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복
감자탕
서재호는 삼복을 잘 챙기는 편이 아니었으나 올해는 달랐다. 초복에는 옛 친구 오미정과 함께 들깨삼계탕을 먹었는데, 엊그제 같았던 초복이 지나더니 중복이란다. 양시백이나 권혜연, 홍설희와 함께 몸보신 음식이라도 먹으러 갈까 했는데 다들 시간이 되지 않았다. 삼계탕을 또 먹긴 뭐하고 감자탕 같은 거라도 먹으러 가볼까. 할 참이었다. 집앞에서 가까운 감자탕집에 들어가려니까 한 남자와 맞부딪쳤다. 어두운 눈매에 뺨에 흉터가 있는 남자였다. 아직 이름은 모르지만 전혀 모르지도 않아서 슬쩍 물었다.
"..그쪽도 혼자서 몸보신 하러 왔수?"
남자가 떨떠름하게 끄덕였다. 같이 들어가니 종업원이 두 분이요? 하고 물었고 본의 아니게 겸상을 하게 되었다. 자리에 앉아 감자탕 2인분을 주문하고 입으로 소리를 내며 잔을 꺾는 시늉을 하며 시선을 던지니 단호한 거절이 돌아왔다. 물수건으로 손을 닦고 숟가락과 젓가락을 놓았다. 기자 일, 아니 사람 대하는 일을 하다 보면 어느 정도의 촉이 발달하게 된다. 그 촉이 서재호에게 말하고 있었다. 이 기회를 틈타 말을 백 번 붙여본들 제대로 된 대답 듣기 어려울 테니 잠자코 밥이나 먹어라. 그렇다고 해도 말을 붙여보는 게 도리일 터이나, 배가 고프기도 했고 기껏 앉았는데 남자가 도로 나가버리면 그거대로 마음이 깨름칙할 것 같았다. 공기밥 2개와 밑반찬이 식탁 위로 착착 놓여지고 가스 버너가 중앙에 놓였다. 곧이어 펄펄 끓는 감자탕이 든 냄비가 그 위에 안착했다.
"제사 지내지 말고 먹읍시다."
고개를 끄덕일 뿐 잘 먹겠습니다 같은 말도 하지 않았다. 거 참 비싼 목소리일세.
서재호는 투덜거리며 공기밥 뚜껑을 열었다. 자르르한 쌀밥을 한술 뜨기 전 국자를 들어 감자탕의 상태를 체크한 뒤 제 그릇에 덜었다.
남자 앞에 국자를 빙글 돌려 놓아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
에어컨 바람에 뻘뻘 흘린 땀이 식어갔다. 서재호는 적당적당히 남자가 제대로 먹고 있는 건 맞는지 확인하며 감자탕을 먹었다. 뼈를 발라내고 호로록 빨아먹기도 하고, 발린 살을 국물과 함께 푹 떠서 쌀밥과 입에 넣었다.
"보양식이 따로 없네, 이봐. 쓸데없는 거 안 물어볼 테니까 하나만 물읍시다."
"뭐지."
"소주? 아니면 볶음밥?"
"마음대로."
"이모~! 여기 볶음밥 둘에 소주 한 병 추가!"
서재호는 쯔쯔 혀를 차는 듯 혀를 입천장에 붙이고 작게 소리를 냈다.
"마른 입 거미줄 치는 줄 알았는데 밥은 잘 드셨나 몰라."
"못 먹진 않았지. 보면 알 텐데?"
"쓸데없는 거 안 물어본다고 하자마자 이렇게 입을 열다니, 치사하구만."
"..여기서 만날 거라고 생각도 못 해서 준비가 안 됐거든."
"나 참, 밥집에서 밥만 먹지 뭐. 자료 출처가 궁금하다느니, 대체 정체가 뭐냐느니 캐물을 것 같아서?"
"쓸데없는 건 안 물어본다면서?"
남자는 그러면서도 픽 웃었다. 서재호가 그렇듯 반팔 셔츠 차림에 가벼운 복장이기 때문인지 말문은 늦게 열었으나 평소보다는 경계가 적어보였다. 날카로워 보이는 얼굴이었으나 양시백과는 달랐고, 언뜻 유상일과 닮은 듯했다. 상처 입은 기색이 어려있는 것하며, 패인 눈매며, 입꼬리가 그리는 곡선이 그러했다. 서재호가 잠시 감상에 잠긴 사이 종업원이 다가와 소주와 소주잔, 볶음밥거리를 가져왔다. 국물과 건더기를 따로 던 뒤 채썬 파와 김가루, 양파, 날계란이 올라간 밥이 차례로 냄비 위에 떨어져 내렸다. 달궈진 냄비 위로 고소한 냄새가 코를 간질였다. 솜씨좋게 볶아낸 뒤 살짝 눌어붙도록 납작하게 펴주고 나면 준비완료였다. 종업원이 소임을 마치고 주방으로 돌아간 뒤 서재호는 제 앞에 놓인 소주를 들었다.
"자 첫 잔 받으시고."
"......."
"따라는 줄 거지?"
"그래."
남자가 소주병을 받아들더니 서재호의 빈잔을 채워주었다. 잔이 채워지고 병이 제자리로 돌아온 뒤 잔이 맞부딪쳤다. 누가 보면 끽해야 친구거나 지인인 줄 알겠지만 둘 중 하나 맞는 것이 없다는 게 새삼스레 우스웠다. 지금이야 밥을 같이 먹고 있지만 나가서 각자 헤어지면 언제 그랬냐는 듯 쌩쌩한 사이가 되겠지만 더운 날 중복에 보양식 대신 찾은 감자탕에는 아무런 죄가 없는 법. 남자는 버너의 불을 껐고, 볶음밥은 맛있게 눌어있었고 서재호와 남자는 말없이 한 숟갈 두 숟갈, 종내에는 눌은 것을 알차게 긁어 입에 털어넣었다. 소주는 동을 냈으나 잔을 부딪치는 건 처음 한 번이 끝이었다.
***
잘 먹었습니다.
잘 먹었습니다.
식사가 끝나자 이번에는 남자도 가벼이 인사했다. 서로 계산을 마친 뒤 계산대 옆에 마련된 작은 자판기에서 커피를 뽑아 마셨다.
"정보 주고받는 것도 좋지만 오늘처럼 가끔씩 밥이나 같이 먹자고 하면, 안 먹힐까?"
남자는 평소의 서슬 퍼런 기색을 내비치지 않은 상태였는데, 동네 마실 나와 얼굴만 알던 친구를 대하는 것 같았다. 종잇장처럼 얇은 눈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젓고는 작게 인사한 뒤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어갔다. 같이 식후 담배나 한 대 피우자고 하는 게 나았으려나. 서재호는 남자가 걸어간 길목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햇볕의 기세가 더욱 강해지는 것을 느끼곤 얼른 짧은 귀갓길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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