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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재인 이야기

강재인은 어릴 적, 이제는 기억도 나지 않는 어딘가에서 집토끼를 본 적 있었다. 기다란 귀에 또렷한 눈. 강아지나 고양이보다는 눈에 띄는 애완동물. 여려보인다, 귀여워 보인다. 언뜻 그렇게 생각하다가 퍼득 튀어오르는 불쾌감을 느꼈다. 애초에 토끼같은 자식 운운하는 말들도 좋아하지 않았다. 제 처지가 그 토끼와 얼마나 다르다고.

1.

물론 강재인은 토끼가 아닌 사람이었다. 사람이었지만 외국인에 대한 적의가 높은 편인 대한민국에서 눈에 띌 정도로 이국적인 외모를 지닌 것은 -한국에서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결코 장점이 되지 못했다. 하다못해 남자로 태어났다면. 종종 모조리 망해 사라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던 강재인의 인생에 새로운 지평이 열리게 된다. 강재인이 '그' 를 만나 정보 입수의 사명을 띠고 심어진 그 순간이었다. 새로운 고용주는 그와 마찬가지로 여성이니 남성이니, 내국인이니 외국인의 피가 섞였니, 하는 사소한 사실을 따지지 않았다. 그저 능력만을 보았다. 자신이 시키는 일을 반드시 해낼 수 있는 능력. 어떤 일이라도 머뭇거리지 않고 최소한의 오차율로 마무리지을 수 있는 연장이 된다면 강재인이 여태껏 보고 겪어온 복지 같지도 않은 것들보다 더 나은 것을 제시하겠다고 고용주, 장희준은 제안했다. 목숨줄이 그에게 연결되어 있지 않았더라면 당장 잘라내 버리고 손을 잡고 싶을 만큼 솔깃했다. 애초에 여지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제안이었다.

2.

예상했던 대로, 그와 장희준은 동류였다.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고 얼마든지 갈아치울 수 있는 대체품으로 생각하기에 끝모르고 잔인해질 수 있는 괴물들. 그 괴물들의 영역에서 보호받는 대신 온갖 더러운 일들을 대리하는 자신. 대체되지 않기 위해 몸부림치듯 자신의 가치와 능력을 끊임없이 내보여야 하는 자신. 지금껏 살아남기 위해서, 살아가기 위해서 무엇이든 할 생각으로 이 바닥에 뛰어든 강재인이었지만 날로 지독해져가는 술수를 바라보며 환멸과 구역감이 목 위까지 차오르는 날이면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괴물이 아닌 사람이었기에 그런 생각은 당연했다. 하지만 여러 물음들이 강재인의 속에서 꼬리를 그리며 솟구쳤다.

더러운 술수에 가담하지 않기 위해 벗어난다는 것인지, 아니면 사람임을 포기하고 목숨줄을 쥔 괴물들과 동류가 되겠다는 의미의 벗어남인지.

강재인은 그 물음에 아직 명확한 답을 내릴 수 없었다. 그 답을 내리는 날이 오기나 할지도 알 수 없었다.

3.

이대로 괜찮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포식자의 위치를 점하지 않아도, 홀몸이라면 이대로 아슬아슬하게 살아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잘 됐어. 잘 된 거야. 잘 된 거라고."

강재인은 장희준에게 정은창을 밀고하고 살아남았다. 호가호위하던 토끼가 저 대신 죽은 먹잇감에게 흘리는 눈물은 위선으로 비치기 쉬운 것이었으나 흐르는 것을 막지도 닦지도 않았다. 목숨을 온존했다는 결과에 뒤따라오는 눈물이었다. 죽고 싶지 않았다. 밀고하고 싶지도 않았다. 하지만 거부할 힘도 자격도 없었다. 권리를 잠시 빌려쓰는 최하위 피식자란 그런 위치였다. 자신이 힘이 있었다면, 피식자가 아닌 포식자가 되어 어깨를 나란히 하고 견줄 수 있을 만한 존재가 되었더라면 이런 결과는 맞지 않았을 것이다. 배운 것이 도둑질이라더니. 강재인은 울음섞인 말을 허공에 흩뜨리며 그간 묻어두고 회피해왔던 물음에 대한 답을 선택했다.

포식자가 되겠다.

토끼라는 틀에서 벗어나 곰의 피를 마시고, 호랑이의 가죽을 벗기며, 사자의 고기를 씹는 존재가 될 것이다. 앞으로 해를 거듭해 노쇠하여 후계자 없이 몰락하고 말 장희준을 아득히 뛰어넘는 포식자. 혼란한 서울을 피로 씻구어 손아귀에 쥐고 뒤흔들 수 있는 자. 권력의 정점, 백석의 수장이 되고야 말겠다.

"사람 껍데기 따위, 몇 번이고 버려주겠어."

계속해서 흐르는 눈물에 흥건히 젖어가는 얼굴이었으나 입 밖으로 튀어나오는 말만큼은 한겨울 서릿발보다도 싸늘한 기운을 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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