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alatea 04

재호상일

-현실의 존재가 환상으로 탈바꿈하려면 몇 가지 방법이 있는데, 그 중 제일 극단적인 것은 그 존재의 말살이었다.

완전히 사라져 죽어버린 기록으로만 남게 되면, 언젠가 저를 발견한 사람에게 드문 확률로 환상을 선사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방법은 몹시 확률적이고......

그래서 그는, 어느 쪽을 선택했는가?

사람이 무지개를 쫓는 이유는 그 아름다움을 볼 수만 있을 뿐, 잡을 수 없고 묶어둘 수도 없기 때문에 그렇게 되도록 만들기 위해서가 아닐까. 그렇다면 나는 유상일 씨를 무지개와 동급으로 생각하는 걸까.

어느 날 우연히 만나 무례하게도 모델로서 되어줄 것을 청하고, 그가 승낙하자 기이한 열망에 달아 초상화를 그려낸 것이 전부인 사이였다. 그 이상 이하도 아닌 그런 관계인데도, 그가 자신에 대한 것을 말한 것에 다시 그려낼 수 있을지 불분명한 -그런 감정을 다시 느끼기는 몹시 어렵거니와 느낀대도 최초의 순간만큼 나를 취하게 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초상화를 그에게 선물했다. 그는 카페에 걸어도 괜찮냐고 물었었다. 카페 개업 후에 찾아와도 좋다는 듯. 작은 연결고리가 하나 생긴 것에 기뻐했었다. 나는 이 연결고리를 위해 그에게 초상화를 선물한 걸까?

하루, 이틀, 사흘, 나흘.

어느 순간부터 그의 손길이 닿았을 공간에 서서히 자연스러울만큼 녹아들어가는 초상화를 보며 전보다는 약하지만 유상일 씨를 처음 만났을 때 가졌던 열기 띤 감정이 살짝 피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그림이 제일 잘 보이는 자리에서 허리를 곧게 펴 되도록 눈높이를 좁힐 수 있게끔 노력했다. 실제하는 그를 만날 수가 없으니, 초상을 통해 실제하는 그를 투영해낸다. 그가 바라는 것처럼 황색의 조명빛을 받아 창백하지 않은 그는 창백한 그보다 아름답다. 그 눈은 훨씬 깊어보이고, 또 요요하다. 상상력이 가미될수록 그를 이상적으로 투영해 낼 수 있게 된다.

초상화를 보며 웃었다.

***

"매일같이 오셔서 그림을 보고 계신 거, 알아요."

"아..."

재석 씨는 웃으며 말했다. 사실임에도 어쩐지 부끄러워져 입을 다물었다.

"상일이에게 재호 씨 이야기를 했더니 놀라워하더라고요. 단골이 되셨다고 하니까 녀석, 웃던 거 있죠?"

"몸은..여전히 안 좋으시다던가요?"

"그런 얘기는 너무 깔끔하게 무시해버려서 말이죠."

재석 씨는 그 외에도 다른 이야기를 전했다.

가끔씩 비정기적으로 전해듣는 유상일 씨의 소식에 가슴이 쿵쾅거리며 뛰는 것은 비단 그가 어딘가에서라도 잘 살고 있구나 하는 안도감 섞인 반가움 때문이 아니었다. 처음에는 그랬을지 모르나 지금 그 소식을 듣는 내 심정은 반가움보다도 위기감에 가깝게 변해있었다. 사실 그 위기감이라는 것도 웃기는 것이었다. 내가 초상을 통해 투영한 그의 환상이, 재석 씨가 전하는 이야기에 당장에라도 산산조각 나 버릴 듯 속절없이 금갔다. 환상은 현실 위에 존재한다. 그러나 현실이 솟구치면 신기루처럼 사라져 버리기에 환상이다.

다시 한 번, 그림을 올려다 보면 그는 그저 웃고 있을 뿐이었다. 이어지는 재석 씨의 말에 그림이 희끄무리하게 탈색되는 것처럼 일렁거리는 듯하자 눈앞이 희게 점멸했다.

***

카페를 나온 뒤 숨이 턱까지 올라올 때까지 달렸다.

체력이 한계에 달해 멈춰서니 이제는 하늘에서 비가 내렸다. 한두 방울씩 떨어지던 비가 이윽고 세차게 쏟아지기 시작했고, 새하얗게 몸에 꽂히는 차가움에 과거를 되새기던 것을 끝마칠 수 있었다.

"하하...하하하."

허탈한 웃음이 터져나왔다. 개업일 때부터 쭉 카페를 드나들었던 단골 손님.

카페 사장과 관계가 있고, 한두번쯤은 카페에 들렀을지 모를, 초상화를 그린 사람.

개업일로부터 그 어떤 손님도 보지 못 했던 유령 사장과 일면식이 있는 유일한 손님.

유령 사장 대신 카페를 꾸려나가던 점장 아닌 점장을 치어버리고 도주한 뺑소니범.

바로 나였다.

내 환상이 깨어지는 것이 두려웠다. 요요한 유상일 씨를 놓치기 싫었다. 환상은 닿지 않기에 아름다우며, 그렇기 때문에 바라게 되는 것이었다. 내가 실제하는 그에게 열망하는 것인지, 초상을 통해 투영하는 환상의 그에게 열망하는 마음을 품고 있는지 스스로도 분간할 수 없어서, 어느 쪽에 집중해야 하는지 의지조차 가눌 수가 없어서 나는 그 결정을 유상일 씨에게 맡기기로 했다. 그가 실제로 모습을 드러내면 그 순간 나는 선택할 수 있을 것이다.

유상일 씨가 비정기적으로 연락을 취하는 사람이 재석 씨 뿐이라는 가정 하에 카페 일을 끝마치고 돌아가는 그의 뒤를 밟아, CCTV의 사각지대에 이르자 고의적으로 차를 몰아 치었다. 차를 몬 내 얼굴을 보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가 몸을 움직이지 않는 것에 얼굴을 가린 채로 다가가 그가 의식을 잃었다는 것을 확인하고 근처의 공중전화를 이용해 구급차를 불렀다. 그를 죽일 생각도 없었고, 죽어서도 곤란했다. 응급실로 실려갔다가 며칠 사이에 회복세를 보이며 일반 병실로 이동하기까지 파악했다. 그 사이에 연락을 취했다면 재석 씨의 긴 부재를 깨달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혹여 그렇지 않다 해도 카페 일로 보고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장기간 카페를 비우게 되면 왜 비우게 되었는지 털어놓아야 할 테고, 제 일을 대신 처리해 주던 친한 친구가 때 아닌 중상으로 병원에 입원해 있다는 소식을 들으면 반드시 서울로 올라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사고를 벌이던 날 밤, 죄 없는 사람을 고의적으로 치어버린 내게도 보이지 않는 후유증이 하나, 이제까지 자리잡고 있었었다. 기억의 상실이었다. 유상일 씨를 만나 그림을 그렸던 그 날부터 쭉 열에 달고 싸늘하게 식기를 반복고, 스스로 만들어낸 환상에 심취해 있다가, 죄를 범하고 말자 놀라 화들짝 깨어난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까지 행동한 것에 스스로 두려움을 느꼈는지 광기에 이르는 동기를 포함한 모든 것을 덮어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의 중심에 있던 유상일 씨가 카페에 나타나 내 이름을 부른 순간 내가 잊으려 했던 것들이 모조리 터져나왔다...라고 생각하고 있다. 남의 이야기를 말하는 것처럼 결론을 내리는 것에서 이미 정상의 범주는 진작에 벗어난 것인지도 모른다.

-이 카페의, 유령 사장입니다.

유상일 씨의 말이 머릿속에 울렸다. 머리카락이 빗물에 젖어 눈앞을 가렸다.

요양의 성과가 크게 있었던 것일까. 유상일 씨는 전보다도 건강해진 모습이었다. 까만 눈빛은 생기가 돌았고, 혈색은 좋아졌으며, 풍기는 분위기 또한 많이 바뀌어 있었다. 분명 바라마지 않았던 것 같은데 무언가가 삐걱삐걱 어긋나 있었다. 대체 무엇 때문인지 곰곰히 생각하다가 도출된 결론에 다시 한 번 빗물 섞인 웃음을 터트렸다.

내가 본 그는 요요한 그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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