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퀘글
복수귀 권현석. 캐붕날조 주의
자박.
복도의 침묵을 깨던 걸음소리가 멎었다. 두 소리가 겹쳐진 걸음소리 중 하나가 멎은 셈이었다. 멈추지 않은 걸음소리가 자박자박자박 중간에서 끝까지 계속되었다. 소리가 멎은 곳에서 걸음이 멈추고 끽 문이 열리는 소리가 작게 울렸다. 중첩된 걸음소리가 그 안으로 스며들듯이 끌려들어갔다.
"오랜만이지."
"..잘, 지내셨어요?"
안경을 쓴 남자는 옅게 웃음지었다.
그 웃음을 본 남자는 그 얼굴을 빤히 바라보다가 곧 시선을 돌렸다. 남자가 안경 쓴 남자, 권현석을 두려워 한다거나 책 잡힐 만한 구석이 있어서는 아니었다. 둘의 사이는 처음 만났던 10년 전에도 각별했고, 10년이 흐른 지금도 각별했으며, 앞으로도 각별한 터였다. 그렇기 때문에 환하게 웃던 시절을 아는 남자는 흉내에 불과할 뿐인 권현석의 옅은 웃음에 안타까워할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남자의 속을, 권현석을 알고 있을 것이다. 서로 속내가 어떠한지 모르는 바도 아니었다. 하지만 권현석은 휴게실이라 이름 붙은 방 안 중앙에 놓인 탁자 앞 의자를 끌어당겨 앉았다.
"정재에게는 말을 해 두었어. 벗어나고 싶지 않느냐고. 자유를 원한다면 나와 손을 잡자고. 나는 그 때도, 지금도 제일 강력한 카드니까 이용당하더라도 쓸만할 거야."
"..경감님."
"경정님이라고 불러야지. 잊은 거야?"
부러 권현석은 호칭에 차이를 두었다.
남자는 그렇잖아도 와그르르 무너져 내리는 가슴속을 다잡기 힘들었다. 유아연의 죽음, 그리고 유상일의 죽음. 갑작스러운 죽음과 장례식이 치러지기까지 권현석은 피를 쏟듯 눈물을 쏟았다. 그 눈물속에 어떤 것이 섞여있었는지, 49제가 지난 뒤 권현석은 완전히 변모하여 세간의 비난이며 팀원들의 원망에도 귀를 기울이지 않고 박근태의 휘하에 남아있는 것을 선택했다. 착 가라앉은 듯한 검은 코트와 웃지 않는 눈빛. 가차없는 일처리는 전과는 확연히 달라 뭇 사람들은 수군거렸다. 물론 남자는 권현석이 어째서 그렇게까지 변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아니, 그 이유를 아는 것은 저뿐이었다.
'..정은창. 살아남아. 다시 만날 때까지, 반드시 살아남아야만 해.'
비인지 눈물인지 모를 것이 얼굴에서 쏟겨내렸던 밤.
권현석은 빗소리에 지지않도록 중얼거렸다. 고함쳤다. 반드시 살아남으라는 말은 주문이었다. 주정재로부터 유상일의 죽음을 전해들었을 때 죽어버린 듯 비와 같이 새하얗게 질리던 얼굴은 어찌나 소름끼치는 것이었던가. 권현석은 그 말과 함께 정은창을 뒤로했다. 정은창은 권현석의 말, 부탁대로 살아남기 위해서 말로서의 자신을 뒤바꿔버리기로 결정했다. 얼굴을 바꾸고 남자로서 유상일의 장례식에 지나가듯 참석한 그가 본 것은 지금의 권현석과 꼭 같았다. (다른 것은 외모의 차이나 현재의 직급 정도였다.)
"..많이 변하셨어요. 혜연이는..걱정하지 않던가요?"
"혜연이에게까지 걱정을 끼치면 아빠로서는 실격이지. 아니..이미 실격인가."
씁쓰름한 표정. 남자는 눈물이라도 쏟고 싶은 심정이었다.
사람들의 비난과 팀원들의 죽일 듯한 표정을 아무렇지도 않게 -아무렇지도 않을 리가 없었다- 흘려버린 권현석은 복수를 꿈꾸던 저와 닮아가고 있는 것에. 아니, 자신보다도 더 정밀하고 차가운, 정제된 분노가 권현석을 에워싸고 있는 것이 선명하게 보였다. 자멸. 자멸을 뛰어넘은 무언가를 바라고 있으나 남자의 시각으로서는 짐작하기조차 힘들었다.
"..나와 가까이 하지 않았더라면, 신분 전환해서 살 수 있었을 텐데.."
"..경감님이 없었더라면, 지금의 저도 없어요."
"..이젠 경정님이라고 불러야 된다니까."
"주정재는 위험해요. 끌어들이지 않는 편이.."
"아니. 근태 형님의 오른팔이 나라면, 정재는 근태 형님의 가장 믿음직한 살수야. 겨누는 손을 막지 못 할 거라면 총알이라도 빼 놓는 게 당연한 일이지. 위험을 감수할 만한 이유가 있어."
"..이대로라면 자멸하고 말 거예요."
그 언젠가, 두 사람 모두가 변하기 전 나누었던 대화와 비슷했다.
권현석은 빈 테이블을 톡톡 두드리기만 했다. '차라리 자멸을 바란다' 는 말을 그대로 돌려주는 일은 없었다. 남자에게는 그것이 얼마나 잔인한 말인지를 알기에. 남자 역시 그런 배려를 알았다. 사람이 변했다고 손가락질 받았으나 그런 배려는 여전히 권현석의 내부에 살아숨쉬고 있었다. 사경의 밤을 지나온 그가 자멸을 꿈꾸며 죽어나가길 바라지 않았다. 그가 그것을 바란다 해도.
"이런 이야기는 그만 하자. 식사나 같이 할까 해서 온 거야. 정재와도 친목을 다질 겸 같이 먹자고 했는데 영 적적하기도 할 것 같아서..괜찮지?"
"...경감님."
"미안해. 내 일에 휘말려들게 해서."
"..아뇨, 당신을 도울 수 있다면 그걸로 괜찮습니다."
권현석의 입은 까딱 웃는 모습을 만들어내지만, 여전히 흉내내는 웃음이다.
남자는 표정을 다잡았다. 마지막 순간, 그가 피를 묻혀야 하는 순간이 오면 제가 대신하면 된다. 그럼으로서 모든 것을 뒤집어 쓰면 끝이 날 것이다. 남자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권현석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표정과는 다른 밝은 목소리가 남자의 귓전을 때렸다.
"가자, 정재가 기다릴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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