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alatea 03

재호상일

-그는 환상이 갖고 있던 현실감을 두 눈으로 목격한 유일한 사람이 된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 감정을 품은 것도 순간, 깨지는 것도 순간이었다.

어둑한 저녁에 다짜고짜 사람을 불러와 모델로 삼아 그림을 그려내기까지는 꽤나 많은 시간이 흘렀다. 나는 나대로 열기에 들뜬듯이 손을 열심히 놀렸고 수많은 종이를 구기고 찢으며 내던지다가 마지막 한 장에 겨우 유상일 씨의 초상화를 만족할 수 있는 정도로 그려넣는 것에 성공할 수 있었다.

모델에 비해 그림이 떨어지는 것이 사실이었지만 -모델인 유상일 씨가 보통 잘생긴 게 아니었다- 온 집중력을 쏟아부었기 때문인지 기교는 부족했으나 완성된 것을 보자 여러가지 감정이 들었다. 그 어느 때보다도 충실히 그린 것 같은 만족감, 그러면서도 실력이 뒤떨어지는 것에 대한 아쉬움, 자꾸 들여다 보고 있으면 말못할 감정들이 불러 일으켜지는 것 같은 울렁거림. 마라톤이라도 한 것처럼 숨이 퍽 가쁜 느낌이었다. 손에 쥔 것을 내려다보니 백색등의 불빛을 받아 창백해 보이는 그림속의 유상일 씨는 웃는 얼굴이 있었다. 내가 처음 본 얼굴이 그랬듯이. 작업이 끝났음을 안 유상일 씨가 자리에서 일어나 조금씩 몸을 푸는 것에 자기 도취적인 감정들에서 깨어나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몇 시간 넘게 고생한 사람을 앞에 두고 대체 무슨 실례를. 부끄러울 따름이었다.

"죄송합니다. 시간이 너무 걸렸지요..?"

"괜찮습니다. 이렇게 오래 걸릴 줄은 몰랐지만..저도 감안한 문제니까요. 제가 그림을 한 번 볼 수 있을까요?"

"아....네! 물론이죠."

다른 사람의 평가를 받는 건 언제나 두려운 일이었다.

나는 턱없이 부족한 실력을 가진 사람이었고 하물며 그림의 모델에게, 그것도 잠시 몇 마디 주고 받았을 뿐인 사람에게 평가를 받자니 종이를 쥔 손이 떨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유상일 씨의 눈이 종이로 향하며 그늘이 살짝 드리워졌다. 평가받는다는 것에 대한 것인지, 아니면 유상일 씨의 그 모습 자체에 두근거리는 것인지 가슴이 터질듯 쿵쿵거렸다. 조용히 미소 지은 유상일 씨는 고개를 들었다.

"솜씨가 좋으시네요. 서재호 씨."

"아닙니다. 아직 많이 부족합니다."

"그림속의 저는 조금 더 건강해 보이네요."

건강? 창백해 보이는 것이 아니라? 몃쩍게 웃던 것을 멈췄다.

"제가 왜 서재호 씨의 제안을 받아들였는지 말씀드리지 않았죠?"

"예. 그렇..죠."

"저는 현재 건강이 그리 좋지 못 합니다. 임대한 곳에 카페를 개업하는 일이 마무리 되면 한적한 곳에 요양을 갈 생각이지요."

"요양이라면..?"

"말 그대로, 요양이죠. 서울을 떠나 공기 좋은 곳에서 몸을 추스리는."

"그런데, 그것과 지금 일이 무슨 관계가 있는 거죠?"

"다시 못 돌아올 수도 있어서, 추억을 남기고 싶었습니다."

다시 돌아오지 못 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생각하는 것은 바보 같은 일이었다. 가로등 아래에서 창백하게 보였던 얼굴, 그림속에서도 창백한 느낌을 받았던 건 모델, 유상일 씨의 얼굴 그 자체가 창백했기 때문이었나. 어쩐지 입이 말라왔다. 나는 이기적이게도 아주 가끔 시간이 나는 날이 오면 그림의 모델이 되어줄 수 없겠느냐는 부탁을 해 볼까 하는 생각을 품기도 했다. 그런데 며칠 뒤에 떠난다면, 영영 돌아오지 않는다면.

"좋은 경험이었어요. 제게도. 서재호 씨가 제 얼굴을 뚫어져라 봤듯이, 저도 서재호 씨의 얼굴을 계속 바라보고 있었거든요."

유상일 씨가 그림을 다시 내게 건네며 손끝이 스쳤다. 내 손끝에 불을 붙인 듯 타오르던 열망의 감정은 아직까지 남았는지 다른 사람의 체온이 손끝으로 스치자 화다닥 내부로 불씨를 튀기는 듯 했다. 그래서 나는 내 한 손에 그림을 건네고 빠져나가는 그 손을 다른 자유로운 손으로 꽉 잡았다. 으응? 하는 얼굴의 유상일 씨가 겹쳐진 손을 보았다가 내 얼굴을 보았다. 그리곤 손을 가볍게 흔들며 무슨 의미인지 답하기를 요구했다.

"저, 괜찮다면...괜찮다면 지금 그린 것을 유상일 씨에게 선물하고 싶습니다."

유상일 씨는 예상하지 못 한 답변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도 모르게 절로 내뱉어진 말이었다. 어려운 결정인데도 쉬이 나가버린 말이었다. 다시는 만날 수 있는지도 모르는 사람. 모처럼 마음에 들게 그려진 그림을 선물한다는 것은 내게도 조금 결심이 필요한 일이었다. 나 또한 욕심이 났고, 또 다시 이 사람을 그려내지 못 할 것이라는 아쉬움이 들었다. 이런 감정들은 내가 한 말로 인해 마지 못 해 정리가 되었다.

"어...제가 받아도 괜찮겠어요?"

"주머니가 빈곤해서 모델료를 드릴 수가 없거든요. 유상일 씨를 그린 거기도 하고, 그 대신..이라고 하기엔 좀 그렇지도 모르겠지만.."

"아니에요. 그런 보답을 받을 생각으로.."

"저는..그린 것만으로 충분합니다. 그러니 받아주세요."

나는 종이를 건넸다.

다시 그림을 받아든 유상일 씨가 지어보였던 옅은 미소는 몹시도 아름다웠다. 나는 저 얼굴을 잊지 못 하겠지.

"카페가 개업하면, 거기에 걸어두어도 괜찮을까요?"

"..제 쪽에서 영광이죠."

가슴 한 켠이 욱신거렸다. 그에게 그림을 선물하지 않고 내가 소유하고 있었다 해도, 이 욱신거림이 필연적으로 찾아왔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유상일 씨는 많은 시간이 흐른 것에 이만 돌아가 보겠다며 등을 돌렸다.

***

그리고 며칠 뒤에 카페의 개업 소식을 들었다. 당연하게도 유상일 씨는 없었다.

서울을 떠나 요양을 간다고 했었지. 처음 들어가 본 카페는 평일 아침 시간대이기 때문인지 사람이 별로 없었다. 그는 과연 말했던 대로 그림을 카페 내부에 걸어놓았을까? 사실 그게 더 궁금했는지도 모른다. 카운터를 지키는 남자에게 음료를 주문하고 카페 안을 둘러보다가 출입구에서 왼쪽으로 뻗어나가는 쪽의 벽에 그의 초상이 걸려있었다.카페 특유의 따스해 보이는 조명 때문인지 창백해 보이던 그림속의 유상일 씨는 그 예전 그가 평했던 대로 꽤, 건강해 보였다. 내 손이 닿지 않는 그림에 나는 나무에 열린 포도를 시다고 말하는 여우의 감정을, 동시에 닿지 않는 곳에서 새하얗게 있다가 녹을 눈에 대한 감정을 품었다.

나는 그 감정이 유상일 씨, 그를 향한 것인지, 그를 그려낸 내 그림을 향한 것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

내가 시간 나는대로 카페를 찾아가 시간을 소비하면서 단골이라는 꼬리표가 붙을 즈음, 나는 종업원 뿐만 아니라, 그 대신 카페를 운영하는 것으로 추측되는 남자와도 꽤 대화를 할 수 있었다.

"저 그림을 그려주신 분이라고요?"

"예..부끄럽지만, 그렇습니다."

"그럼, 성함이 혹시..서재호 씨?"

"맞습니다."

"상일이에게 이야기 들었어요. 녀석은 저 그림을 정말 마음에 들어했어요. 다른 손님들도 마찬가지고요."

"과찬이십니다. 근데 그..유상일 씨는...?"

"그 녀석을 찾아오신 건가요? 녀석은 여기 없습니다. 자기 이름으로 카페를 낸 녀석이 저한테 다 맡기고 잠시 지방에 내려가 있죠."

"몸이 좋지 않아서 요양을 한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제 이야기를 다 해줬네요. 그대롭니다. 카페 상황을 보고할 겸, 종종 녀석과 연락을 하곤 합니다. 저한테도 자기가 어디있는지 말을 안 해준다니까요?"

-다시 못 돌아올 수도 있어서.

그 말이 갑작스레 떠올랐다. 혹시 연락하거든 안부를 전해달라고 부탁하며 대화를 중단했다. 카페를 대신 도맡아 운영해 줄 정도라면 보통 친밀한 사이는 아닐 것이다. 그런 사람에게도 자신에 대한 것을 말하지 않은 걸까. 그 정도로 심각한 것일까? 초상화로 볼 수 있는 그의 모습만이 내가 만날 수 있는 전부인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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