이.

"회장님은 제가 좋다고 했었지요. 솔직히, 아직도 저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만...회장님은 제가 왜 좋으신 겁니까?"

"아니, 난데없이 고백하는 시간인가?"

"....."

"....."

"자신에게 반기를 드는 자, 자신의 앞길을 막는 자는 거침없이 치워버리는 게 백석 그룹의 장희준이라는 사람이다...그런 사람이 저를 좋아한다며 호의를 표하니 정치적인 문제라거나, 자신의 수족으로 삼을 요량이거나, 그런 음험한 쪽으로 밖에 생각되지 않았으니까요."

"..이건 정말 아픈데, 성철이."

그제야 하성철이 종이컵을 마른 손에 꼭 쥔 채로 장희준을 바라보았다.

순수하게 의문에 대한 대답을 구하는 얼굴. 거기에는 진실로 경멸도, 혐오도, 격렬한 부정도 없었다. 가족과 함께 기뻐하는 얼굴도, 경찰로서 결연히 행동하는 얼굴도 사진 등으로 보아왔던 장희준이었건만 이토록 흔들림 없는 얼굴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리고 그 때문에 저릿함과 짜릿함을 동시에 느꼈고, 심경의 변화를 내색하지 않으려 애를 썼다.

"내가 젊었을 때처럼 자수성가 하는 모습이 좋았던 것일지도 모르지. 그럼에도 나와는 다른 대쪽 같음이 좋았던 걸지도 모르고. 타협하지 않고 오롯이 살아가는 대나무 같은 자. 부러질 지언 정 휘어버리지 않겠다는 그 반듯한 의지를 '내 것' 으로 만들고 싶다고 생각한 걸지도."

"...성격이 나쁘시군요."

"나이 먹으면서 느는 건 늙은이 심술 뿐이라서 말이야."

"그래도, 회장님의 솔직한 말을 조금은 들은 듯한 느낌이 듭니다. 전만큼 불쾌하지는 않군요."

옅은 미소. 곱게 휘어지는 눈매와 살짝 까끌해 보이는 입술 끝이 호선을 그리는 것에 장희준은 저도 모르게 웃었다.

"나는 이만 가 볼 생각인데, 같이 타고 갈 텐가? 바래다 줄 수는 있는데."

"사양하지요. 공원을 벗어나게 되면 장희준 회장과 하성철 국장만 있으니, 대화다운 대화를 나눴다는 사실을 잊어버릴 것 같습니다."

"이번만큼은 심술 부릴 생각이 없었는데 말이야. 그럼 늙은이 심술은 다음에 만날 때 부리도록 하지."

장희준은 빈 종이컵을 공원의 쓰레기통에 던져넣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찬 곳에 오래 앉아있어서인지 살짝 뻐근한 감도 들었고, 으슬거리기도 했다. 경호원들과 합류하여 차를 세워둔 곳으로 가기 전 벤치에 앉은 하성철을 뒤돌아보았다. 하성철도 마악 벤치에서 일어나고 있는 중이었고, 장희준이 제 쪽을 보고 있다는 것에 손을 들어 흔들어 보이고는 반대편으로 등을 보이며 걸어갔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어느 겨울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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