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퀘글
서재호와 오미정
"오랜만."
서재호가 의자를 끌어당겨 앉으며 인사했다.
당연하지만 오미정은 대답하지 않았다. 과거 같이 일하던 시절에도 오미정에겐 기가 죽곤 하는 서재호였는데, 지금의 오미정의 모습은 서슬이 푸르다 못 해 서늘할 정도였다. 하지만 이제는 그렇다고 해서 웃는 얼굴로 무마하거나, 져 주는 듯 넘어갈 수는 없었다. 오미정은 유상일에게 동조해 죄 없는 아이를 죽음에 이르게 하려 했으니까.
"10년 만이지."
"..날 찾아온 용건이 뭐야? 비웃어 주고 싶어서?"
"그런 거 아니야. 우린 서로를 비웃을 만한 처지가 되지 못 해. 알잖아. 상일 형님을 막지 못 했다는 점에서."
"그래, 난 막지 못 했어. 함께 하겠다는 날 남겨두고 떠나셨지. 그래도 그 분의 이해자는 나였어. 네가 아니라."
"나를 질투해?"
서재호는 서글펐다.
과거 동료들 중 남은 이는 이제 오미정 한 사람 뿐이었다. 서대문 인질극에 이은 권현석의 부고. 갈라져 버리기는 했지만 골 깊은 사이는 아니라고 멋대로 생각했다. 하지만 한 차례 폭풍같았던 사건이 지나고 유일하게 남은 옛 동료에게 질투의 눈빛을 받는 것은 아수라장을 헤쳐나온 서재호여도 조금은 타격이 갔다.
"....그래."
"상일, 형님은...박근태와 함께 죽음을 선택하는 결말을 택했어. 어쩌면, 마지막에 마지막에서야 박근태를 감싸주었던 건지도 모르지만."
오미정은 유상일이 박근태와 함께 죽음을 맞았다는 부분에서 주먹을 꾹 쥐었다.
죽음을 바란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살기를 바랐다. 영원한 끝이어도 좋으니 살아만 있어준다면, 무기수처럼 오랜 형량이라도 그가 감당해 낼 수만 있다면 자신도 변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결국, 결국 모든 걸 걸고서 했던 복수는 자신과 같은 옛 동료, 옛 부하로 인해 어그러지고 선택한 죽음조차 제 것이라 말할 수 없는 끝에 치가 떨렸다.
"...설희. 기억해?"
"......."
"혜연이는 설희를 구하는 걸 선택했어. 자기 아버지를 해한 사람일지도 모르는 사람의 딸을 구하는 걸 선택했다고. 박근태 의원의 친 딸이라는 건 몰랐지만, 알았다 해도 구했을 거야. 거기서 선택하는 사람이 현석 형님이었어도 그렇게 했겠지."
"그 아이에게 용서를 빌 수는 있겠지. 하지만 난, 후회하지 않아."
"이제 앞으로 어떻게 할 거야?"
"형량을 치르는 것. 당장은 그것 외에 어떻게 할 수 없잖아?"
"나는, 양시백이랑 혜연이와 함께 진실을 찾아볼 거야. 현석 형님을 죽이고 상일 형님을 절벽으로 내몬 자들을 찾겠어. 찾아서, 보여주겠어."
"..한낱 범죄자에게 아량이 가득하시군."
코웃음이 섞여있기는 했지만 서재호는 이전처럼 마냥 야멸차게만 느껴지지 않았다.
"옛 동료들과도 함께 나누고 싶은 진실이니까. 그러니까 그 때까지 잘 먹고 잘 지내라고. 출소하기 전에 신문이라도 넣어줄 테니까."
"가. 보기 싫어."
"면회 거절하면 사식에다가 편지 넣는다."
서재호는 사람 좋아 보이는 웃음을 지으며 인사했다.
오미정은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가 곧 나왔던 문 저편으로 들어갔다.
***
"기자 일이 잘 안 되는 모양이지?"
"언론을 재빠르게 장악해서 회심의 기사가 막혔거든."
"기자면 뭐해, 그렇게 막히면 끝인 걸."
"막히지 않는 투고처를 찾는 수밖에."
"열심이네."
"몰랐어? 이래봬도 예전부터 쭉 열심이었다고."
서재호는 사건 직후부터 불규칙적으로 면회를 신청했고, 오미정은 그것을 때때로 받아들였다.
(그나마 종종 면회에 나오는 이유도 서재호가 사식을 넣으면서 정말 쪽지를 넣었기 때문이다.)
"과연 내가 출소할 때까지 진실을 폭로할 수 있을지 지켜봐야겠는데."
"출소할 때까지 못 하면?"
"기자 일 그만 둬. 미용실 어찌어찌 다시 열어 볼 테니까 내 일이나 돕던가."
"미용사 서재호. 나쁘진 않지만 손재주가 나빠서 어떻게 안 되겠는데."
"밥이나 잘 먹고 다녀. 속 빈 강정같이 말라서는."
"오미정이 자네야말로 여엉 말랐거든. 겨울 추우니까 사식 넣어주는 거 가리지 말고 잘 먹어. 나야 혈기왕성하게 발로 뛰는 기자 일을 하고 있으니까 걱정 말고."
서재호는 잠시 수첩을 펼치더니 그 사이에서 무언가를 집어 오미정에게 보여주었다.
"..상일 형님, 예전 사진이 있더라고. 양시백이가 박근태 휘하 부하들 거처를 조사하다가 찾았다는 모양이야."
"......"
"마음은 굴뚝같지만 사진은 넘겨줄 수 없는 거, 알지? 출소해서 받아가. 빛 바래지 않도록 잘 간직하고 있을 테니까."
"..고마워."
"세상에서 가장 비싼 고마워 소리를 지금 들었네."
서재호가 가볍게 너스레를 떠는 동안, 오미정은 유상일의 옛 사진에서 지금의 자신의 얼굴을 겹쳐보았다. 그늘진 눈매에 쓸쓸해 보이는 기색, 내리쬐는 햇빛을 바라보면서도, 그것을 맞으면서도 음지에 서 있는 듯 끝없이 가라앉아가는 기분. 유상일 역시 자신에게서 그런 그림자를 느꼈을까. 마주 앉은 서재호의 얼굴을 처음으로 찬찬히 뜯어보던 오미정은 어느 순간 왈칵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같았다. 그간 수없이 면회를 왔지만 알아채지 못 했던 사실이었다. 서재호 역시 그늘지고 쓸쓸한 눈매를 하고 있었다. 웃고는 있었지만 기색에서 점점이 묻어나는 감정 파편들이 햇빛 아래 유리조각처럼 반짝이는 것처럼 느껴졌다.
"오, 오미정이, 갑자기 왜 울어?! 사, 사진 때문에 그래? 출소하면 바로 준다니까?!"
그게 아니야. 그게 아니라고.
서재호가 당황해서 어떻게든 달래어 보려고 노력했으나 오미정은 결국 그날의 면회를 눈물을 흘리는 것으로 모두 보내고야 말았다.
***
단조롭지만 긴 일과가 끝난 뒤 오미정은 곧장 잠들 수 없었다.
낮에 있었던 면회에서 서재호의 얼굴을 찬찬히 살펴보던 때를 곱씹어보았고, 잊을 수 없던 과거에서 이제 조금 벗어날 수 있게 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어느 순간 그런 깨달음을 품고 눈을 감은 오미정은 꿈도 꾸지 않는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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