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석은창] 한 때의 봄날
봄이 간다. 덧없이 피워냈던 꽃잎들을 떨구고서.
봄은 어째서 이리도 따뜻한 것인지. 봄이 주는 따스함에 생명들은 너나 할 것없이 움츠렸던 몸을 피고서 쫘악 벌린 몸뚱아리로 다가오는 봄을 한껏 맞이해준다. 특히 꽃들이 그 정도가 남달랐으니 그들은 봄이 오면 아무것도 없던 잔가지에 막 태어난 아기가 손가락을 펴 제 어미를 찾듯 작은 잎사귀를 뻗어내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러다 3월의 햇볕이 그를 끌어안으면 꽁꽁 묶어두었던 보자기를 풀어내어 그 속에 숨겨둔 꽃망울을 슬며시 내보이고는 이후론 거친 바람에 모래사장을 쳐대는 파도처럼 꽃잎들을 펼치고서 자신을 품어준 봄에게 보답하듯 가슴을 쭈욱 내민다. 그리고 말하는 것이다. 보아라. 나는 당신이 있어 이리도 아름다우니.
지난 주에 보았던 벚꽃도 그런 종자였다. 겨울에는 한낱 죽은 나무에 불과하던 것이 봄이 되니 가지마다 맺혀있는 보따리들을 아낌없이 풀어내어 장관을 이룩함과 동시에 봄의 절정을 보여주었다. 사람들은 그렇게해서 피어난 벚꽃을 보고서야 이제 곧 봄이 자신들에게도 오고있음을 알게되었다. 봄의 소식에 사람들은 짐짓 설레어하며 까르르 웃음을 피워냈다. 그러나 정은창은 달랐다. 정은창에게 봄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런 한 순간의 아름다움이 아니었다.
그의 인생은 언제나 겨울이었고 그가 서있는 곳은 늘 햇볕 한 줌 없던 차디찬 골목이었다. 그런 그의 주위에 꽃이 만연한들 봄이 오는 것을 어찌 알 수 있었으리. 그러나 그런 그에게 봄을 알려 따스한 햇살 아래 풍겨오는 꽃내음을 만끽하게끔 만든 사람이 있었으니 다름아닌 권현석 경감이었다.
권현석 그는 정은창의 인생에 처음 들어온 빛이었고 처음 느껴보는 따스한 바람이었다. 이에 낯선 감각이 들어 정은창은 잠시 주춤하다가도 골목길 끝에 서서 저에게 손을 뻗어오는 권현석을 뿌리칠 수 없었다. 머리칼을 스치는 가벼운 바람에 잠시 눈을 감으면 쿵, 쿵 거리는 심장소리가 온 몸을 울렸다. 봄이 오는 것에 설레어 하는 것처럼 정은창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권현석에게 같은 감정을 느꼈다. 설레임. 헤집어진 머리칼 아래로는 두 뺨이 붉게 달아올라졌다.
정은창에게 봄은 권현석이었다. 꽃이 피어서 봄이 아닌 그가 자신의 곁에 있기에 봄이었다. 그렇기에 그의 봄은 흐르는 시간과 상관없이 영원할 것만 같았다.
한 때의 봄날
W.T.HA_RUT_
권현석은 벚꽃구경을 좋아했다. 적어도 정은창은 그렇게 생각했다. 봄이 되어 여기저기에서 벚꽃들이 만개하면 권현석은 자신의 딸 권혜연과 애인 정은창을 데리고 벚꽃구경을 했다. 그는 늘 말했다. 지금이 아니면 언제 해보겠어. 정은창은 그런 권현석에게 말했다. 지금이 아니면 내년이 있고, 내년이 안되면 내후년이 있는걸요. 정은창의 말에 권현석은 그저 씨익 웃어보이곤 그의 손을 잡고 벚꽃 아래의 거리를 거닐 뿐이었다. 정은창은 그것이 결코 싫지 않았기에 매일 반복되는 그 벚꽃구경에 늘 함께해주었다.
오늘도 어김없이 권현석은 정은창을 불렀다. 오늘은 날씨가 참 좋아. 이에 정은창은 창문 밖을 슬쩍 보고는 답했다. 언제나 좋았는걸요. 그러나 권현석은 고개를 작게 내젓고는,
"오늘이 가장 좋은 것 같아."
라고 답하며 정은창에게 외투를 건네주었다. 이제는 익숙한 그의 행동들에 정은창은 아무 대꾸없이 외투를 받아들어 걸치고는 권혜연의 방으로 향했다. 아직 자고있을 것이 뻔했기에 방문을 두드릴려고 하면 언제 나타난 것인지 권현석이 그의 손목을 붙잡고서 행동을 저지했다. 갑작스런 그의 행동에 당황하여 바라보면 권현석은 늘 짓던 사람좋은 웃음을 짓고는 말했다. 혜연이는 이제 괜찮아.
"...네?"
"혜연이는 안 데리고 가도 괜찮다고. 이제 그 아인...나를 위해 울지 않거든."
정은창은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해할려고 하기도 전에 권현석은 정은창의 손목을 그대로 잡고서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정은창은 멀어져가는 권혜연의 방문에 손을 한 번 스윽 뻗어다 이내 걷어내고선 권현석이 이끄는대로 발걸음을 옮겼다. 나중에 돌아와서 제대로 얘기해주면 된다고 생각했다.
두 사람이 도착한 곳은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어난 한강 둔치였다. 벚꽃축제로 한창 열기를 띄웠던 지난주와 다르게 사람이 얼마 없는 이곳은 새벽녘의 고요함마저 느껴졌다. 부는 바람에 흔들리는 가지로 나뭇잎끼리 부딪히는 사아악 사아악 소리만이 들려와 정은창은 어쩐지 어색해지는 기분에 두 손을 쥐었다 피는 것을 반복했다. 언제나라면 먼저 손을 잡아주었을 그였는데 오늘따라 앞장서서 걸으며 한마디도 하지 않는 권현석이 정은창은 처음 그를 마주했을 때처럼 낯설었다. 오늘 아침부터 왜이러서지. 발끝 너머에서부터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불안함에 정은창은 침을 한 번 삼키곤 그의 뒤를 따라가다 결국 먼저 입을 열어 둘 사이의 고요함을 깼다.
어색하지 않게끔 조금씩 이어가는 대화는 특별할 것없는 내용들이었다. 늘 곁에 있었고 서로의 일상에 서로가 있었으니 특별히 물어볼 것도 없었다. 하지만 정은창은 대화가 끊기지 않도록 부단히 노력했다. 끊기면 안될 것 같았다. 멈추는 것이 대화 뿐이 아닐 것 같았다.
"내일은 혜연이랑 같이 여기로 오죠."
이 말도 같은 흐름에서 나온 것이었다. 특별할 것없이, 그저 대화를 잇기 위한 말. 그러나 권현석은 걸어가던 발걸음을 멈추고서 뒤를 돌아 정은창을 보았다. 갑작스레 뒤를 돈 권현석에 정은창은 우뚝 걸음을 멈추고서 그의 얼굴을 마주했다. 차분히 가라앉은 표정에 다시금 불안함이 등 뒤로 덮쳐왔다. 천천히 열리는 그 입에서 꼭 자신의 사형선고가 나올 것만 같았다.
"정은창."
그 입에서 부른 것은 자신의 이름 석 자였다. 늘 불려지던, 익숙한 이름.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가 여느 때처럼 부드러웠으나 마냥 달지만은 않았다. 귀를 통해 들어오는 목소리가 꼭 뜨거운 밀가루 반죽마냥 흘러들어와 먹먹하게 울리어 머리 전체를 뜨겁게 침식시키는 듯 했다. 열기가 머리를 달구고 그것의 고통에 눈시울이 붉어지며 점차 눈 앞의 시야가 일렁거렸다. 뜨거워. 정은창은 급히 소매로 자신의 눈가를 부볐다. 콧망울이 시큰거리기 시작했다.
"정은창."
"...경, 감님..."
"...이제 꽃이 다 졌어."
"아직...아직 피어있어요. 아직은 괜찮아요."
"이미 지난 주에 끝냈어야 했던 일이야."
"...혜연이랑은 여기에 같이 안 왔잖아요...내일 같이 와서...!"
권현석은 울컥이며 겨우 숨을 내쉬는 정은창의 손을 붙잡았다. 그리고 아이를 달래듯 손을 포개어 그의 손등을 매만져주었다. 매일같이 잡았던 손이었다. 차이가 나봐야 6살이었지만 한 아이의 아버지라는 것을 나타내는 그 손은 정은창이 가장 좋아하던 손이었다. 특히 봄햇살과도 같은 따스한 온기로 저를 만져줄 때면 제 속에서 꽃망울들이 하나둘 솟아나 몽글몽글 꽃잎들을 피워내어 간질거리는 느낌을 주었다. 그런데 어째서일까. 단단한 굳은살의 느낌도, 꽉 부여잡는 힘도, 그런 모든 것이 다 생생히 느껴지는 반면 그토록 사랑해 마지않았던 온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꽃구경을 갔을 때마다 맞잡았던 손은 단 한 번도 따스한 적이 없었다.
"말했잖아. 이제 혜연이는 나를 위해 울지 않는다고."
툭. 정은창은 저도 모르게 눈물 한 방울을 흘렸다. 예고없이 흘러내린 눈물방울은 정은창의 손등 위로 떨어졌다. 그리고 그것이 시발점이라도 된 듯 눈물이 주체할 수 흘러나와 두 뺨 아래로 흘러 정은창의 손등 위를 축축하게 적셔갔다. 정은창은 숨을 급히 몰아내쉬었다. 등 뒤로 덮쳐왔던 불안함은 예고되어있던 자신의 슬픔이었음을 깨달았다. 모른 척 했지만 결국엔 마주해야 했던 것이다. 차가운 것을 알고 있음에도 그냥 잡았던 손처럼. 이미 지고 없어야 할 벚꽃을 계속 보러갔던 것처럼. 그렇게해서 이 순간을, 권현석과 함께있는 지금을 끊기지 않도록 이어갔던 것처럼 말이다.
"은창아."
"으윽....윽....경감님...경감님......"
"울지마. 이제 누가 널 달래줘."
"경감님이 해주시면 되잖아요...아직....전 아직...준비가 안 됐단 말이예요...."
"...원래 이별이라는 건 늘 준비가 부족한 거야. 이제 받아들여야지."
"어떻게 그래요....제가...제가 어떻게......전 이제...제가 누군지도 모르겠다고요......!"
어째서 나에게 봄의 따스함을 가르쳐 주셨는지. 차라리 영영 몰랐다면 겨울이 이렇게 시린 계절임을 몰랐을텐데. 울음소리에 막혀 나오지 않은 말이 머릿속을 멤돌았다. 이런 이별이 기다리고 있었더라면 다가가지도 않았을 것이다. 정은창이 권현석의 손을 잡았던 것은, 권현석이 제시해주는 길을 그와 함께 걸어가기 위함이었다. 처음 가보는 길에 넘어질 수 있는 자신을 붙잡아 줄 그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는 그곳에 없었다. 그저 그가 남기고 간 빛과 추억에 젖은 자신이 만들어낸 잔상의 그림자만이 있을 뿐이었다.
그에게 내뱉는 자신의 말들은 원망일까. 아니. 아니다. 그런 단어로 표현되는 감정이 아니었다. 정은창은 권현석을 원망하는 것이 아니었다. 어쩌면 했을지도 모르나 그것 뿐만은 아니었다. 원망은 그저 표면적인 한 감정의 일부일 뿐 근원은 그것이 아니었다. 근원은 달랐다. 좀 더 가슴을 움켜쥐게 만들고 그 안을 먹먹하게 쥐어짜 바늘로 심장을 찌르듯 따갑고 아픈 감정. 그리하여 목구멍이 고추가루를 마신듯 매케해져선 호흡조차 힘들게 만드는. 흐르는 눈물을 막을 수 없고 막을 생각도 못하게 만들게 하는. 그런 감정들. 그래. 그것은 슬픔이었다. 그 어느 것도 아닌 봄이 끝나가는 것에 대한 단순한 슬픔이었다.
"경감님...경감님..."
하염없이 부르는 그 이름은 과거의 것임에도 정은창은 권현석을 늘 그렇게 불렀다. 아마 평생 그는 권현석을 경감이라고 부르리라. 그러나 이것을 탓할 순 없는 건 새 호칭으로 부르기도 전에 권현석이 정은창의 곁을 떠났기 때문이다.
"......이제 완전히 봄이 가버렸구나."
순간 불어오는 바람에 흐드러지게 피어있던 벚꽃잎들이 우수수 떨어져 봄비를 이루고 그들 사이로 떨어졌다. 동시에 정은창은 이제 자신의 손에 그 무엇도 잡히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급히 고개를 들어 권현석을 보면 언제 간 것인지 저 멀리에 서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자세히 볼려고 눈을 찌푸려보지만 무수히 떨어지는 꽃잎들에 그의 얼굴은 문득문득 보일 뿐이었다. 그렇게해서 보이는 얼굴은 한 아이의 아버지이기도, 팀을 이끄는 리더이기도 했으나 마지막에 보여주는 얼굴은 자신이 그토록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이었다.
"은창아."
정은창은 흐르는 눈물을 닦았다. 일렁거리던 시야가 점점 선명해져갔다. 눈을 천천히 두 어번 깜빡거리면 벚꽃의 분홍색이 만연한 세상 속에 갇힌 자신과 권현석을 볼 수 있었다. 현실과 동떨어진 이곳. 흩날리는 벚꽃잎들 사이로 익숙한 자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그 너머로는 보이지 않는 잔잔한 소음들도 들려왔다. 정은창은 사랑하는 이의 목소리에 집중했다.
"미안해."
눈 앞의 그를 향해 발걸음을 움직였다. 천천히 걷다 속도를 높여 빠르게 그에게로 달려갔다. 이윽고 선명하게 마주하게 된 그 얼굴엔 울음과 웃음이 뒤섞인 채 자신을 보는 사랑하는 이의 얼굴이 담겨있었다. 경감님! 정은창은 손을 뻗었다. 정은창. 권현석은 그런 그를 손을 내밀었다. 처음 그에게 손을 내밀어줬던 때처럼. 정은창은 달리던 다리의 속도를 높였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그리하여 있는 힘껏 뻗은 손이 권현석과 맞닿은 바로 그 순간,
"...사랑해."
솨아아 거리는 나뭇잎 소리에 고백이 묻히고 저 너머에서 들려오던 잔잔한 소음이 귓가를 세게 때리자 번쩍 눈이 띄었다. 눈 앞에 보이는 것은 흐드러지게 피어난 벚꽃도, 사랑하는 사람도 아닌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는 호텔의 천장이었다. 식은땀에 축축하게 젖은 몸을 일으키면 평소와 다른 감각이 얼굴에서 전해져왔다. 남자는 손으로 천천히 그 윤곽을 더듬으면 말랑한 살이 아닌 꾸덕거리는 보형물의 느낌만 들었다. 그제서야 남자는 자신이 아주 긴 꿈에서 깨어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남자는 아직 약기운이 남아 힘이 들어가지 않는 몸을 일으켜 창문을 열었다. 그러자 추운 겨울바람이 방 안으로 들어와 따가운 냉기가 온 몸을 휘감았다.
'......이제 완전히 봄이 가버렸구나'
날짜는 이제 2월이었다. 춘분까지 얼마 남지도 않았다. 즉, 곧 있으면 봄이 온다는 소리였다. 분명 꽃들은 다시 몽우리를 피워낼 것이고 사람들은 거기에 맞춰 가슴 설레어할 것이다. 그러나 남자에게 그 모든 것은 의미가 없었다. 그의 봄은 이미 끝이 났고 영원히 돌아오지 않을 것이기에.
남자는 품에서 담배를 꺼내 물었다. 칼칼한 연기가 목구멍을 타고 안으로 들어가 폐를 자극시켰다. 남자는 깊게 빨아들인 연기를 후우 내뱉으며 밤하늘로 솟아올라가는 연기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그리고 다시 한 번 깊게 빨아들이고서 내뱉고는 창가에 부벼 연기를 끄고서 창문을 닫았다. 그리고 다시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았다. 돌아오지 않을 한 때나마의 봄날을 그리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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