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405
배준혁 생축글
똑똑-
노크 소리에 배준혁은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었다. 익숙한 얼굴. 양시백이었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어서오세요."
배준혁이 문을 연 채로 물러나 사무실 안으로 들어가자 양시백이 인사를 하고는 사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양시백은 종종 근처를 지날 때마다 배준혁의 사무실에 들러 이런저런 것들을 건네기도 했고, 일을 도와주기도 했으며, 안부를 묻기도 했다. 그 셋 중 하나겠거니 생각한 참이었다.
"재호 아저씨한테 들었어요, 선생님 오늘 생일이라고..."
생일. 어린 시절, 젊었던 시절도 아닌 유년기에 반짝하고 챙겼던 적이 배준혁에게도 있기는 했다. 철이 들면서부터 생일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는 게 의미없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일상이나 다름없는 어떤 날이 제 주변 사람들에게는 큰 의미로 와닿는다는 것에 배준혁은 아주 작게 웃음에 가까운 무표정을 지어보이곤 했다.
"손에 든 건..?"
"네? 아..네! 이거, 부족하지만..이거 선인장 화분인데요, 식목일이라서가 아니라..저기 창틀에 두시고 가끔 물도 주시고 보면 좋겠다 싶어서..선물로 드리려고요."
양시백이 건넨 화분의 몸체는 분홍색으로 곱게 칠해져 있었고, 노란색 리본으로 빙 둘러져 장식되어 있었다. 화분 안에는 작은 선인장이 흙더미속에서도 단단히 자리잡고 있었다. 어쩐지 양시백 본인을 닮았다. 배준혁은 그리 생각하며 양시백이 내민 선인장 화분을 받아들었다. 비닐 포장을 벗김과 동시에 장식으로서는 괜찮지만 실상은 걸리적거리는 노란 리본도 깔끔하게 떼어냈다. 그리고는 블라인드를 조금 올려 햇빛과 바람이 적당히 들어올 수 있도록 자리를 만든 뒤 선인장 화분을 놓았다.
"감사합니다. 식물을 기르는데 큰 소질이 있진 않지만, 되도록 오래오래 길러보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그렇게 크게 신경쓰지 않으셔도 돼요. 크흠..저, 뭔가 도와드릴 거 없을까요? 관장님이 오늘은 별일 없으니까 넉넉하게 있다 와도 된다고 했거든요."
"저도 생일날은 쉬기로 해서..괜찮으시면 사무실 정리를 도와주시겠습니까?"
"옙! 맡겨주세요, 선생님!"
양시백은 팔까지 걷어붙이며 말했지만, 사무실의 청소며 정리며 꼼꼼하게 미리미리 해 두는 배준혁의 특성 상 양시백이 도울 만한 일은 크게 없었다. 생일 가려가며 쉬는 타입도 아니었고. 단지 양시백이 도장에 일찍 돌아가기 싫은 마음을 헤아려 대강 핑계같은 대답을 한 것뿐이었다.
"밖에 벚꽃이 예쁘게 피었네요."
"오는 길이 아주 향기롭더라고요. 언제 다같이 꽃놀이라도 가실래요?"
"저야 일이 없으면 백수나 다름없어서..다른 분들이 시간이 괜찮으시다면 나쁘지 않을 것 같군요. 날씨도 모처럼 좋고."
"권혜연 씨랑, 호진이랑 현아랑, 설희랑, 아저씨랑, 관장님이랑 또..."
배준혁은 손가락으로 꼽아가며 사람 수를 헤아리는 양시백의 모습을 정답게 바라보며 작게 웃었다.
***
배준혁과 양시백은 사무실 내의 자잘한 것들을 정리하고, 환기 겸하여 창문을 열어둔 뒤 산책을 다녀왔다. 그 사이 먼저 와서 기다렸던 손님은 사무실 문 옆 벽에 몸을 기대고 있다가 두 사람을 발견하고 몸을 돌렸다.
"오, 양시백이도 있었네?"
"안녕하세요, 재호 아저씨."
"간만입니다. 재호 씨."
"그래, 무지 간만인데 자네가 통 찾아올 생각을 안 해서 내가 먼저 왔지. 내일 준혁이 자네 생일이잖아? 여기."
서재호는 작은 꽃다발을 내밀었다. 연초록색 카네이션과 노란색 프리지어, 그리고 흰 안개꽃이 둥굴게 엮여있었다.
배준혁은 작게 감사합니다. 라고 대답하고는 꽃다발을 받아 한 손으로 안고 다른 한 손으로는 사무실의 문을 열었다. 깔끔하지만 향기 없는 사무실에 산책할 때 맡았던 벚꽃의 향기와는 다른 새큼한 꽃향기가 훅 퍼졌다. 양시백은 제가 선물한 화분쪽에 시선을 돌렸다.
"저거, 양시백이가 선물한 거야?"
"그래요. 이럴 줄 알았으면 다른 걸 알아볼 걸."
"뭐 어때. 나는 꽃, 시백이는 화분이니까 식물이기는 해도 카테고리가 다르다고."
"식물이라는 대 카테고리는 똑같네요 뭐."
"어쩔 수 없지. 아, 준혁이. 이 꽃다발 그리 무겁지 않으니까 저기 액자 걸이 위에 겹쳐서 걸어두면 될 거야. 시들게 되면 반드시 버리게 되므로 가장 쓸만한 선물이라고 해서 꽃다발을 사 온 거라고 나는."
"시들지도 않았는데 벌써 버린다는 말씀을 하면 꽃이 섭섭해합니다. 재호 씨."
"꽃에게 호감 살 일 없으니까 괜찮아."
배준혁이 서재호가 말한대로 액자를 건 곳에 꽃다발의 리본 부분을 꿰어 걸어놓았다. 거꾸로 매달린 꽃은 아직 생생해서인지 하나의 꽃잎도 바닥으로 부스러져 내리지 않았다.
"밖에서 얼마나 기다리셨습니까?"
"한 15분쯤. 산책이라도 했어?"
"예. 날씨가 좋으니 좀이 쑤시더군요."
"길이 엇갈렸나 보군.."
"아저씨, 그럼 그냥 저랑 같이 오시지 그랬어요. 제가 선생님께 산책이나 나가보자고 한 거라.."
"양시백이가 내 기다림의 원흉이었군?"
양시백과 서재호는 농담 반 진담 반 이야기를 킥킥 웃으며 주고받았다.
"아, 아저씨. 벚꽃 지기 전에 다른 사람들이랑 꽃놀이 가는 거, 어떻게 생각해요?"
"이번 주말에?"
"사실 그 때 가서도 꽃이 안 지길 바라야겠지만, 일단은요."
"괜찮지. 혜연이나 다른 사람들에게 물어는 봤고?"
"권혜연 씨나 현아, 호진이 한테는 아까 문자 넣어봤고, 설희하고는 아주머님이랑 통화했어요. 아주머님도 시간되시면 가실 거 같고...관장님이나 상일이 아저씨는 아직요."
"그럼 상일 형님께는 내가 물어볼 테니, 관장님은 시백이가 물어봐."
"넵!"
"자, 그럼 주말 약속은 이야기 끝났고, 준혁이. 오늘 저녁 시간 어때?"
"별 일정은 없습니다만."
"약속 없으면 같이 저녁 먹자고 할 거였지."
"재호 씨가 삽니까?"
"아이쿠, 한 방 먹었군. 그래, 내가 사지."
"시백 씨도 같이 가실 거죠?"
엇. 양시백은 갑자기 무슨 소리냐는 듯 동그래진 눈으로 배준혁을 바라보았다.
"양시백이, 안 갈거야?"
"아, 아뇨. 저도 같이 갈래요."
저녁까지 같이 먹을 생각이 없었던 양시백은 거짓말같이 최재석에게 저녁 먹고 돌아갈 것 같다고 문자를 보냈다.
"그라지. 상일 형님이나 오미정이는 시간 되려나 모르겠네. 다들 이쪽 동네하곤 좀 떨어져 있어서.."
"그럼 저희 예전 단골집에 가 볼까요?"
"피맛골?"
"예."
"좋지. 조금 멀기는 하지만, 어디 있다가 날 좀 어두워지면 꽃 섞인 고기 냄새 맡으러 가 보자고."
"좋습니다."
서재호는 노곤하다는 듯 기지개를 켜 보였고, 양시백은 늘어지게 하품을 토해냈다. 배준혁도 지나치게 여유로워 옮은 듯 하품을 했다.
"한숨 자도 좋을 만큼 날씨가 좋군요."
"그럼. 그러니 저기 양시백이 눈꼬리에도 졸음이 한껏 매달려있지."
"저도 졸립군요. 저녁 때까지 시간이 있으니 다들 잠시 눈 좀 붙일까요?"
"사무실에서 잘 수나 있겠어? 소파는 두 쪽이잖아."
"저야, 의자에서 자면 됩니다. 재호 씨에게 생일밥 얻어 먹으러 가기 전에..흠. 한 잠 잘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양시백과 서재호가 소파를 차지하고 -양시백은 졸립다는 사실을 극구 부정했지만 소용없었다- 배준혁은 의자에 앉았다. 벚꽃향 섞인 공기가 사무실 밖에서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왔다. 솜사탕처럼 달큼하고 고운 비단처럼 한없이 부드러운 공기는 사람을 잠재우는 수면향처럼 작용하여 지금 시간이 몇 시인데 잠들 수나 있겠냐고 대화를 주고받던 세 사람을 거짓말처럼 잠재웠다.
생일이라지만 배준혁에게는 아무 것도 아닌 어느 날 중 한 날에 불과했는데, 정겨운 사람들과 예정에 없던 단잠에 포르르 빠져드는 것은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그 이후에 약속된 만찬 역시 그의 꿈나라에 반짝임을 계속해서 불어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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